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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트 슈타인 vs.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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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 [kspeter] 쪽지 캡슐

2000-02-19 ㅣ No.532

안녕하셨어요?  일주일만에 굿뉴스에 들어왔습니다.  약속드린대로 페미니즘에 관해 제가 갖고 있는 첫번째 자료를 번역하여 올립니다.  제일 분량이 적은 내용입니다.  추가 자료들도 번역되는대로 토론실에 올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신학이나 철학을 공부해보지 못한 청년 평신도가, 가톨릭에 대한 개인적인 독서를 토대로 번역한 글이라 오역된 부분도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점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에디트 슈타인 페미니즘

(Edith Stein vs. Feminism)

 

 자넷 E. 스미츠, Ph.D.

달라스 대학 철학과 교수

Janet E. Smith, PhD

Associate Professor of Philosophy

University of Dallas

역자 : 김 신 베드로

 

 

  페미니즘은 내게 그리 크게 어필하지 못한다.  페미니즘이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던 1960년대에 나는 십대였다.  짧은 기간동안이나마, 나는 페미니즘에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페미니즘의 목표가 모성(母性)을 고양시키고, 어머니들의 가정에서의 수고의 가치를 응당히 인정하는 것이라면 나름대로의 가치를 갖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곧, 페미니즘은 모성에 대한 적대감으로 가득찬 운동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여성이 자신의 자궁 속의 아기를 아무 거리낌없이 죽이고, 주간 탁아소에 아기를 맡겨 놓는 정도까지 그들에게는 경력과 성취, 돈, 명령권, 위신 등이 중요한 것이었다.

 

  나의 삶의 상당 부분에서, 페미니스트들은 진정한 페미니즘(authentic feminism)이라는 용어를 놓고 나와 실랑이를 벌여온 적(敵)들이었다.  나는 페미니즘과 남녀 평등에 대한 인식의 중심 의미에 관한 용어를 새로이 천명하길 희망하는 분들(그분들 중 두 분, 즉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헬렌 앨버레(Helen Alvare)는 나의 영웅들이다)을 비난하지 않는다.  때때로, 직장에서 일부 남성들의 과잉 친절과 보호에 지루함을 느끼는 (그리고 어떤 남성들의 용기있는 행동에는 감사하고 있는) 한 여성으로서 나는 여성의 동등한 존엄성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아직까지 도래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여성을 지배하는 남성의 욕망은 (인류의) 타락(the Fall)의 결과이며 이 눈물의 골짜기에서는 분명히 결코 근절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보다 큰 위험이란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그러한 현실은 남성과 여성 모두의 행복에 손상을 주고 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남녀가 오직 생리학적으로만 다르다고 주장(마치 그것이 별 차이가 아닌듯!)하고 있음에 나는 당혹감을 금치 못한다.  군대에서 여성을 전투소대에 투입시키는 조치처럼 신체적 차이가 분명히 문제가 되는 영역에까지 여성을 개입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여전히 이러한 해악적이고도 어리석은 이데올로기의 손아귀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준다.  아직도 생생한 대학원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다.  토론토의 늦가을 암울한 습기와 회색빛 추위를 피하려고 따뜻하고도 편안한 장소를 찾으려고 서둘러 가면서, 나는 미식축구를 하는 남자들로 가득찬 질퍽거리는 운동장을 보았다.  나는 놀람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그들은 이상야릇한 길쭉한 공을 차다가 멍들고 진흙으로 뒤덮인 운동장에서 뒹굴었다.  나는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는 술취한 여학생들 외에는 그러한 운동에 여성이 참가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한다.  나는 나의 의문 ― 즉, 남성은 외계종(^^)이고 여성은 자신에서 발견하는 보편적 기반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 ― 을 확인시켜주는 증거를 잡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가톨릭 성녀들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께서 그녀의 마차를 진흙탕 속에 뒤엎으셨다는 말로 잘 알려져 있다.  만일 이것이 당신이 친구들을 대하는 태도라면, 당신은 많은 친구를 얻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포기와 겸손으로 유명한 소화(小花) 데레사는 자신을 어린이 예수님께서 토닥거리시는 공으로 비유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들이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다소 지루할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에디트 슈타인(Edith Stein)이라 알려진 성녀 데레사 베네딕다(St. Teresa Benedicta)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성녀께서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대한, (만일 페미니스트들이 읽는다면) 매우 격론을 불러 일으킬만한 몇 편의 글을 쓰셨다.  거룩함을 찾는 사람들은 그녀의 삶에서 영적 진보를 발견할 것이고, 현상학적 토미스트(phenominological Tomist)로부터 철학적 조명을 얻길 갈망하는 사람들은 그녀의 저술에서 측량할 수 없을 만큼의 보물을 발견할 것이다.  이성(異性)과 관련을 맺고 자녀를 키우려 하는 사람들은 에디트 슈타인의 저작으로부터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관한 통찰을 위한 좋은 조언을 받는다.

 

  에디트 슈타인은 학자이자 근원적 철학자로서, 부모됨(parenthood)이란, 그것이 신체적이든 영적이든 모든 인간 존재의 성소(聖召)임을 깨달았다.  다음 세대를 낳고 기르도록 질서지워져 있다는 것은 바로 우리 존재의 본성(nature) 안에 각인되어 있는 내용이다.  우리 시대에 너무도 많은 남성과 여성들이, 실제로 부모가 되고 나서야 자녀 양육의 즐거움을 알게 된다는 사실은 나를 무척 슬프게 한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삼십대 이후까지 자녀 출산을 미루고 있다가, 자녀를 사랑하고 기르는 것보다 더 만족스럽고 의미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서야 돌연히 발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소가족에서 자라났고 자신보다 훨씬 어린 남동생, 여동생이나 아기들에 대한 체험이 없기 때문일까?

 

  나는 십대들이 어떻게 아기와 어린이들을 돌보는지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것은 성인 초년기(young adult)를 졸업하는 자연스러운 단계이기 때문이다.  아기를 원하는 이의 마음을 채워 주는데에는 아기의 매혹적이고 사랑스러운 미소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아기를 낳는다는 온당한 맥락에서 결혼을 권하는데 있어 아기들의 약함과 요구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나는 10대 중반 연령의 청소년들이 캠프 카운셀러나 운동장 놀이 감독자 역할을 할 것을 강력하게 권한다.  질서를 조율할 줄 아는 책임있는 인물이 된다는 것은 그들의 행동을 상당히 진보시킬 수 있다.  어쨋든, 아들이 남편과 아버지가 될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딸이 아내와 어머니가 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은 부모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그러한 역할의 성공적 달성 안에 있는 행복을 위해서이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점들에 대한 에디트 슈타인의 분석은 각각의 성에서 구분되는 힘과 아울러, (인류의) 타락으로부터 결과된 특징적 오류를 인식하고 있다.  그녀는 남성의 고갱이가 되는 갈망이 활동과 노동과 객관적 성취들 안에서 드러난다고 이야기한다.  남성은 그 자신의 것, 타자(他者)의 것을 구분하는 문제에는 덜 관심이 있다.  그녀는 남성이 경력(careers)에 대한 일방적 충실 경향을 갖는다고 관찰한다.  삶의 모든 부분들과의 조화로운 상호연결을 갈망하는 여성의 특성은 남성이 자신의 직업뿐만 아니라 가정에 헌신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고 에디트 슈타인은 말한다.  에디트 슈타인에 의하면, 여성에게 가장 깊은 열망이란 사랑의 유대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한 사랑의 유대가 발달해 나가면서 성숙을 심화시키고 동시에 다른 이들 안에서 완성에 대한 갈망을 자극하고 심화시킨다.  전체성(totality)과 특이성 안에서 존재를 이해하는데 필수적 기관(器官)인 감정은 [여성] 존재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다른 책임들에 손상을 줄 정도로 경력에 집중하기 보다는 객관적 고찰에 대한 자신의 느낌들에 많은 비중을 두는 것이 여성의 일방적 성향이다.  에디트 슈타인은 모든 전형적인 여성적 결점들에 대한 자연스러운 좋은 처방이 되는 것은 딱딱한 객관적 작업이라고 말한다.  이는 그 자체로, 과도한 개인적 태도를 지양(止揚)할 것을 요구한다.  그녀는 남성들이 여성의 이러한 객관성 증진과 개발을 매우 적절히 도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에디트 슈타인의 저작들은 남성과 여성의 근본적 차이에 대한 주장과 아울러 여성은 타인에 대한 봉사 안에서 완성을 발견하고 남성은 다른 이들을 리드하는 데에서 완성을 발견한다는 주장하고 있는바, 페미니스트들을 기겁하게 만들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에디트 슈타인의 다음 말씀에 놀랄 것이다 : "때로 남성은 여성이 보다 유능할 경우 여성이 상황을 통제하도록 위임함으로써 최상의 리더쉽을 발휘한다."  그녀는 모든 직업들은 여성에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여성은 그들의 직분적 의무를 확연한 여성적 방식으로 수행할 거라고 믿는다.

 

   최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상(思想)에 관한 강연회가 세인트 루이스에서 열렸다.  헬렌 앨버레(Helen Avare)와 나는 카알 번슈타인(Carl Bernstein)과 더불어 패널 석상에 앉아 있었다.  교황에 대한 번슈타인의 전기는 교황성하께서 인권에 대해서는 이상적 리더이시지만 여성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는 퇴행적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헬렌과 내가 성(性)과 가정과 여성에 관한 교황성하의 가르침들을 극찬하면서 그 가르침들을 여성에 유익한 것으로 역설(力說)하는 것을 보고 번슈타인이 매우 기겁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나는 아마도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에디트 슈타인이라는 친근한 철학자로부터 매우 많이 배워 오셨기 때문에 그녀를 들어 높이고자 열망하신다고 추측하고 있다.  현상학자들은, 사실 자체로 되돌아가며, 이론으로써보다는 경험으로써 형성된 사고(思考)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다.  에디트 슈타인과 교황성하의 저작들은 인간의 경험에 매우매우 충실하다.  페미니스트 이데올로기 주창자들이 여성과 남성에 대한 자신의 오류적 이론들을 포기하고 에디트 슈타인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같은 사상가들의 생각 속에 담겨 있는 심원한 지혜를 볼 줄 알게 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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