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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안봉근, 그는 누구인가 (상) 새로 보는, 다시 보는 안봉근

1888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5-08-13

[안봉근, 그는 누구인가] (상) 새로 보는, 다시 보는 안봉근


안중근 가문의 숨은 영웅, 문화 독립운동가 안봉근

 

 

- 1914년 독일로 떠나기 전 안봉근. 안기명 제공

 

 

광복 80주년을 맞아 ‘문화 독립운동’을 한 안봉근의 생애와 뒷이야기를 3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안봉근은 일제 강점기부터 근현대사에서 드러나는 안중근 가문의 기여를 독립운동·민족운동에서 문화운동으로 넓힌 인물입니다. 안봉근이 한국 독립운동사의 새로운 인물로 주목받고 평가되기를 바라며 그의 생애와 더불어 독일 드레스덴민족학박물관에 소장된 한국 민속 유물 정리에 기여한 공적, 교황 파견 조선 선교사 빌렘 신부와 안봉근의 후손들이 교류한 사진과 편지를 소개합니다.

 

 

일본과 독일서 스파이로 오해받아 고초 겪어

 

1943년 광복을 2년 앞두고 한 신문에 독일에서 활동하는 8인의 조선인들이 소개되었다. 그중 한 명이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이탈리아에서 상과(商科)를 졸업하고 베를린에서 자영업을 하는 ‘안봉근’이었다. 1897년 청계동에서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에게 세례를 받은 안봉근(요한 세례자, 1887~1945?)은 안중근의 사촌 동생이자 빌렘 신부의 복사였으며 전교회장이었다. 그는 빌렘 신부가 안중근(토마스)의 요청으로 뤼순 감옥으로 찾아가 고해성사를 주고 마지막 미사를 봉헌한 문제로 60일간 성무 집행 정지를 받는 등 뮈텔 주교와 갈등을 겪다가 1914년 4월 조선을 떠날 때 함께했다.

 

독일에서 안봉근의 삶은 편치 않았다. 1911년 황해도 해주 청계동을 방문했던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베버 총아빠스와 포겔 아빠스와의 인연 덕분에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과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을 오가며 지낸 지 몇 달만에 소지하고 있던 일본 여권 때문에 ‘일본 스파이’라는 오해를 받아 체포되었다. 당시 독일과 일본은 적대국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4년 8월 4일 영국이 독일에 선전 포고를 했고, 일본은 영일 동맹을 근거로 8월 23일 독일에 개전을 선언한 직후였다.

 

안봉근은 1914년 8월 체포돼 한 달 넘게 감옥에 갇혀 폭행을 당했고 배고픔에 시달렸다. 두 수도원장(아빠스)과 빌렘 신부의 노력으로 가까스로 풀려난 안봉근은 1915년 빌렘 신부가 사목을 맡은 알자스-로렌의 달렘으로 갔으나 세계대전으로 지역 사정이 어려워 학업을 진행하기도, 생활을 유지하기도 어려웠다. 1916년 안봉근은 조선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중립국인 네덜란드 국경을 넘었으나 이번에는 ‘독일 스파이’란 죄목으로 일본 대사관에 체포되었다. 런던을 거쳐 일본 고베로 이송되는 과정에서는 물론, 고베에서도 신문과 폭행을 당했고 강제로 배에 태워졌다.

 

1916년 7월 22일 안봉근을 태운 히타치마루호가 해주 용당포에 도착했다. 일본 경찰의 수색과 심문을 받고 하루가 지난 23일 하선한 안봉근은 가족 누구도 그의 귀국을 알지 못한 탓에 일본 경찰의 안내로 해주 서영정의 장인 최형규의 집으로 가서 가족과 상봉했다. 그의 귀국은 몇몇 신문에 보도됐고 인터뷰를 위해 기자가 직접 그를 찾아오기까지 했다. 기자는 안봉근이 안중근의 사촌 동생이며 영어·독일어·일본어를 할 줄 알고 신부를 따라 독일에 갔다가 돌아왔다고 소개하였다. 그리고 “이제 이십팔 세의 청년이며 성질은 용감 활발하여 남자의 기개가 있고 천주교 신자로 특별히 애심(愛心)이 풍부하더라”고 덧붙였다.

 

 

천주교 신자로 사랑이 풍부했던 안봉근

 

안봉근은 안중근의 가족일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의 감옥살이 행적 때문에 요주의 인물로 주목받았다. 무엇보다 일제 치하의 조선에서 나라와 가족을 위해 일을 도모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1917년 12월 몰래 조선을 떠났다. 1차 유럽에서의 체류 기간은 짧았으나 이미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이후 안봉근의 행적은 1930년대가 돼서야 신문과 잡지를 통해 드러났다. 그는 베를린에서 두부 공장을 운영하며 조선 전래동화 또는 고전물을 번역해 소개하고, 독일 각지를 순회하며 강연하고 신문이나 잡지에 투고하면서 일제 강점의 부당함을 알렸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압록강은 흐른다」가 독일에서 출판됐다(1959년 전혜린이 우리말로 번역). 저자 이미륵은 1917년 도항 이후 궁금했던 안봉근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겼다. 안봉근은 조선을 떠나 중국 상해에서 그의 사촌 안공근(안중근의 동생)과 형수 김아려(안중근의 부인), 안중근의 자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임시정부 일을 돕고 있었고 마침 상해로 도피한 이미륵을 만났다. 이미륵의 본명은 ‘이의경’으로 안봉근보다 2살 어린 해주 출신이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으로 1919년 3·1 운동에 가담한 이후 상해임시정부 소속 비밀 독립운동 단체에서 편집부장직을 맡아 활동하던 중 발각돼 1919년 상해로 망명했다.

 

“내가 여기서 만난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은 한 사람의 칭찬을 다른 사람의 희망과 결부시키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 조국을 장래성이 있는 나라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고, 자기 생각으로는 앞으로 우리가 일본을 대담하게 멸망시키면 그놈들이 모두 집에 가만히 앉아서 뒤죽박죽되어 다시는 한국으로 건너오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런 생각들이 그에게는 유치한 환상이 아니었고 모험적이면서도 실행성이 엿보이는 사상이었다. 그게 사상이든 망상이든 간에 나에게는 그의 씩씩한 성격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는 몇 년 전에 유럽에 유학 갔다가 전쟁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지 않으면 안 되어 귀국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지금 유럽으로 다시 가려고 하고 있으며 나와 동행하자고 약속했기 때문에 출발이 자꾸 연기되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동생(안공근)은 나를 뒤에서 밀어주고 사촌(안봉근)은 앞에서 당겨주고 하여 나는 결국 저절로 앞으로 나가게 된 셈이었다.”(이미륵)

 

- 빌렘 신부 사제관에서 베네딕도회 카시아노 니바우어 신부와 안봉근(맨 오른쪽). ©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한국교회사연구소

 

안봉근은 이미륵을 데리고 1920년 5월 독일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 도착했다. 이후 이미륵은 뷔르츠부르크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의학 공부를 하고 뮌헨대학에서는 동물학을 전공했다. 1927년에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결의대회’에 조선 대표 유학생으로 참가해 일제의 지배하에 신음하고 있는 한국의 실정을 국제사회에 호소했다. 이미륵은 1948년 뮌헨대학교 동양학부 외부 교수로 초빙되었으나 안타깝게도 1950년 3월 20일에 독일에서 죽었다. 조국을 떠난 지 105년 만인 2024년 귀환한 이미륵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프란치스코 교황 말씀을 실천한 인물

 

이미륵의 삶을 통해 안봉근을 새롭게 본다. 그는 “우리는 받고 싶은 도움을 다른 이들의 성장을 위해 내주어야 합니다. 평화는 밝은 태양 아래서 함께 꾸는 꿈이며 혼자가 아닌 모두가 함께 이루어가는 꿈입니다”라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을 실천한 인물이다. 다음호에서는 독일 드레스덴민족학박물관에 소장된 한국 유물을 정리하고 유물카드를 작성한 과정과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과의 인연 등 영화처럼 드라마틱한 안봉근의 인생을 들여다볼 것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5년 8월 10일, 송란희 가밀라(한국교회사연구소 학술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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