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39: 숭공학교(崇工學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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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 주호식 [jpatrick] 스크랩 2025-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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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담긴 고요한 아침의 나라] (39) 숭공학교(崇工學校)
“기도하고 일하라”… 일제강점기 조선인 기능공 양성에 큰 공헌
- <사진 1> 노르베르트 베버, ‘숭공학교 목공부’, 랜턴 슬라이드, 1911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 <사진 2> 노르베르트 베버, ‘숭공학교 목공부가 제작한 제대’, 랜턴 슬라이드, 1911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베네딕도회, 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실업학교 설립
“가파른 언덕배기, 수도원 방향으로 꼬불꼬불한 산길이 시작되는 곳에 실업학교가 있다. 얼마 전에 일부가 증축되었고, 그 옆에 꽤 넓은 부속 건물도 새로 들어섰다. 입학을 원하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나날이 증가 추세에 있어서 이 신축 건물도 머지 않아 또 좁아질 것이다. 극동에서 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실업학교를 설립한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문화 민족에게 있어서 실업학교의 성공은 당연히 미심쩍을 수 있다. 그러나 실업학교 설립을 시도하지 않기에는 베네딕도회 모토의 ‘일’(Labora)과 ‘기도 생활’(Ora)이 너무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실업학교의 설립은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꼭 필요해 보였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76쪽)
노르베르트 베버 총아빠스는 선교 베네딕도회가 한국에 설립한 실업학교가 한국민들에게 특히 가톨릭 신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결실은 개교와 함께 곧바로 드러났다. “백성들은 가난했다. 그리스도인들은 빈자 중의 빈자였다. 그나마 한숨 돌릴 수 있을 뻔했던 시절도 너무 짧았다. 박해는 모든 것을 앗아갔다. 이런 상황은 19세기 말까지 이어졌다. 1894년에도 조조 신부가 그리스도교를 반대하는 동학군에게 살해되었다.
이 모든 저간의 사정은 실업학교가 설립과 함께 큰 성공을 거둘 수밖에 없는 탄탄한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명민한 한국의 젊은이들은 배움이 빨라서 좋은 결실을 맺고 세간에 학교의 명성을 드높였다. 목공부와 철공부는 소박하게 출발했지만 신통한 마술을 부리듯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비중을 증대시키고, 그리스도교 자체의 명예도 빛내 주었다. 이제는 작업장과 교직원이 부족한 데다 증축 자금도 달려 급기야 지원자 가운데 수백 명을 되돌려 보내야 할 지경이다.
- <사진 3> 노르베르트 베버, ‘숭공학교 제차부 실습’, 랜턴 슬라이드, 1911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 <사진 4> 노르베르트 베버, ‘숭공학교 철공부 실습’, 랜턴 슬라이드, 1911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기도와 일’ 숭공학교 운영
그리스도인들은 실업학교에서 생계 문제의 해법을 모색했다. 그들은 수공업의 활성화를 통해 삶의 기반을 다졌다. 박해 시대부터 이어져 온 그리스도인에 대한 외교인들의 존경심도 더욱 강화되었다. 한때 박해받고, 멸시받고, 빼앗기고, 내쫓겼던 사람들이 이제는 새로운 사회적 움직임을 주도하고, 산업 활동에 새 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외교인들은 박해의 시련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보여 준 영웅적 용기와 희생 정신에 감탄을 금치 못했듯이, 이제는 엄청난 경제적 성과도 창출할 줄 아는 놀라운 동력으로서 그리스도교를 존중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이런 사회적 변모는 어머니 교회가 자녀들의 일용할 양식을 돌보기 위해서도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지 외교인들에게 보여줄 것이다.”(「고요한 아침의 나라」 177쪽)
베버 총아빠스가 이토록 자랑한 실업학교는 바로 1910년 서울 백동 수도원 안에 설립한 숭공학교(崇工學校)다. 숭공(崇工)은 ‘기도와 일’을 의미한다. 백동 수도원장 보니파시오 사우어 아빠스는 숭공학교의 목적과 가치, 목표를 네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가톨릭교회가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둘째, 가톨릭 수공업자 계층을 형성해 중산층을 양성한다. 셋째, 젊은이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전파한다. 넷째, 유능한 현지인 평수사를 양성한다.
이러한 교육 이념으로 숭공학교는 목공·철공·제차·원예 분야의 숙련된 장인을 양성하기 위해 매일 이론 2시간·실습 8시간 등 강도 높은 수업을 진행했다. 3년 과정의 견습 기간을 통과한 학생들은 수도원 안에서 2년 더 기능공으로서 기술을 익혔다.
일데폰소 플뢰칭거 수사가 지도한 목공부는 각종 가구는 물론, 제대·감실·촛대·독서대·무릎틀·강론대·주교좌 등 성당 전례용 집기를 제작해 명성을 날렸다.<사진 1>·<사진 2> 힐라리오 수사가 지도한 제차부는 마차를 비롯한 각종 운반용 차량 상부 제작과 자동차 수리로 이름을 높였다.<사진 3>·<사진 4> 원예부는 전문적인 종묘재배와 양봉·양계 기술을 익혔다.<사진 5>
- <사진 5> 노르베르트 베버, ‘숭공학교 원예부 실습’, 유리건판, 1911년,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 아카이브 소장 한국 사진.
목공·철공·제차·원예 분야 장인 양성
숭공학교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목공부를 지도하던 일데폰소 플뢰칭거 수사를 비롯한 총 5명이 강제 징집되면서 숭공학교 운영에 차질을 빚었다. 독일은 유럽에서뿐 아니라 조차지인 중국 청도에서도 일본과 영국의 연합군에 패했다. 이후 데라우치 총독은 백동 수도원의 독일 선교사들을 감시하고 단속했다. 독일인 선교사들은 수도원 안에서 조용히 지내야 했고, 행동의 자유는 제한됐다. 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경찰에 신고해야 했고, 고해성사 말고는 모든 선교 활동이 금지됐다. 자연히 숭공학교 학생 수도 줄어들었다. 결국 선교 베네딕도회가 1920년 원산대목구를 맡아 서울을 떠나게 됨에 따라 1923년 숭공학교는 폐교하고 만다.
베버 총아빠스는 숭공학교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숭공학교 작업장에서는 훌륭한 걸작품뿐 아니라 탁월한 장인들도 배출되었다. 그들은 수습 시절부터 수도자들의 엄격한 지도 아래 낯선 연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법을 배웠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511쪽)
[가톨릭평화신문, 2025년 8월 10일, 리길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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