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꼭필독] 요한 15,9-17에서 -사랑 안에 머물다-는 -사랑의 행위 안에 머물다-로 번역되어야 한다[번역미숙] 773_love so_that dilectio 1114_1122_

2213 . [59.16.191.*] 2021-05-10

 

게시자 주: (1) 본글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213.htm 에 접속하면, 본글 중에서 제시되고 있는 출처 문헌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q&a.htm 에 접속하면, 본글의 제목이 포함된, "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제공의 모든 게시글들의 제목들의 목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i) 2006년 12월 16일에 개시(開始)하여 제공 중인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날마다 영어 매일미사 중의 독서들 듣고 보기, 그리고 (ii) 신뢰할 수 있는 가톨릭 라틴어/프랑스어/영어 문서들 등은,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손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  (PC용, 날마다 자동으로 듣고 봄) [주: 즐겨찾기에 추가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m (스마트폰용) [주: 네이버 혹은 구글 검색창 위에 있는 인터넷 주소창에 이 주소 입력 후 꼭 북마크 하십시오] 

 

(2) 이번 글에 서술된 바는,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2017년 3월 중순부터 4월 말 기간 동안에 독자적으로 개발한, 따라서 그 저작권(著作權, Copyright)이 필자에게 있는, Data Mining 기법을 적용한, "AI 기반, 한시(漢詩) 표준 해석법 [A Standard Method of Interpretation of Chinese Poems(漢詩), Based on AI(Artificial Intelligence)]"에서 사용하고 있는 방법을, 또한 사용하여 분석하고, 이 분석의 결과에 따라 도출된 바들/결론들입니다.  

 

 

부제(副題): 예수님과 그리스도교 신자들 사이의 통공의 성경 근거 

 

1. 들어가면서

 

게시자 주: 바쁜 분들은, 본글의 결론들을 담은 아래의 제3항을 먼저 읽도록 하십시오.

 

1-0. 본글은 예수님(포도나무)과 그리스도교 신자(그 가지)들 사이의 통공(communion)의 성경 근거가 분명한, 요한 복음서 15,9-12가, 우리나라 지역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크게 훼손되었다는 판단에 따라, 바로 이 훼손을 회복시키고자 작성되었습니다.

 

즉, 본글은, (i)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경우와, (ii) 강생하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의지/뜻(will)가 또한 분명하게 전달되는 표현인, "예수님의 사랑의 행위(act) 안에 머무는" 경우, 이들 둘 사이의 커다란 차이점에 대한 글입니다.

 

1-1. 우선적으로, 요한 복음서 15,9-17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나해 부활 제6주일 복음 말씀입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b_east_6.htm 

 

특히,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가르치는 바의 마지막 부분에서, 요한 복음서 15,10에서,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 사이의 관계"와 마찬가지인,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 사이의 공통 결합(common union), 즉, 통공(communion)을 형성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당신의 계명을 지킬 것>이 제시되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1-2.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예수님의 새 계명이 포함되어 있는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 강도(講道)"(요한 복음서 13,33-17,26)의 내용 전반에 대한 요약 해설인, 요한 복음서 13,33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을 학습할 수 있습니다. 필자에 의하여 마련된 우리말 번역도 제공되고 있으니, 꼭 필독하도록 하십시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palm_tue.htm <----- 필독 권고 

(발췌 시작)

30. The indication that "it was night" is not just a reference to the time of day but to darkness as an image of sin, an image of the power of darkness whose hour was beginning at that very moment (cf. Luke 22:53). The contrast between light and darkness, the opposition of good and evil, is frequently met with in the Bible, especially in the Fourth Gospel: even in the prologue we are told that Christ is the true Light which the darkness has not overcome (cf. John 1:5).    

 

30. "때는 밤이었다"의 암시는 단지 하루의 시각에 대한 언급일 뿐만이 아니라,   바로  그 순간에 그 힘이 시작하였던 어두움(darkness)의 힘에 대한 표상(image, 表象)인(루카 복음서 22,53을 참조하라), 죄에 대한 표상으로서의 어두움에 대한 언급입니다. 빛과 어두움의 대조(the contrast), 선과 악의 대비(the opposition)는 성경에서, 특별히 네 번째 복음서에서, 자주 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둠이  오르지(overcome) 못하였던 참빛(true light)임을 심지어 바로 이 복음서의 서문에서 우리는 듣게 됩니다 (요한 복음서  1,5를 참조하라).

31-32. This glorification refers above all to the glory which Christ will receive once He is raised up on the cross (John 3:14; 12:32). St. John stresses that Christ's death is the beginning of His victory: His very crucifixion can be considered the first step in His decension to His Father. At the same time it is glorification of the Father, because Christ, by voluntarily accepting death out of love, as a supreme act of obedience to the Will of God, performs the greatest sacrifice man can offer for the glorification of God. The Father will respond to this glorification which Christ offers Him by glorifying Christ as Son of Man, that is, in His holy human nature, through His resurrection and ascension to God's right hand. Thus the glory which the Son gives the Father is at the same time glory for the Son.

 

31-32. 바로 이 영광을 더하는 행위(glorification)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께서, 일단 당신께서  십자가 위에 들어 올려지면, 장차  받게 되실 바로 그 영광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요한 복음서 3,14; 12,32를  참조하라). 성 요한(St. John)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당신의 승리의 시작임을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당신의 바로 그 십자가 형벌(crucifixion)이 당신의 성부께로의 당신의  승천에 있어서의 첫 번째 단계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것은 성부께 영광을 더하는 행위(glorification)인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사랑/애덕(charity, caritas, agape) 때문에(out of love) 죽음을 자발적으로 수용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거룩한 의지(the Will of God)에 대한 지고한 순명 행위(act of obedience)로서, 하느님께 영광을 더함(glorification)을  위하여 사람이 봉헌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희생을 수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부께서는, 그리스도께서 당신께 바치시는 바로 이 영광을 더하는 행위(glorification)에 대하여, 그리스도에게, 사람의 아들 (Son of Man)로서, 즉, 당신의 거룩한 인성(holy human nature) 안에서, (i) 당신의 부활과 (ii) 하느님의 오른편으로의 승천을 통하여 영광을 더하는 행위(glorifying)로써, 장차 화답하실 것입니다.(*)  그 결과 성자께서 성부께 바치시는 바로 그 영광은 동시에 성자를 위한 영광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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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이에 대하여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는 글을 학습할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192.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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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s disciple will also find His highest motivation by identifying himself with Christ's obedience. St. Paul teaches this very clearly when he says: "Far be it from me to glory except in the cross of the Lord Jesus Christ" (Galatians 6:14).

 

그리스도의 제자는 또한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순명과 행동을 같이 함(identify oneself with)으로써 당신의 최고의 동기(motivation)를 장차 발견할 것입니다. 성 바오로(St. Paul)는  그가 다음을 말할 때에 이것을 매우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갈라티아 6,14).

33. From this verse onwards the evangelist recounts what is usually called the iscourse of the Last Supper; in it we can distinguish three parts. In the first, our Lord begins by proclaiming the New Commandment (verses 33-35) and predicts Peter's denials (verses 36-38); He tells them that His death means His going to His Father (Chapter 14), with Whom He is one because He is God (verses 1-14); and He announces that after His resurrection He will send them the Holy Spirit, who will guide them by teaching them and reminding them of ever thing He told them (verses 15-31). 

 

33. 이 복음 사가는, 이 절부터 앞으로(onwards), 통상적으로 최후의 만찬 강도(講道) (the discourse of  the Last Supper)라고 불리는 바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하며, 그리고 이 설교에 있어 우리는 세 개의 부분들을 구분 할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에서 우리의 주님께서는  새 계명(the New Commandment)을 선포하심으로써 시작하시며(13, 33-35) 그리고 베드로의 부인(否認, denials)들을 예언하시며(13, 36-38)그리고 당신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의  죽음이 당신께서 당신의 성부께로 가심을 의미한다고 말씀하시는데(제14장), 당신께서는  하느님이시기에, 당신께서 그 분과 함께 하나(one)이시며, 그리고 당신의 부활 이후에 당신 께서 장차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실 것임을 당신께서 선포하시는데, 이 분께서는, 당신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던 모든 것에 대하여 그들을 가르치시고 그리고 그들을 상기시킴 으로써, 장차 그들을 인도하실 것입니다(14,15-31).  

The second part of the discourse is contained in Chapters 15 and 16. Jesus promises to those who believe in Him a new life of union with Him, as intimate as that of a vine and its branches (15:1-18). To attain this union one must keep His New Commandment (verses 9-18). He forewarns them about the contradictions they will suffer, and He encourages them by promising the Holy Spirit who will protect them and console them (verses 18-27). The action of the Paraclete or Consoler will lead them to fulfill the mission Jesus has entrusted to them (16:1-15). The fruit of the presence of the Holy Spirit will be fullness of joy (verses 16-33).

     

이 설교의 두 번째 부분 제15장 제16장에 포함되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신 쪽으로  믿는(believe in) 이들에게, 포도나무와 그 가지들 만큼이나 친밀한, 당신과의 결합(union)에 기인하는(of) 새 생명(a new life)을 약속하십니다(15,1-18). 바로 이 결합(union)을 획득하기 위하여 우리는 당신의 새 계명(His New Commandment)을 지켜야 합니다(15,9-18).(*) 당신께서는 그들이 장차 겪게 될 반대(contradictions)들에 대하여 미리  경고하시며, 그리고 당신께서는, 창차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리고 그들을 위로해 주실, 성령을  약속하심으로써 그들을 격려하십니다(15,18-27). 이 보호자 혹은 위로자의 활동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미 맡기셨던 임무를 구현하도록 그들을 장차 인도할 것입니다(16,1-15). 성령 현존(the presence of the Holy Spirit)의 열매는 장차 기쁨(joy)의 충만이 될 것입니다(16,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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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바로 이것이 예수님 쪽으로 믿는 자들과 예수님과의 "통공 교의"의  성경 근거에 포함되고, 따라서 그리스도교 전통적 "통공 교의"의 기초(foundation)에 포함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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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hird part (Chapter 17) gives Jesus' priestly prayer, in which He asks the Father to glorify Him through the cross (verses 1-5). He prays also for His disciples (verses 6-19) and for all those who through them will believe in Him, so that, staying in the world without being of the world, the love of God should be in them and they should bear witness to Christ being the envoy of the Father (verses 20-26).

 

세 번째 부분(제17장)예수님에 의한 사제의 기도를 제시하는데, 바로 이 기도에서 당신께서는  성부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당신에게 영광을 더하실(glorify) 것을 청원합니다(17,1-5) 당신께서는 또한 당신의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며 (17,6-19)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장차 당신 쪽으로 믿게 될(believe in) 자들 모두를 위하여 기도하시는데, 그리하여 그 결과(so that), [그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행위(the love of God)가, 이 세상에 속함 없이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그들 안에 반드시(should) 존재하게 하고자 하시며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성부의 사절(the envoy of the Father)이심에 대하여 그들이 반드시(should) 증언하게 하고자  하십니다 (17,20-26).

(이상, 발췌 끝)

 

1-3. 가톨릭 보편 교회 교도권에 메우 출실한 내용인 바로 위의 제1-2항에 발췌된 바는, 바로 이 최후의 만찬 강도(講道) (the discourse of  the Last Supper) 이후에 곧바로 뒤따르게 되는 예수닝의 구속(救贖)/속량(Redemption) 위업이, 예수님께서 또한 몸소 목숨까지 내놓으시면서 실천하신, 당신의 새 계명의 한 결과임을, 그리 어렵지 않게, 매우 잘 기술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어지는 항들에서는, 지금 말씀드린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요한 복음서 15,9-17을 정밀하게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래에 제시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작의 기술이, 요한 복음서의 전반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2. 요한 복음서 15,9-17 본문에 대한 정밀한 고잘

 

2-1.

2-1-1. 다음은,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15,9-17 전문입니다:

 

출처: https://maria.catholic.or.kr/bible/read/bible_read.asp?menu=bible&m=2&n=150&p=15 

(발췌 시작)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dilexit)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dilexi). 너희는 내 사랑(dilectione)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dilectione)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dilectione)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dilectionem)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상, 발췌 끝)

 

2-1-2. 그런데, 바로 위의 제2-1항에 발췌된 바를 가만히 읽어보면, "사랑한다"는 성부 하느님의 행위(act), "사랑한다"는 예수님의 행위(act), 그리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새 계명으로서 요구하는 바도 또한 "사랑한다"행위(act)임을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i) 바로 위의 제2-1항에 발췌된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15,9-17 전문과 (ii) 바로 아래에 있는 - 다음 - 사이에, 그 내용의 이해에 있어 수훨함 여부라는 관점에서, 어떠한 차이점이 있는지, 정밀하게 비교/검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 다음 - 은, 바로 위의 제2-1항에 발췌된 바에서, 한 개의 차용 번역 용어인, 명사 "사랑"를, 전후 문맥 안에서, 동사의 기능을 수행하는 동사의 명사형(verbal noun) 형태의 표현, 즉, '동작'(움직임, movement)을 나타내는 명사형 형태인, "사랑의 행위"로 교체하여 마련한 한 개의 단락입니다.

 

그리고 바로 위의 제2-1항에 발췌된 바에서 "내"[즉, 나의(my)} 및  "그분의"는, 왜냐하면 이어지는 명사 표기인 "사랑"의 주체/주어(Subject)이기 때문에, 이어지는 명사 표기 "사랑""동사의 명사형"임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어법상의 근거일 것입니다. 그리고 "계명"[번역 오류] 대신에, 복수임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계명"로 번역되어야 할 것입니다.

 

- 다음 -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사랑의 행위[즉, 나의 사랑을 받고 있음] 안에 머물러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의 행위[즉, 그분의 사랑을 받고 있음]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계명을 지키 장차(will)  사랑의 행위[즉, 나의 사랑을 받고 있음] 안에 머무를 것이다.(*) 1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12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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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왜냐하면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라는 바로 앞에 배치된 문장에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킴"과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름"이 논리적으로 등가이듯이(logically equivalent), 또한 마찬가지로, 곧바로 이어지는 문장에서 사용된 "if"(...)는, 정의(definition)의 문장에서 사용되는 "if", 즉, 논리적으로 등가인 "if and only if"에 해당함에 반드시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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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의 행위는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15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16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17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 이상, 다음 끝 -

 

2-1-3. 다음은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로 수록된, 순수한 우리말인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한 설명 전문인데, 그러나 이 단어가, 바로 위의 제2-1-2항에서 말씀드린, 소위 말하는 "동사의 명사형"(verbal noun)임을 전혀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출처: https://stdict.korean.go.kr/search/searchView.do?word_no=435977&searchKeywordTo=3 

(발췌 시작)

사랑1

 

「명사」

 

「1」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 어머니의 사랑.
  • 형제간의 사랑.
  • 친구 간의 사랑.
  • 사랑의 매.
  • 담임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 신의 은총과 사랑이 충만하길 빕니다.     
「2」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거나 즐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 나라 사랑 국어 사랑.
  • 음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
  • 그의 숲에 대한 사랑은 남다르다.

「3」 남을 이해하고 돕는 마음. 또는 그런 일.

  • 사랑을 베풀다.
  • 불우한 이웃에게 사랑의 손길을 보냅시다.
  • 그 수녀님은 온 인류에게 사랑과 봉사의 정신을 일깨워 주셨다.
  • 그는 사랑과 용서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한 것으로 유명하다.
「4」 남녀 간에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런 일.                                          
  • 사랑에 눈멀다.
  • 사랑에 빠지다.
  • 사랑을 고백하다.
  • 사랑이 깨지다.
  • 두 남녀가 공원 벤치에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고 있다.
  • 황순원의 ‘소나기’는 소년과 소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이다.
「5」 성적인 매력에 이끌리는 마음. 또는 그런 일.                                          
  • 사랑을 불태우다.
  • 하룻밤 사랑을 나누다.
  • 사랑의 행위.

「6」 열렬히 좋아하는 대상.

  • 그녀는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다.
  • 나의 조국, 나의 사랑이여!
  • 두웅둥둥 내 사랑, 어허 둥둥 내 사랑. 저리 가거라 뒤태를 보자, 이만큼 오너라 앞태를 보자.≪한무숙, 돌≫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2-1-3: 바로 위에 발췌된 "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로는, 위의 제2-1-1항에 발췌된, 우리말로의 번역문인,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15,9-17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음에 또한 반드시 주목하라. 왜냐하면, 다들 잘 알고 있듯이,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15,9-17은 우리나라 문화권 안에서, 더 나아가, 한문 문화권 안에서 최초로/처음으로 기술된 문장이 전혀 아니고, 우리말로의 번역문이기 때문이다.

 

2-1-4. 바로 위의 제2-1-3항에서 보았듯이,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로 수록된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한 설명에는 이 단어가, 바로 위의 제2-1-2항에서 말씀드린, 소위 말하는 "동사의 명사형"(verbal noun)임을 전혀 설명하지 않는/못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즉, 우리나라 조선의 국어(國語), 즉, 나라의 말이 한문이었던 시절에, 즉, 1910년경까지, 한자 낱글자 "愛"가, 한문 문장의 전후 문맥 안에서, "사랑"이라는 명사 혹은 "사랑하다"라는 동사로 사용되었으나, 그러나,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왜냐하면, 우리나라 조선의 임금 세종 대왕에 의한 1446년 "훈민정음"(訓民正音)의 반포 이후의 어느 시점에 우리나라 조선 안에 등장한, 한자 낱글자들의 의미를 한글로, 즉, 언문(諺文)으로 병기한 "언문 천자문"에서 113번째 한자 낱글자 "愛"의 의미와 발음을 한글로 표기하면서, "사랑할 愛(애)"라는 설명은 기술하지 않고, 다만 [요즈음 표기로] "사랑 애"라는 우리말 설명만이 제시되어 있거나[통상적인 "언문 천자문"의 경우], 혹은 여기에다 주석의 형식으로, "사랑 애憐이니라"  "아낄 애吝이니라"라는 설명[들]이 추가되어 있기[주: "주해천자문"의 경우] 때문에,(*) 그 결과, 결국에, "표준국어대사전"에 표제어로 수록된 "사랑"이라는 명사에 대한 설명에 이 단어가, 바로 위의 제2-1-2항에서 말씀드린, 소위 말하는 "동사의 명사형"(verbal noun)임을 전혀 설명하지 않고 있다/못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사랑하다"라는 동사가 한 개의 표제어로 별도로 수록되어 있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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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들에 첩속하면, 이들에 대하여 확인할 수 있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6006 [천자문 안내]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6792 [주해천자문 안내]

 

출처: 주흥사(양) 홍태운 廣通坊 1804 비치일 : 20071115 [국립중앙도서관 제공의 1804년판 주해천자문 본문]

(발췌 시작)

애_in_1804_주해천자문_제10쪽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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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1: 바로 위에서 필자가 지금 지적한 바를, 한글전용세대에 포함되는 요즈음의 한국인들이, (i) 연상할(associate) 수 있겠는지요, 혹은 (ii) 상상할(imagine) 수 있겠는지요???

 

질문 1에 대한 답변: 중국, 대만과는 달리, 이미 외국어가 되어버린 한문으로 기록된 문헌들을 읽고 이해하는 교육을 받지 못한 요즈음의 거의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판단의 근거/기준/잣대로서 사용할 지식/Data Base의 부족/결핌으로 인하여, 상상할(imagine)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전혀 연상할(associate)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상상(imagination)이 되는 것들 중에서만 오로지 연상(association)이 되는 것을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2-2.

2-2-1. 다음은, NAB (New American Bible) 요한 복음서 15,9-17 전문입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__PXN.HTM 

(발췌 시작)

9 As the Father loves me, so I also love you. Remain in my love. 10 If you keep my commandments, you will remain in my love, just as I have kept my Father's commandments and remain in his love. 11 "I have told you this so that my joy may be in you and your joy may be complete.

 

12 This is my commandment: love one another as I love you. 13 No one has greater love than this, to lay down one's life for one's friends. 14 You are my friends if you do what I command you. 15 I no longer call you slaves, because a slave does not know what his master is doing. I have called you friends, because I have told you everything I have heard from my Father. 16 It was not you who chose me, but I who chose you and appointed you to go and bear fruit that will remain, so that whatever you ask the Father in my name he may give you. 17 This I command you: love one another.

(이상, 발췌 끝)

 

2-2-2. 다음은, RSVCE (Revised Stanard Version Catholic Edition) 요한 복음서 15,9-17 전문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b_east_6.htm 

(발췌 시작)

[9] "As the Father has loved Me, so have I loved you; abide in My love. [10] If you keep My commandments, you will abide in My love, just as I have kept My Father's commandments and abide in His love. [11] These things I have spoken to you, that My joy may be in you, and that your joy may be full.

 

[12] "This is My commandment, that you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13] Greater love has no man than this, that a man lay down his life for his friends. [14] You are My friends if you do what I command you. [15] No longer do I call you servants, for the servant does not know what his master is doing; but I have called you friends, for all that I have heard from My Father I have made known to you. [16] You did not choose Me, but I chose you and appointed you that you should go and bear fruit and that your fruit should abide; so that whatever you ask the Father in My name, He may give it to you. [17] This I command you, to love one another."
(이상, 발췌 끝) 

 

2-2-3. 그리고 다음의 파란색칠을 한 굵게 쓴 글자들을 클릭하면, 신약 성경 용어로서, "the love of God"에서 사용된 명사 "love"동사의 명사형(verbal noun)이라는 설명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verbal noun" "love of"  <----- 여기를 클릭하여 확인하도록 하라

"verbal noun" "love of" "loving of"  <----- 여기를 클릭하여 확인하도록 하라

 

그러니까, "the love of God"에서 사용된  "love"는, 동사의 명사형(verbal noun)의 한 종류인, 사랑의 행위를 나타내는 동명사(gerund) "loving"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시자 주 2-2-3: 그런데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성경 용어로서, "the love of God"에서 사용된 명사 "love"동사의 명사형(verbal noun)이라는 설명의 근거/출처가 어떠한 문헌인지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 데에/못하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2-2-4.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성경 용어로서, "the love of God"에서 사용된 명사 "love"동사의 명사형(verbal noun)이라는 설명의 근거/출처에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5년)"신학 대전"이 포함됨을, 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47.htm <----- 필독 권고 

(발췌 시작)

4.

질문 4: "하느님에 대한 사랑(the love of God)"이라는 차용(借用) 번역 표현과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the love of our neighbor)"이라는 차용(借用) 번역 표현에서 말하는 차용(借用) 번역 용어인, "사랑(love)"에 대응하는 교회 라틴어(Church Latin)의 단어는 무엇인지요? amor(love of concupiscence), amor(love of friendship), dllectio(dilection), 혹은 caritas(charity, 애덕) 이들 넷 중의 어느 것인지요?

 

질문 4에 대한 답변 시작:

 

4-1. 바로 위의 제3항에서 상당히 자세하게 말씀드린, dllectio[dilection, 편애(偏愛)/애모(愛慕)/사전 선호(選好)]입니다. 즉,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이라는 관계 안에 있는 사랑(pious love, love of piety)"입니다.

 

독자들께서는 다음을 클릭하여 라틴어 본문과 영어본 본문에 대하여 직접 정밀하게 비교/검토하시기 바랍니다:

"neighbor" "dilection" "dilectio" site:logicmuseum.com/authors/aquinas/summa <-- 필히 직접 확인 요망

 

바로 위의 주소를 클릭한 후에, 직접 확인을 쉽게 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i) 바로 위의 주소를 클릭한다.

(ii) 가지게 되는 새 화면에서, 예를 들어, 첫 번째 검색 결과 바로 아래에 있는 주소의 오른쪽 끝에 있는 "역삼각형" 메뉴을 클릭한 후에 "저장된 페이지"를 클릭한다.

(iii) 가지게 되는 새 화면에서, 자판기에서 "Shift + F"를 클릭한 후, "love" 라는 단어로 이 화면을 검색한다.

(iv) 라틴어 원문과 영어 번역문을 정밀하게 비교/검토한다.

 

4-2. 그리고 사랑(love, amor)을, amor(love of concupiscence), amicitia(love of friendship), dllectio(dilection), 혹은 caritas(charity, 애덕), 이렇게 넷으로 구분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a IIae, q26에 주어진 설명 전문(우리말 번역문 포함)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374.htm [우리말 번역문 포함] <---- 또한 필독 권고

 

4-3. 바로 위의 주소에 있는 글에서 우리는, 특히, 이들 넷 중에서 amor(love of concupiscence)delectio(dilection)사랑의 행위(act)를 나타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어로 "the love of God"로 번역되고 "the love of our neighbor"로 번역되는 표현들은, 왜냐하면 여기서 "love(사랑)""dilectio(dilection)"이기 때문에, 우리말로 각각 "하느님에 대한 사랑 행위(dilectio)" 그리고 "우리의 이웃에 대한 사랑 행위(dilectio)"로 직역 번역(literal translation)이 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랑 행위(act)"라는 표현에 있어서의 "사랑"은 이 행위와 동일한 바를 말하는 것이 아니므로 때로는, 명확한 구분을 위하여, "원초적 사랑(primal love/primordial love)"라고 불린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원초적 사랑(primal love/primordial love)"에 대하여서는, 이 글에 이어지는 글인,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제목: 원초적 사랑과 그 결과들]을 또한 꼭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78.htm <----- 필독 권고

 

그리고 여기서의 "dilectio(dilection, 사랑 행위)"은 위의 제3-2항에서의 설명과 위의 제3-4-3항에 의하여, 바로 "애덕(charrity)의 실천"이라는 행위(act)를 말함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이상, 질문 4에 대한 답변 끝)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2-2-4: (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바로 위의 제2-2-4항에서 말씀드린 바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된 요한 복음서 성경 구철에 대한 졸글/논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205.htm

 

(2) 그리고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바로 위의 제2-2-4항에서 말씀드린 바에 대하여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자 하는 연구자을에게 유익한 자료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추가 자료 1: https://books.google.co.kr/books?id=6CLUCwAAQBAJ&pg=PA116&lpg=PA116&dq=%22love%22+%22act+of+charity%22+%22dilectio%22&source=bl&ots=HDJChNyvvo&sig=ACfU3U0nW46PWtAH5kunx7PsBLdC3Dpgyg&hl=ko&sa=X&ved=2ahUKEwi3uMiK5b7wAhVba94KHeI2BYAQ6AEwCHoECAYQAw#v=onepage&q=%22love%22%20%22act%20of%20charity%22%20%22dilectio%22&f=false 

추가 자료 2: https://www3.nd.edu/~afreddos/courses/405/charity.htm 

추가 자료 3: https://www3.nd.edu/~afreddos/courses/405/order.htm 

추가 자료 4: https://isidore.co/aquinas/summa/SS/SS027.html 

추가 자료 5: https://books.google.co.kr/books?id=UQIXFEe5l5MC&pg=PR23&lpg=PR23&dq=%22love%22+%22act+of+charity%22+%22dilectio%22&source=bl&ots=y0rpes0tJU&sig=ACfU3U1JkcRN7q_ATwAZvXh3QrkUpZ_MxA&hl=ko&sa=X&ved=2ahUKEwi3uMiK5b7wAhVba94KHeI2BYAQ6AEwB3oECAUQAw#v=onepage&q=%22love%22%20%22act%20of%20charity%22%20%22dilectio%22&f=false 

추가 자료 6: "love" "act of charity" "dilectione" site:isidore.co

추가 자료 7: "love" "act of charity" "dilectione" site:logicmuseum.com 

추가 자료 8: "love" "act of charity" "dilectio" site:logicmuseum.com 

(이상, 게시자 주 2-2-4 끝)

 

2-3. (질문 2) 그렇다면, 성경 용어로서, "the love of God""the love of our neighbor"에서 사용된 명사 "love"동사의 명사형(verbal noun)이라는 설명의 근거/출처로서, 가톨릭 보편 교회 교도권이 수용한, 13세기에 초간된,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5년)"신학 대전"이 그 첫 번째/최초 문헌인지요?

 

질문 2에 대한 답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며, 이번 항에서는 이에 대하여 자세하게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2-3-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1979년에 초간된 "새 대중 라틴말 성경"(Nova Vulgata), 요한 복음서 15,9-17) 전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bible/nova_vulgata/documents/nova-vulgata_nt_evang-ioannem_lt.html#15

(발췌 시작)

9 Sicut dilexit me Pater, et ego dilexi vos; manete in dilectione mea.
10 Si praecepta mea servaveritis, manebitis in dilectione mea, sicut ego Patris mei praecepta servavi et maneo in eius dilectione.
11 Haec locutus sum vobis, ut gaudium meum in vobis sit, et gaudium vestrum impleatur.
12 Hoc est praeceptum meum, ut diligatis invicem, sicut dilexi vos;
13 maiorem hac dilectionem nemo habet, ut animam suam quis ponat pro amicis suis.
14 Vos amici mei estis, si feceritis, quae ego praecipio vobis.
15 Iam non dico vos servos, quia servus nescit quid facit dominus eius; vos autem dixi amicos, quia omnia, quae audivi a Patre meo, nota feci vobis.
16 Non vos me elegistis, sed ego elegi vos et posui vos, ut vos eatis et fructum afferatis, et fructus vester maneat, ut quodcumque petieritis Patrem in nomine meo, det vobis.
17 Haec mando vobis, ut diligatis invicem.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2-3-1: 바로 위에 제2-3-1항에 발췌된 바 및 바로 아래의 제2-3-2항에 발췌된 바에서, "caritas"의 파생어인 명사가 사용되지 않고, 동사 "diligo"의 명사형"directio"의 격변화 파생어 "dilectione"가 사용되었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2-3-2.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성 다마소 1세 교황님(305-384년)의 명을 받은 성 예로니모(St. Jerome, 342/347-420년)에 의하여 라틴어로 번역된, 가톨릭 교회의 공인 라틴어본 성경인, "대중 라틴말 성경"(Clementine Vulgate), 요한 복음서 15,9-17) 전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출처: https://www.newadvent.org/bible/joh015.htm 

(발췌 시작)

9 Sicut dilexit me Pater, et ego dilexi vos. Manete in dilectione mea.

10 Si præcepta mea servaveritis, manebitis in dilectione mea, sicut et ego Patris mei præcepta servavi, et maneo in ejus dilectione.

11 Hæc locutus sum vobis: ut gaudium meum in vobis sit, et gaudium vestrum impleatur. 

12 Hoc est præceptum meum, ut diligatis invicem, sicut dilexi vos. 

13 Majorem hac dilectionem nemo habet, ut animam suam ponat qui pro amicis suis. 

14 Vos amici mei estis, si feceritis quæ ego præcipio vobis. 

15 Jam non dicam vos servos: quia servus nescit quid faciat dominus ejus. Vos autem dixi amicos: quia omnia quæcumque audivi a Patre meo, nota feci vobis.

(이상, 발췌 끝) 

 

2-3-3.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라틴어 명사 "dilectio"동사 "diligo"의 명사형(verbal noun)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 https://www.wordsense.eu/diligo/#Latin 

(발췌 시작)

diligo (Latin)

 

Origin & History

From dis- + legō ("choose; take").

 

Verb

diligo

  1. I esteem, love, have regard for.
       Jerome, Vulgate Exodus.
    "et faciens misericordiam in millia his qui diligunt me, et custodiunt praecepta mea."
    and shewing mercy unto thousands of them that love me, and keep my commandments.

Derived Words Phrases

dīlēctiō

  • dīlēctor
  • dīlēctus
  • dīligēns
  • dīligenter
  • dīligentia
  • dīligibilis
  • praedīligō
  •  

    Related Words & Phrases

    allegō

  • colligō
  • ēligō
  • intellegō
  • legō
  • neglegō
  • perlegō
  • praelegō
  • relegō
  • sēligō
  • sublegō
  • (이상, 발췌 끝)

     

    2-3-4.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tio"가, 명사인 파생어를 만들 때에 행위(act) 등의 의미를 추가하는, 라틴어 접미사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 https://www.wordsense.eu/-tio/ 

    (발췌 시작)

    -tio (Latin)

     

    Alternative Form

    -siō‎, in primarily third conjugation verbs with stems ending in -t-, -d-, -rg-, -ll-, or -rr-.

     

    Origin and History

    From Proto-Italic *-tiō‎, an n-stem extension of Proto-Indo-European *-tis‎. See also Proto-Indo-European *-h₃onh₂-‎

     

    Pronunciation

    (Classical) IPA: /ˈ-ti.oː/

     

    Suffix

       -tion, -ation, -ing; used to form a noun relating to some action or the result of an action.
       dictātiō ("a dictating, dictation"), from dictātum, supine of dictō ("I dictate")
       quadripartītiō ("a division into four parts"), from quadripartītum, supine of quadripartiō ("I divide in four parts")

     

    Usage

    The suffix is occasionally added to other parts of speech, or appears in situations where no related verb apparently exists.

       gradātiō ("making of a staircase or steps"), from gradus ("step, pace").

    (이상, 발췌 끝)

     

    2-3-5. 다른 한편으로, 다음의 사실에 또한 주목합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47.htm <----- 필독 권고 

    (발췌 시작)

    3.

    질문 3: 그리스어 명사 "agape" 는, 동일한 어원을 가지는, 그 동사형 "agapao" 를 가지고 있는데, 이 그리스어 명사 "agape" 에 대응하는 라틴어 명사 "caritas"의, 동일한 어원을 가지는, 동사형은 무엇인지요?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에 라틴어 명사 "caritas"의, 동일한 어원을 가지는, 동사형은 없는 것 같은데, 이것이 사실인지요? 그리고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성 예로니모(St. Jerome)가, 성 다마소 1세 교황님의 명에 의하여, 대중 라틴말 성경(Vulgate)를 마련할 때에 어떠한 라틴어 동사를 그리스어 동사 "agapao" 에 대응하는 라틴어 동사로 선택하여 사용하였는지요?

     

    질문 3에 대한 답변 시작:

     

    3-1.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그동안 경험한 바에 비추어 보더라도, 라틴어 명사 "caritas" 의, 동일한 어원을 가지는, 동사형은 듣거나 혹은 읽은 적이 전혀 없습니다.

     

    3-2.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A Flourishing Practice?" 라는 제목의 저서 제96쪽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출처: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발췌 시작)

    But a curious feature of the translation of agape into Latin might give us a final clue as to how we might set about doing that. in Greek agape is a noun but it has a cognate verb - agapao. Latin however does not have a verb form of caritas - you either have to say some one 'has charity' or you use a different verb - diligo, diligere, dilexi, dilectum. The main meaning of this verb seems to be elect, to choose out, and by extension it means to value, to prize and to love. It has a broad range or meanings including care about, like, enjoy, hold care, esteem, value, have special regard for.31

     

    그러나 라틴어로 [그리스어 명사] agape 의 번역에 있어서의 한 개의 기이한 특징은, 바로 그것을 행함에 어떻게 우리가 착수하여야 하는지에 관하여, 우리에게 어떤 최종적 단서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어에 있어 아가페(agape)는 한 개의 명사이며 그런데(but) 이 단어는 한 개의 동일한 어원의 동사(a cognate verb) 아가파오(agapao)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라틴어는 까리따스(caritas)의 어떤 동사형(a verb fom)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 독자들께서 어떤 이가 '애덕(charity)를 가지고 있다(has charity)' 라고 말하여야 하거나 혹은 독자들께서 한 개의 다른 동사, diligo, diligere, dilexi, dilectum 를 사용하여야 하는, 이들 둘 중의 하나입니다. 바로 이 동사의 주된 의미는 택하다(elect), 선택하다(choose out) 인 것 같으며, 그리고 확장에 의하여(by extension), 이 단어는 높이 평가하다/존중하다(value), 상을 주다(prize) 그리고 사랑하다(love) 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에 마음쓰다(care about), 좋아하다(like), 향유하다(enjoy), 돌봄을 유지하다(hold care), 존중하다/존경하다(esteem), 높이 평가하다/존중하다(value), ... 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지다(have special regard for)를 포함하여, 어떤 폭넓은 영역 혹은 의미들을 가집니다. (diligere, 즉, to value or esteem highly[높게 존중하거나 혹은 존경하다])

     

    -----

    31. www.latinwordlist.com/latin-words/diligo-8063308.htm [accessed 6, May 2014].

    -----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3-3.

    3-3-1. 바로 위의 제3-1항제3-2항에서 말씀드린 바는, 예를 들어,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I, IIae, q27, a2, sc 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출처: http://www.logicmuseum.com/authors/aquinas/summa/Summa-IIb-27-33.htm#q27a2sc

    (발췌 시작)

    Ergo benevolentia non est idem quod dilectio, quae est caritatis actus.

     

    Therefore goodwill is not the same as to love considered as an act of charity.

     

    그러므로 선의(goodwill)는 애덕의 한 행위로서 간주되는 "dilection"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3-3-2. 다른 한편으로, 다음은 프랑스어 사전에 주어진 "dilection"에 대한 설명입니다:

     

    출처 1: http://www.wordreference.com/fren/dilection

    출처 2: "dilection" "amour pieux"

    (출처 1에서 발췌 시작)

    dilection

     

    théologie(신학)                      dilection

    (amour pieux) (theology)

    [pious love,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이라는 관계 안에 있는 사랑(amor) (신학)]

    (이삳,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3-3-3. 그러므로, 제3-3-1항제3-3-2항으로부터 우리는, 선의(goodwill)가, 애덕의 한 행위(an act of charity, caritatis actus)로서 간주되는,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에 기인하는 사랑(to love, dilectio)과 동일하지 않음을 확인 하였습니다.

     

    3-4. 

    3-4-1. 다른 한편으로, amor(amicitia, friendship)은,

     

    (i) 다음의 글의 제2-1항에 발췌된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 Ia, IIae, q26, a4, co에서 그 출처가 제시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가 말하는 우의, 즉, "당사자인 양자들 사이의 상호호혜적 사랑", 즉, 2자들 사이에서 직접 주고 받는 상호호혜적 사랑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36.htm <----- 필독 권고

     

    (ii) 혹은, 예를 들어, 어머니가 자신의 유익을 기대하지 않고, 오로지 상대방의 선의 회복/증진, 즉, 유익만을 바라는(wish) 사랑인,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이타(利他)적(altruistic)/인격주의적(personalistic) 사랑(amor)처럼, 2자 간의 우의라는 관계 안에 있는 사랑에서, 이 관계의 한 말단인 자신의 유익을 기대하지 않고, 또다른 한 말단인 상대방의 선의 회복, 즉, 유익을 바라는(wish) 이타(利他)(altruistic)/인격주의(personalistic)적 사랑(amor),

     

    이렇게 둘로 구분뒬 것입니다.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 이 두 번째 사랑, 즉, "2자들 사이에 있는 인격주의적(personalistic) 사랑(amor)"은, 2자들 사이에서 "감각 인상(sense impressions)에 반응하는 순서 안에 있는 어떤 사욕편정(私慾偏情, concupiscence, 즉, 私慾)에 의하여 동기가 부여되는 욕구(a concupiscible appetite)"가 배제된, 따라서 오로지 주체(subject)의 의지(will) 안에만 있는, 상대방의 선의 회복/증진, 즉, 유익을 바라는(wish), 따라서 주는 자와 받는 자들 둘 사이의 직접적 상호호혜를 전제로 하지 않고 상대방의 선의 회복을 주체(subject)의 의지(will)가 사전 선택적으로 욕망하는(*1) 2자들 사이의 인격주의적(personalistic)적(*2) 우의(friendship)라는 관계 안에 있는 사랑(amor)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도 또한 자연적/본성적 사랑입니다.

     

    -----

    (*1) 게시자 주: 바로 이 욕망함에는, 상대방에 있어 선의 회복/증진을 위하여(즉, 그 원인이 "하느님의 의지"인 "원초적 사랑"을, 하느님을 위하여, 충족시키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주체(subject)의 의지가 자신에 있어 선의 회복/증진을 위하여(즉, 그 원인이 "하느님의 의지"인 "원초적 사랑"을, 하느님을 위하여, 충족시키기 위하어) 욕망하여야 함을 포함하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2) 게시자 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St. John Paul, Pope)께서 설명하시는 "인격주의(personalism)"에 대한 글은 다음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31_personalism.htm <----- 필독 권고

    -----

     

    3-4-2.

    3-4-2-1. 다른 한편으로, "한 말단(a terminal)이 하느님이신, 적어도 3자들 사이의 dilection"이라는 사랑은, 최소한도로 3자들 사이에서 "감각 인상(sense impressions)에 반응하는 순서 안에 있는 어떤 사욕편정(私慾偏情, concupiscence, 즉, 私慾)에 의하여 동기가 부여되는 욕구(a concupiscible appetite)"가 배제된, 따라서 오로지 주체(subject)의 의지(will) 안에만 있는, 상대방의 선의 회복, 즉, 유익만을 바라는, 따라서 "한 말단(a terminal)이 하느님이신, 적어도 3자들 사이"에서, 주는 자와 받는 자들 둘 사이의 직접적 상호호혜를 전제로 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의도하시는 바 대로의 상대방의 선(good)의 회복을 위하여 주체(subject)의 의지(will)가 사전 선택적으로 욕망하는(*1) 인격주의적(personalistic) 우의(friendship)라는 관계 안에 있는 사랑(amor)(*2)인데, 여기에다 추가적으로, 이 사랑의 대상들이 한 명이 아니고 적어도 두 명 이상인 여건 아래에서, 바로 이 인격주의적(personalistic) 사랑(amor)에 있어서의 차이/불평등이 또한 주체(subject)의 의지(will)의 사전 선택에 의하여 존재하고 있는, 바로 그러한 사랑, 즉, 하느님이 한 말단(a terminal)이신 적어도 3자들 사이의, 따라서 주체(subject)의 심장(heart) 안쪽에 있는, 불평등한 인격주의적(personalistic) 우의(friendship)라는 관계 안에 있는 사랑(amor)을 말하는데, 이 사랑을, 통상적으로, dilection[편애(偏愛)/애모(愛慕)/사전 선호(選好)]라는 단어로 표현한다는 생각입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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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게시자 주: 바로 이 욕망함에는, 상대방에 있어 선의 회복/증진을 위하여(즉, 그 원인이 "하느님의 의지"인 "원초적 사랑"을, 하느님을 위하여, 충족시키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주체(subject)의 의지가 자신에 있어 선의 회복/증진을 위하여(즉, 그 원인이 "하느님의 의지"인 "원초적 사랑"을, 하느님을 위하여, 충족시키기 위하어) 욕망하여야 함을 포함하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2) 게시자 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St. John Paul, Pope)께서 설명하시는 "인격주의(personalism)"에 대한 글은 다음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31_personalism.htm <----- 필독 권고

     

    (*3) 게시자 주:  

    (1) 예를 들어,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a, q20, a3에서 발췌 되고 있는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가 말한 바는 다음과 같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70.htm <----- 전체 본문 필독 권고

    (발췌 시작)

    On the contrary, Augustine says (Tract. in Joan. cx): "God loves(diligit) all things that He has made, and amongst them rational creatures more, and of these especially those who are members of His only-begotten Son Himself."

     

    이와는 달리, 아우구스티노(Augustine)(Tract. in Joan. cx)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은 당신께서 이미 만드셨던 모든 사물들을 사랑하시고(loves, diligit)(diligit, 즉, to value or esteem highly[높게 존중하거나 혹은 존경하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이성적 피조물들을 더 사랑하시며(loves, diligit), 그리고 이들 중에서 특별히(especially) 당신의 유일한 독생자 그분 자신의 구성원/지체인 자들을 더 사랑하십니다(loves, diligit). 

    (이상, 발췌 끝)

     

    (2) 더 나아가, 바로 위의 출처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a, q20의 본문 전체에 걸쳐,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라틴어 명사 dilectio의 동사형 파생어들의 사용에 대한 구체적인 용례 분석은 확실하게 지금 말씀드린 바를 뒷받침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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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2-2. 그리고, 왜냐 하면,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가 정의하는 우의(friendship)[즉, 위의 제3-4-1항에서 "당상자인 양자들 사이의 상호호혜적 우의"라고 표현된 우의]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의지(will)에 의한 사전 선택 "선의(goodwill)"에 포함되기 때문에, dilection[편애(偏愛)/애모(愛慕)/사전 선호(選好)]이라고 불리는, "한 말단(a terminal)이 하느님이신, 적어도 3자들 사이"에서, 주는 자와 받는 자들 둘 사이의 직접적 상호호혜를 전제로 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의도하시는 바 대로의 상대방의 선(good)의 회복을 위하여 주체(subject)의 의지(will)가 사전 선택적으로 욕망하는(*1) 인격주의적(personalistic) 우의(friendship)라는 관계 안에 있는 사랑(amor)(*2)에 있어 또한 추가적으로 주체(subject)의 의지(will)의 사전 선택에 의한, 따라서 주체(subject)의 심장(heart) 안쪽에 있는, 불평등한 인격주의적(personalistic) 우의(friendship)라는 관계 안에 있는 사랑은, 위의 제3-3-2항에 주어진 설명에 의하여,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이라는 관계 안에 있는 사랑(pious love, love of piety)"과 동일한 사랑임에 주목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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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게시자 주: 바로 이 욕망함에는, 상대방에 있어 선의 회복/증진을 위하여(즉, 그 원인이 "하느님의 의지"인 "원초적 사랑"을, 하느님을 위하여, 충족시키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주체(subject)의 의지가 자신에 있어 선의 회복/증진을 위하여(즉, 그 원인이 "하느님의 의지"인 "원초적 사랑"을, 하느님을 위하여, 충족시키기 위하어) 욕망하여야 함을 포함하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2) 게시자 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St. John Paul, Pope)께서 설명하시는 "인격주의(personalism)"에 대한 글은 다음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31_personalism.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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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리 말하여,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한 사랑(pious love, love of piety)"이란, 위의 제3-3-2항에 안내된 프랑스어 사전들의 정의(definition)에 의하여, "한 말단(a terminal)이 하느님이신, 적어도 3자들 사이"에서, 주는 자와 받는 자들 둘 사이의 상호호혜를 전제로 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께서 의도하시는 바 대로의 상대방의 선(good)의 회복만을 위하여 주체(subject)의 의지(will)가 사전 선택적으로 욕망하는 인격주의적(personalistic) 우의(friendship)라는 관계 안에 있는 사랑(amor)에 있어 또한 추가적으로 주체(subject)의 의지(will)의 사전 선택에 의한, 따라서 주체(subject)의 심장(heart) 안쪽에 있는, 불평등한 사랑은, 위의 제3-3-2항에서 그러하다고 설명하고 있듯이,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이라는 관계 안에 있는 사랑(pious love, love of piety)"을 말합니다. 

     

    3-4-2-3. 그리고 이 사랑은 자연적/본성적 윤리덕(moral virtue)인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이라는 덕(the virtue of piety)의 심장(heart) 바깥쪽으로 실천 행위(act)에 의하여 종(種)적으로(specially) 구현되는 사랑을 말합니다. 따라서, the love of piety[즉, dilectio(dilection)]the virtue of piety[즉, pietas(piety)]는 동일한 개념을 나타내는 표현들이 아닙니다.

     

    3-4-2-4. 지금 말씀드린 바와 관련하여, 특히, "윤리덕인'piety(pietas)'가 초자연덕인 '애덕(charity)'의 선언(protestation)"이라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신학 대전, IIa, IIae, q101, a3  Reply to Objection 1에 주어진 다음의 설명에 또한 주목합니다:

     

    출처: http://www.newadvent.org/summa/3101.htm#article3

    (발췌 시작)

    On the contrary, It is accounted by Tully (De Invent. Rhet. ii) as a part of justice.

     

    이와는 달리,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piety)"은 Tully (De Invent. Rhet. ii)에 의하여 정의(justice)의 한 부분으로서 설명됩니다.

     

    I answer that, A special virtue is one that regards an object under a special aspect. Since, then, the nature of justice consists in rendering another person his due, wherever there is a special aspect of something due to a person, there is a special virtue. Now a thing is indebted in a special way to that which is its connatural principle of being and government. And piety regards this principle, inasmuch as it pays duty and homage to our parents and country, and to those who are related thereto. Therefore piety is a special virtue.

     

    저는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한 개의 종(種)적 덕(a special virtue)은 한 개의 종(種)적 양상(a special aspect) 아래에서 한 개의 대상에 관련한 바로 그 덕을 말합니다. 게다가(then), 정의(justice)의 본성이 다른 인격에게 그자의 몫을 주는 것을 주된 부분으로 가지고 있으므로, 한 인격(a person)에 기인하는 그 무엇(something)이라는 어떤 종(種)적 양상이 있을 때에는 언제든지 한 개의 종(種)적 덕(a special virtue)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사물은 있음(being)과 통치(government)에 있어서의 태생적/타고난 원리(connatural principle)인 바로 그것 쪽으로 어떤 종(種)적 방식으로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piety)"은, 이 덕이 우리의 부모들과 나라에 대하여, 그리고 거기에 관련된 자들에 대하여, 의무(duty)와 경의/존경(homage)를 표하는 한, 바로 이러한 원리에 관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piety)"은 한 개의 종(種)적 덕(a special virtue)입니다.

     

    Reply to Objection 1. Just as religion is a protestation of faith, hope and charity, whereby man is primarily directed to God, so again piety is a protestation of the charity we bear towards our parents and country.

     

    반대 1에 대한 답변. 경신덕(religion)이, 바로 그것에 의하여 사람이 하느님 쪽으로 첫째로(primarily) 향하게 되는, 신덕(faith), 망덕(hope), 그리고 애덕(charity)에 대한 한 개의 선언(a protestation)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또한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piety)"[이라는 윤리덕]은, 우리의 부모들과 나라 쪽으로 향하여 우리가 분담하는(bear) 애덕(charity)에 대한 한 개의 선언(a protestation)입니다.(*)

     

    -----

    (*) 번역자 주:

    (1) 바로 이 설명에 의하여, "경신덕(religion)"이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piety)"이라는 윤리덕에 포함됨을 우리는 또한 알 수 있다.

     

    (2) 여기서 말하는 "우리의 부모들과 나라 쪽으로 향하여 우리가 분담하는(bear) 애덕(charity)"이라는 자연적/본성적 사랑이, 바로 위의 제3-4-2-1항에서 말하는, 자연적/본성적 사랑인 dilection[편애(偏愛)/애모(愛慕)/사전 선호(選好)]와 동일한 사랑임에 반드시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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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3-4-3. 또 다른 한편으로, "한 말단(a terminal)이 하느님이신, 적어도 3자들 사이"에서, 주는 자와 받는 자들 둘 사이의 상호호혜를 전제로 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의도하시는 바 대로의 상대방의 선(good)의 회복을 위하여 주체(subject)의 의지(will)가 사전 선택적으로 욕망하는(*1) 인격주의적(personalistic) 우의(friendship)라는 관계 안에 있는 사랑(amor)(*2)에 있어 또한 추가적으로 주체(subject)의 의지(will)의 사전 선택에 의한, 따라서 주체(subject)의 심장(heart) 안쪽에 있는, 불평등한 사랑인, dilection[편애(偏愛)/애모(愛慕)/사전 선호(選好)], 즉,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이라는 관계 안에 있는 사랑(pious love, love of piety)"의 완미(perfection)(*3) 바로 caritas(charity, 애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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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게시자 주: 바로 이 욕망함에는, 상대방에 있어 선의 회복/증진을 위하여(즉, 그 원인이 "하느님의 의지"인 "원초적 사랑"을, 하느님을 위하여, 충족시키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주체(subject)의 의지가 자신에 있어 선의 회복/증진을 위하여(즉, 그 원인이 "하느님의 의지"인 "원초적 사랑"을, 하느님을 위하여, 충족시키기 위하어) 욕망하여야 함을 포함하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2) 게시자 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St. John Paul, Pope)께서 설명하시는 "인격주의(personalism)"에 대한 글은 다음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31_personalism.htm <----- 필독 권고

     

    [내용 추가 일자: 2016년 3월 2일]

    (*3) 게시자 주: 그리스도교 신학적으로, "완전한(complete)"와 "완미한(perfect, 즉, 완전하고 결함이 없는)"의 커다란 차이점에 대한 글은 다음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94.htm <----- 필독 권고

    [이상,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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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리 말하여, 하느님께서 우리들 쪽으로 하고 계시는, 따라서 초자연적인(supernatural)"한 말단(a terminal)이 하느님이신, 적어도 3자들 사이"에서, 주는 자와 받는 자들 둘 사이의 상호호혜를 전제로 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의도하시는 바 대로의 상대방의 선(good)의 회복을 위하여 주체(subject)의 의지(will)가 사전 선택적으로 욕망하는 인격주의적(personalistic) 우의(friendship)라는 관계 안에 있는 사랑(amor)에 있어 또한 추가적으로 주체(subject)의 의지(will)의 사전 선택에 의한, 따라서 주체(subject)의 심장(heart) 안쪽에 있는, 불평등한 사랑, 즉, dilection[편애(偏愛)/애모(愛慕)/사전 선호(選好)], 즉,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이라는 관계 안에 있는 사랑(pious love, love of piety)"은, 초자연적이기 때문에caritas(charity, 애덕)와 동일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자구적 어의(literal sense) 때문에, 4세기 말에 성 예로니모(St. Jerome)가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할 때에, 라틴어 명사 "caritas(charity, 애덕)"에 대응하는 그리스어 명사 "agape"의 동사형을, "dilectio"의 동사형인, "diligo, diligere, dilexi, dilectum "로 번역하였다는 생각이며(diligere, 즉, to value or esteem highly[높게 존중하거나 혹은 존경하다]), 그리고 이것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생각에, 위의 제3-2항에서 지적하고 있는 지적 혹은 의문에 대한 답변이라는 생각입니다.

     

    3-4-4. 그리고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있어, 바로 이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충실이라는 관계 안에 있는 사랑(pious love, love of piety)"의 완미(perfection)의 소유는, 그리스도교 세례에서 세례를 받는 자의 의지[will, 즉, 이성적 욕구(rational appetite)] 안 하느님에 의한, 초자연덕인 애덕(charity, caritas)의, 주입(infusion)에 의하여, 세례를 받는 자에게, 비로소 처음으로, 가능할 수 있게 됩니다.

    (이상, 질문 3에 대한 답변 끝)

    (이상, 발췌 끝)

     

    3. 본글의 결론들


    3-1. 위의 제2항에서 고찰한 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이 글의 결론 1) 지금까지 위의 제2항에서 고찰한 바로부터 다음을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i) 그리스어 명사 "agape"에 대응하는 라틴어 명사는 "caritas"이다.

    (ii) 그리스어 명사 "agape"의 동사형인 "agapao"에 대응하는 라틴어 동사는 "diligo"인데, 그 이유는 "caritas"의 동사형이 라틴어에 없기 때문이다.

    (iii) 라틴어 명사 "dilectio"는 동사 "diligo"의 명사형이며(위의 제2-2-3항 참조), 따라서 라틴어 명사 "dilectio"는, 명사 "caritas"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고, "caritas"의 행위(act)를 나타낸다.(게시자 주 2-3-1, 제2-3-4항 및 제2-3-5항 참조)

    (iv) 성 예로니모는,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할 당시에, 바로 위의 (i) - (iii) 모두를 잘 알고 있었다.(제2-3-1항 참조)

    (이상, 이 글의 결론 1 끝)

     

    3-2. 따라서, 위의 제2-3항에서 고찰한 바들로부터,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2) 특히 위의 제2-3-3항제2-3-4항에서 고찰한 라틴어 동사 "diligo"의 유관 파생어들에 의하여,

     

    (i) 성 다마소 1세 교황님(305-384년)의 명을 받은 성 예로니모(St. Jerome, 342/347-420년)에 의하여 성경이 라틴어로 번역될 당시에 이미, 라틴어 명사 "dilectio"동사 "diligo"의 명사형(verbal noun)[즉, 애덕/카리따스/아가페(charity, caritas, agape)의 행위]임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리고 또한

     

    (ii) 13세기성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5년)"신학 대전"을 저술할 때에도 또한 라틴어 명사 "dilectio"동사 "diligo"의 명사형(verbal noun)[즉, 애덕/카리따스/아가페(charity, caritas, agape)의 행위]임을 잘 알고 있었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3-3.

    3-3-1. 그리고 위의 제1항제2항에서 고찰한 바에 의하여, 또한 다음의 결론들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3)(Sun T. Soh) 예수님과 그리스도교 신자들 사이의 통공(communion)의 성경 근거요한 복음서 15,10 및 15,12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특히 요한 복음서 15,10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당신의 계명들(commandments) 중에는, 예수님께서 명하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라"가 포함됨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따라서, (i)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명령을 하여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는, 세례자 요한이 다른 피조물인 사람들에게 준 다른 세례와는 현격하게 다르게, "성령에 의하여 기름부음받는 세례"이라고 불리는 첫 번째 세례이며, 그리고 예수님의 공생활과 그 이후의 시기에 바로 이 동일한 "성령에 의하여 기름부음받는 세례"를 받게 되는 피조물인 사람은,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받으신 동일한 "성령에 의하여 기름부음받는 세례"를 받기 때문에, 요한 복음서 15,10ㄴ에 따라, 예수님의 사랑의 행위(dilectio)에 의하여, 비로소 예수님과의 통공이 처음으로 가시적으로/현실태적으로 형성될 수 있게 됨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그리고, 더 나아가, (ii) 요한 복음서 15,12에서 '예수님께서 명하신 당신의 새 계명을 지키는 행위/실천하는 행위를 통하여, 그리스도교 세례에 의하여 형성된 예수님과의 통공이라는 상태가, 또한 요한 복음서 15,10ㄴ에 따라, 예수님의 사랑의 행위(dilectio)에 의하여, 지속적으로 유지가 됨에 또한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내용 추가 일자: 2021년 5월 17일]

    게시자 주 3-3-1: 따라서, 요한 복음서 15,10 및 15,12에 의하여 일단 예수님과 특정 그리스도교 신자와의 통공이 형성되어 유지되면, 성부 하느님과 바로 이 그리스도교 신자와 의 통공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속량(Redemption) 위업의 한 결과를 말하는 요한 복음서 15,10ㄱ에 의하여, 자동적으로 형성되어 유지됨에 또한 반드시 주목하라.

    [이상, 2021년 5월 17일자 내용 추가 끝]

     

    3-3-2.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예수님께서 첫 번째 그리스도인이심에 대한 졸글/논문[제목: 예수님께서는 왜 첫 번째 그리스도인이실까요? [예수 세미나] [교리학습] 1114_나자렛사람들 281_ ; 게시일자: 2011-09-28]을 학습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14.htm <----- 필독 권고

     

    따라서, 본글은 바로 위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글에 이어지는 글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바로 위의 (이 글의 결론 3)을 필자가 도출한 것입니다.

     

    3-3-3. 따라서, 바로 위의 (이 글의 결론 3)의 한 개의 따름 정리(a corollary)로서, 다음의 결론을 또한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4, Sun T. Soh) 그리스도교 신자들 사이의 통공(communion)의 성경 근거요한 복음서 15,10 및 15,12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 신자들 사이의 통공은, 1차적 통공인 예수님과 각 그리스도교 신자 사이의 통공을 거쳐서 비로소, 2차적으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나의 벗의 벗은 나의 벗이 아닐 수도 있으나, 그러나, "나의 교우(敎友)의 교우(敎友)는 또한 나의 교우(敎友)임"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왜 진리이라고 받아들이는지를 곰곰히 생각하도록 하십시오.

     

    [내용 추가 일자: 2021년 5월 17일]

    다음과 같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가르치셨듯이:

     

    출처: http://www.vatican.va/content/john-paul-ii/en/apost_exhortations/documents/hf_jp-ii_exh_06111999_ecclesia-in-asia.html

    (발췌 시작)

    Communion with Jesus, which gives rise to the communion of Christians among themselves, is the indispensable condition for bearing fruit; and communion with others, which is the gift of Christ and his Spirit, is the most magnificent fruit that the branches can give.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통공(the communion of Christians)을 생기게 하는(gives rise to), 예수님과의 통공(communion with Christ)은 열매를 맺기 위항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며,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당신의 영의 선물인, 다른 이들과의 통공은 포도나무의 가지들이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장대한 열매입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이상, 2021년 5월 17일자 내용 추가 끝]

     

    3-4.

    3-4-1. 한문본 성경의 경우에, 전후 문맥 안에서 한자 낱글자 "愛"(애) 자체가 "사랑" 혹은 "사랑하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그리고 왜냐하면 한자 낱글자들의 경우에, 우리말처럼 접미사들을 붙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의미"를 나타내는 상형 문자들이기 떼문에, 따라서 한문본 성경의 경우에, 위의 제2-1-1항제2-1-2항에서 필자가 말씀드린 바는, 소위 말하는, 전후 문맥 안에서의 해석의 문제가 될 것이지, 번역 미숙 혹음 번역 오류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말의 경우에 접미사들을 붙여 파생어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어법적으로 매우 쉬운데, 바로 이 점은 가톨릭 교회의 공식 언어인 라틴어 어법이, 적어도 2000년 전부터, 또한 가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3-4-2. 다른 한편으로, 특정 지역의 언어로 성경 본문이 번역이 될 때에, 정확한 내용을 전달하는 양질의 번역 작엄을 수행하기 위하여 "새 대중 라틴말 성경" 몬문 중의 대응하는 부분을 참조하라는 것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교황청 경신성사성의 지침서으루부터 알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90.htm 

    (발췌 시작)

    다음은,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전례문, 성경 등의 가톨릭 보편 교회의 문헌들의 지역 언어로의 번역 지침서인, 교황청 경신성사성 문헌 [제목: Liturgiam authenticam2001년 5월 7일] 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1: http://ch.catholic.or.kr/pundang/4/vatican/rc_con_ccdds_doc_20010507_la_en.htm

    출처 2: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우리말 번역문)

    참고 자료: http://ch.catholic.or.kr/pundang/4/va2001trans_guide.htm

    (발췌 시작)
    41. The effort should be made to ensure that the translations be conformed to that understanding of biblical passages which has been handed down by liturgical use and by the tradition of the Fathers of the Church, especially as regards very important texts such as the Psalms and the readings used for the principal celebrations of the liturgical year; in these cases the greatest care is to be taken so that the translation express the traditional Christological, typological and spiritual sense, and manifest the unity and the inter-relatedness of the two Testaments.[34] For this reason: 

    41. 번역문들이, 전례에서의 사용에 의하여 그리고 교부들의 전통에 의하여 전해 내려오고 있는 성경 구절들에 대한 바로 그 이해에 합치됨(be conformed to), 특히 시편들과 전례력의 주된 경축들을 위하여 사용되는 독서들 등과 같은 대단히 중요한 본문들에 관련하여, 확실하게 하기 위한 노력이 기울여져야 하며, 그리고 이들 경우들에 있어 번역본이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적(Christological), 예형론적(typological) 및 영성적(spiritual) 의미(sense)를 표현하기 위하여, 그리고 두 계약들(two Testaments)[34]의 단일성(unity)과 서로 관련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하여 최대한의 주의가 취하여져야만 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a) it is advantageous to be guided by the Nova Vulgata wherever there is a need to choose, from among various possibilities [of translation], that one which is most suited for expressing the manner in which a text has traditionally been read and received within the Latin liturgical tradition; 

    a) [번역에 있어서의] 다양한 가능성들 사이에서, 그 안에서 어떤 본문이 라틴 전례 전통 안쪽에서 전통적으로 읽혀지고 그리고 받아들여 온 방식을 표현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바로 그 한 개를 선택하여야 할 어떤 필요가 있는 장소 어디에서든새 대중 라틴말 성경(the Nova Vulgata)에 의하여 인도되는 것이 유익하다;

     

    b) for the same purpose, other ancient versions of the Sacred Scriptures should also be consulted, such as the Greek version of the Old Testament commonly known as the “Septuagint”, which has been used by the Christian faithful from the earliest days of the Church;[35] 

    b)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교회의 가장 초기의 시기들부터 그리스도교의 열심 신자들에 의하여 사용되어 오고 있는, 통상적으로 "칠십인 역"으로서 알려져 있는 구약 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 등과 같은, 성경 본문들에 대한 고대 본들은 또한 참고되어져야만 한다;[35] 

     

    c) in accordance with immemorial tradition, which indeed is already evident in the above-mentioned “Septuagint” version, the name of almighty God expressed by the Hebrew tetragrammaton (YHWH) and rendered in Latin by the word Dominus, is to be rendered into any given vernacular by a word equivalent in meaning.  

    c) 위에서 언급된 "칠십인 역" 본에서 정말로 이미 분명한, 기억에 없는 전통과 일치하여, 히브리어 tetragrammaton (YHWH)에 의하여 표현되는 그리고 라틴어로 Dominus 라는 단어로 옮겨지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이름은, 의미에 있어 동등한 한 개의 단어에 의한, 어떤 정해진 자국어(any given vernacular)로 옮겨져야 한다.  

     

    Finally, translators are strongly encouraged to pay close attention to the history of interpretation that may be drawn from citations of biblical texts in the writings of the Fathers of the Church, and also from those biblical images more frequently found in Christian art and hymnody.

     

    끝으로, 번역자들은 교부들의 저술들에 있는 성경 본문들의 인용(citations)들로부터그리고 또한 그리스도교 예술(art)과 찬미가(hymnody)에서 더 자주 발견되는 바로 그 성경적 묘사(biblical images)들로부터, 도출될 수도 있는, 해석의 역사(the history of interpretation)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것이 강하게 독려된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이상, 발췌 끝)

     

    3-4-3. 따라서, 위의 제2항에서 고찰한 바와 위의 제3-3-2항에 의하여, 다음의 결론들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5) 2005년에 초간된 "새 번역 성경"이 우리말로의 번역 작업을 통하여 마련될 당시에, 만약에 요한 복음서 15,9-17을 우리말로 초벌 번역을 한 번역자(들)이 본글의 제2항에 제시된 지식/정보들을, 특히 "대중 라틴말 성경""새 대중 라틴말 성경" 둘 다의 요한 복음서 15,9.10.13에서, "caritas" 대신에"dilectio"라는, "사랑의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의 명사형(verbal noun)이 네 번에 걸쳐이 사용되었음을, 이미 알고 있었더라면(가정법 과거), 위의 제1-1-1항에 발췌된 바와 같이 번역하지 않고, 위의 제1-1-2항에 제시된 바처럼, "새 대중 라틴말 성경"에 본문에서 "dilectio"에 대응하는 우리말 번역 표현을, "사랑" 대신에, "사랑의 행위" 혹은  이와 등가인 표현으로 선정하였을 것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따라서, 다음의 결론을 또한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6) "새 번역 성경", 요한 복음서 15,9-17에서 세 번에 걸쳐, "사랑의 행위 안에 머물다" 대신에"사랑 안에 머물다"로 번역된 표현, 그리고 요한 복음서 15,13에서, "더 큰 사랑의 행위" 대신에"더 큰 사랑"으로 번역된 표현, 이들 둘 다는, 번역 미숙/번역 오류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24-05-10]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본글에 이어지는 졸고를 학습할 수 있다.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예수님_안에_머무르다의_의미_2212.htm <----- 꼭 필독 권고 

    [이상, 2024-05-10일자 내용 추가 끝]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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