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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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論 / 성사 5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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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식 [alkim5533] 쪽지 캡슐

2011-09-19 ㅣ No.64826

 

               그리스도論 / 성사  57 회

   그리스도論 

    성사  (승전)

[성사 교의의 형성] : 중세 시대에 성사는 루터(M. Luther, 1483-1546).

                     츠빙글리 (U. Zwingli, 1484-1531), 칼뱅 (J. Calvin,

1509-1564) 드의 종교개혁자들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종교 개혁자들은 은총,

신앙, 성서를 절대적 규범으로 내세우면서 성사 신학에도 이 규범을 적용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신약성서가  분명히 증언하는 세례와 성만찬 두가지 만을

그리스도로부터 설립된 진정한 성사로 인정하였고 다른 성사들은 거부하엿다.

또한 신앙을 강조하여 성사가 사효적(事效的) 효력을 지닌다는 가르침을 부정하

기도 하였다. 루터는 성사 안에서 선포되는 하느님 말씀의 힘을 믿음으로써, 칼

뱅은 성사 자체의 힘이 아닌 성령의 힘에 의해서 은총을 받는다고 주장하였다.

종교해혁자들은 하느님 말씀 중심의 신학을 전개하면서 성사는 말씀에 비해서

이차적인 것으로 보았다.

종교개혁자들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서 개최된 트리엔트 공의회 (1545-1563)

에서 처음으로 포괄적인 성사 교의가 작성되었다. 이 공의회에서는 모든 성사에

공통된 사항과 각 성사에 대한 교의를 결정하였는데, 이를 통해서 종교개혁자들

의 단죄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톨릭 교회 내의 잘못된 실천과 오류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대립적인 상황 때문에 개혁자들의 주장 중에서 긍정적인

측면, 이를테면 성사에 있어 하느님 말씀의 중요성과 신앙의 적극적 역할 등을 토

의하거나 수용하지 못하였다.  그로 인해서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성사 교의는

전반적으로 이 공의회의 영향 안에 머물었고 반종교 개혁적으로 강조되었다. 프로

테스탄트측이 성서의 하느님 말씀과 그 선포만을 배타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가톨릭측은 성사에 치중하였던 것이다.


* 참고 : 한국가톨릭대사전 제7권 1995년판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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