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홍)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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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내려가야 만날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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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silver0824] 쪽지 캡슐

2014-04-24 ㅣ No.88752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부활 팔일 축제 내 금요일


< 주님이십니다!
 >


복음: 요한 21,1-14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렘브란트 작


     < 내려가야 만날 수 있는 것 >

         

  

6학년 땐가 몹시도 추웠던 겨울이었습니다. 점심시간이면 말없이 사라지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반친구들로부터 이유 없이 따돌림을 받던 아이는 늘 그렇게 혼자 굶고 혼자 놀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가 다가와 쪽지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은하야, 우리 집에 놀러 갈래?’

그 애와 별로 친하지 않았던 나는 좀 얼떨떨했지만 모처럼의 제의를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수업 끝나고 보자.’

그날따라 날이 몹시 추웠습니다. 발가락이 탱탱하게 얼어붙고 온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지만 한참을 가도 그 애는 다왔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으으으 추워 ...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지?’

괜히 따라나섰다는 후회가 밀려오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치밀기 시작할 때쯤 그 애가 멈춰 섰습니다.

다 왔어. 저기야. 우리 집.”

그 애의 손끝에는 바람은커녕 함박눈 무게조차 지탱하기 힘들어 보이는 오두막 한 채가 서 있었습니다.

퀴퀴한 방 안엔 아픈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미안하구나. 내가 몸이 안 좋아 대접도 못하고.....”

내가 마음을 풀고 동생들과 놀아주고 있을 때 품팔이를 다닌다는 그 애 아버지가 돌아왔습니다.

어이구, 우리 딸이 친구를 다 데려왔네.”

그 애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친구를 데려온 적이 없는 딸의 첫손님이라며 날 반갑게 대했고 동생들과 금새 친해져 즐겁게 놀았습니다.

날이 저물 무렵 내가 그애 집을 나설 때였습니다.

갈게.”

또 놀러 올 거지?”

.”

그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얘야, 잠깐만 기다려라.”

가려는 나를 잠시 붙잡아놓고 부엌으로 들어간 그 애 아버지가 얼마 뒤 무언가를 손에 감싸 쥔 채 나왔습니다.

저어.... 이거. 줄게 이거밖에 없구나.”

그 애 아버지가 장갑 낀 내 손에 꼭 쥐어준 것, 그것은 불에 달궈 따뜻해진 돌멩이 두 개였습니다. 하지만 그 돌멩이 두 개보다 더 따뜻한 것은 그 다음 내 귀에 들린 한마디 말이었습니다.

집에 가는 동안은 따뜻할 게다. 잘 가거라.”

잘 가, 안녕.”

안녕히 계세요.”

나는 세상 그 무엇보다 따뜻한 돌멩이 난로를 가슴에 품은 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TV동화 행복한 세상, 따뜻한 조약돌]

 

저도 어렸을 때는 이런 작지만 따뜻한 기억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 집은 중학교 2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아주 가난한 시골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당에 가려고 해도 한 시간은 걸어야 했고, 학교에 가는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탄 때 주일학교에서 주는 선물엔 아주 커다란 사과가 들어있었습니다. 그것을 먹지 않고 가족과 나누어 먹으려고 가져왔던 일. 어머니가 비닐하우스에서 일하시다가 아침에 참으로 받은 빵과 우유를 드시지 않고 우리에게 가져오신 일. 아버지 월급 때마다 사오시던 초코파이 한 상자. 용돈을 모으고 모아 형과 함께 어머니 생신 선물로 사드린 덧신.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와 전기밥솥 주위에 온 가족이 모여앉아 밥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함께 감탄했던 일. 어머니가 오랜만에 삼겹살을 사 오셨는데 어머니 드실 것은 남겨놓지도 않고 다 먹고 나서야 알고 나서 죄송했던 일 등. 참으로 작은 행복으로 풍요로웠던 어린 시절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보다 훨씬 풍요로워졌는데도 그런 따듯한 조약돌 같은 사랑은 좀처럼 느껴보지를 못합니다. 부자가 되었지만 가슴 먹먹함만 더 커진 세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방법은 좀 특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드러내셨다.”

, 오늘 복음은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만 많은 영혼을 잡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정작 요한 사도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나타내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순종할 수 있는 겸손함, 그 겸손함을 지닌 이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목소리대로 오른쪽에 그물을 던졌지만,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물고기가 많이 잡혀 놀라고 있는 베드로에게 또 다른 제자가 주님이십니다!”라고 말한 뒤에서였습니다. 베드로는 물고기 잡는 전문가였지만 밤새 허탕 쳤음에도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순종할 정도로 겸손해져 있었기에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나타내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만 그분의 가르침에 순종하리만큼 겸손하지 못한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할 수 있는 나약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 것처럼, 그렇게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계가가 없어서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은하처럼 가난한 곳으로 내려가거나 낮아지지 않으면 결코 만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신 이유는 그만큼 풍요해지면 당신을 만나기 어렵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나라의 행복은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낮고 가난한 곳에 있습니다. 참다운 행복,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이태석 신부님이나 다른 성인들도 가난한 이들을 찾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그분을 만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곳이 낮고 가난한 곳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곳은 가난하고 억압받고 낮은 곳입니다. 왜냐하면 그 곳으로 예수님을 성령께서 이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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