천호동성당 게시판

주교님께 올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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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숙 [rkdalstnr482] 쪽지 캡슐

2007-01-30 ㅣ No.1822

안녕하십니까?

강민자입니다.

저에게는 또한 지주들에게는 법률 자문을 받을 법률가가 없었기에 되지도 않는 소모전을 많이 했습니다. 무식하기에 강민자는 하늘만큼 땅 만큼 아주 많이 용감했습니다.

2006년 11월 23일 목요일 3시 변호사님과 저의 만남 상담을 내생에 최고에 기쁜 날이었다고 기록 하겠습니다. 변호사님께서는 말없이 서류들을 보신 후 천주교 원주 교구 단독으로 처음 시작을 바이블 파크로 문화관광부 승인을 얻으려다가 승인을 받지 못하자 횡성군청과 협약을 하고 명칭을 문화 유적지로 변경하여 문화관광부의 승인을 얻어 냈다고 하셨고, 지주 중 한분이 나중에 오신 분께서 횡성군 “전”군수님께서 천주교 신자인데 풍수원성당을 개발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요청을 주교님께서 했었다 라고 하시더군요.

계약을 하고 정부 승인을 받은 후 이를 축하하는 연회를 “각”기관장들을 초청을 하여서 장소는 풍수원성당에서 음식을 해놓고 성대한 축하 잔치가 있었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횡성군청 자체에서는 지주들에게 잘못한 점들이 두루있다라고 지적을 하고 이 사업 시행에는 법을 한 치에 오차가 없이 잘 지켜서 아무런 험이 없다 했습니다. 각 기관에서는 무슨 일을 시행할 때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람들을 분류하여 이의 제기를 하지 않을 사람에게는 제때 공문을 보내지만,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의 제기를 할 수 있는 시일을 아주 촉박하게 최대한 늦게 알린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서류상 이 사업이 2002년도부터 시작을 하였는데 저는 첫 시작의 공문을 2003년도 3월 말 경 처음 받았고 나중에 확인한 바 있지만 현지 주민 지주들에게는 2002년 봄부터 받았고, 그 외 다른 지주분들도 저와 비슷한 시기고 또 다른 지주분은 2003년도 6월 달에 처음 받았다고 2005년 4월 11일 횡성군청을 처음 찾아갔을 때 그런 말씀들이 오고 갔었는데 그 때는 왜 군청에서는 공문을 똑같이 평등하게 보내지 않았었나 의문으로 남았었지만, 시기와 때가 다 지나간 지금에서야 알았습니다.

지주 중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는 6월달에 보냈으며 부당하다는 행정소송을 할 기회마저 놓치게 했느냐고 그 답변 하세요 하니까 군 직원 답변은 어떻게 하다보니 바빠서 그렇게 됐다라고 하더군요. 3월 말경 제가 처음 공문을 받았을 때 아주 촉박 했었다는 기억이 납니다.

원주교구 주교님은 그 동안 지주들에게 수용을 않겠다는 말씀들을 수차례 했었고, 저에게는 약속도 해주셨다라고 했더니 그걸 의식해서인지 협약 파기 형식을 갖추었기 때문에 이 3번에 협약파기 요청함으로 인해서 약속을 이행함으로 인정됨 각서에 효력은 소멸되었습니다. 원주교구는 법률자문을 받아가며 지주들과 저를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2005년 11월 26일 3시 30분에서 4시 20분까지 주교님께 생업에 마음 놓고 종사 할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겠습니까? 물었을 때, 그럼요 그럼요 도울 수 있지요. 할 수 있지요.
법으로 수용을 할 수 있다지만, 법으로 않겠다라고 그렇게 말씀하셨고 100%수용을 막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주들과 저는 100%수용을 당했고, 명의 까지 빼앗겼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제 땅을 100% 책임지셔야 합니다. 100% 책임져 주십시오. 50분 동안 말씀하셨던 그 모습과 그 말씀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마치 어제 일처럼 1년이 지났지만 제 머리 속에 생생합니다.

주교님 50분 동안 그 모습들을 가슴에 안고 마음 한 가운데 깊이 새겨 놓고 낮 에는 정신없이 바쁘게 지나가고 저녁이면 저녁마다 탄천길을 1시간 30분씩 매일 걸으면서 희망이라고 희망의 노래를 부르며 주교님께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제가 주교님께 말씀 드렸던 말을 지키려고 무던히도 노력을 했지만, 먼저는 5월 말경에 받아 보셨을 편지에 자세히 적었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받아보셨을 텐데 아무런 답변이 없어서 2006년 6월 1일 목요일 밤9시 10분경 주교관에 전화로 총대리 신부님과 통화를 하면서 지금까지 지켜봤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며 네게 있는 자료를 어디든지 어느 곳이든지 공개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무슨 답변이든지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하고 그런 생각으로 전화를 했었는데 신부님께서는 우리로서는 할 만큼 했다며 “맘대로”하라는 말씀을 하시기에 주교님 뜻도 같으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6월 4일 일요일 풍수원 신부님께서는 제 목소리는 컸지만 말 한마디 하고 112신고해서 저를 쫓아내고 6월 4일 이후부터 인터넷에 띄웠습니다.

저는 맘대로 하라는 답변을 받고 시작했기 때문에 제가 무엇을 하든지 공개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슨 이유든지 이의가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저 때문에 명예가 실축 된 일이 있다면 명예가 훼손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쓰겠습니다. 훼손된 부분이 있다면 저를 상대로 행정 소송하십시오. 제게 그렇게 큰 잘못이 있다면, 제게 돌을 던져 주십시오. 피하지 않겠습니다. 저에게는 더 이상 얻는 것도 잃을 것도 없습니다. 쥐가 더 이상 도망갈 길이 없습니다.
공탁금은 앞으로 10년 동안 법원에 그대로 둘렵니다. 변호사님께서는 공탁금을 빨리 찾아오고 마음에서 모두 다 털어버리고 병나지 말고 마음 편히 잘살라 라고 하더군요. 어린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처럼 개구리소년 네가 울면 무지개 연못에 비가 온단다 비바람 몰아쳐도 일어나고 일곱 번 넘어져도 일어나라 울지 말고 일어나 피리를 부르렵니다. 동해 바닷가 모래 무게보다 더 무거운 아픔을 세계를 향해 크게 소리쳐 큰 소리로 목이 터지도록 마음의 노래를 부르렵니다.

10년 전 그 땅을 매입하려고 할 때 제 남편 시몬 씨는 성당이 있어서 나중에 집짓고 살 때 정말 좋겠다며 좋아 했지만, 저는 성당이 있어서 안 된다고 성당이 싫다며 서로 다투다가 땅 매입을 하게 되었는데 제가 남편의 뜻을 끝까지 꺾지 못했던 것을 정말 크게 후회 합니다.


2005년 12월 27일 이 일이 발생한지 처음으로 몇 년 만에 교구로부터 공문이 왔었는데 12월 27일 무슨 일이 있어도 지주들 전원 꼭 참석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모임에서 교구로 땅을 넘겨 달라고 했었는데 매정하게 잘랐다고 하지만 저는 그 자리에서 분명히 말한 바가 있습니다. 군청에서 그 동안 공문을 수차례 보내서 수용을 하겠다고 하는 시점에 이르러서야 땅을 교구로 넘겨 달라고 한들 누가 그 소리가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처음 시작 할 때 공청회나 설명회도 한 번 없었습니다. 그리고 동의한 적도 없는데 수용이 임박하고 불가피 하다는 정점에서 말입니다. 분명히 제 뜻을 말씀 드렸습니다.

수용이 임박 했는데 법으로 하는 천주교 원주 교구가 싫으니 법을 멀리 떠나보내라고 원주 교구 홀로 서라고 그렇게 되었을 때 땅 값이 많든 적든 조건 없이 주겠노라고 제 말이 끝나자 그 자리에 지주분들 전원 모두는 그 말에 동의한다고 하였습니다. 같은 목소리였고, 다들 똑같은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동안 편지로 수차례 법으로 하지 말라고 법이 싫다고 했었지만, 원주교구에서는 법률 자문을 받아가며 법을 아주 적절하게 지금까지 잘 사용해 오고 있습니다.

원주교구는 빠른 지름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빠른 길로 가려고 한번도 노력해 보지도 않았고 그 빠른 지름길을 가려고도 안했습니다. 먼발치에서 먼 길을 뱅뱅 돌다가 결국 지주들 때문에 공이 군청으로 굴러 가버렸다고 원망을 하지만, 공이 군청으로 굴러갔든 삼천포로 굴러갔든 네 알바가 아닙니다. 천주교 원주교구에 법이 처음부터 없었더라면 그 땅 진작 벌써 주워서 공사가 오래 전에 다 끝나 버렸을 것입니다.

원주교구 손에는 군청에 힘과 권력과 법이 있었기에 ‘저와 지주들이 협조를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오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6년 12월 3일

강민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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