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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글방 / 담대(膽大) 하라 (요한16:2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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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9-12 ㅣ No.149682

 

(공동번역성서) 2021. 9. 12. 도란도란글방

 

 담대(膽大하라 

 

(요한16:29~33)

29 그제야 제자들은 '지금은 주님께서 조금도 비유를 쓰지 않으시고 정말 명백하게 말씀하시니 30 따로 여쭈어 볼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심을 믿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1 그러자 예수께서는 '너희가 이제야 믿느냐? 32 그러나 이제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제각기 자기 갈 곳으로 흩어져 갈 때가 올 것이다. 아니 그 때는 이미 왔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33 나는 너희가 내게서 평화를 얻게 하려고 이 말을 한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하고 말씀하셨다. 아멘

 

오늘은 예수님의 다락방 講話의 마지막 결론 부분입니다

제자들을 떠나 십자가를 지시고 죽임을 당하신 후 성령으로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당혹스러운 말씀을 하십니다. 세상에서 당신의 제자들이 환난을 당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때 담대(膽大)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세상을 이미 이겼으므로 담대하게 이겨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주님은 분명 방금 전에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리라고 당신의 임재를 재차 확인시켜 준 상태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함께 하실 그 제자들의 삶에 환난이 있을 것이라는 건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만일 주님께서 세상이 너희를 환난 속으로 밀어 넣을 것이지만 내가 너희와 함께 하여 다 막아줄 것이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담대 하라고 하셨다면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니 그 환난 속에서 담대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환난 속에서도 평화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도 하십니다.

왜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평화와 환난을 동시에 약속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그리고 그 환난과 평화 사이에서 그 둘을 화해하는 것으로 제시된 담대함이란 도대체 무얼 말하는 것일까요? 구약에는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과 대치되어 보이는듯한 구절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시편121:1-8) 1 이 산 저 산 쳐다본다.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2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 야훼에게서 나의 구원은 오는구나. 3 네 발이 헛디딜까 야훼, 너를 지키시며 졸지 아니하시리라.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 졸지 않고 잠들지도 아니하신다. 5 야훼는 너의 그늘, 너를 지키시는 이, 야훼께서 네 오른편에 서 계신다. 6 낮의 해가 너를 해치지 않고 밤의 달이 너를 해치지 못하리라. 7 야훼께서 너를 모든 재앙에서 지켜 주시고 네 목숨을 지키시리라. 8 떠날 때에도 돌아 올 때에도 너를 항상 지켜 주시리라, 이제로부터 영원히.

 

하느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면서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의 모든 환난을 면케 해 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느님의 열심은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삶 속에 환난이 있으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왜 예수님은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라 하십니까? 구약의 하느님과 신약의 하느님이 다른 분이신가요?

구약의 하느님은 당신 백성들의 환난을 모두 막아주시고 토지로 재물로 자식들로 복을 주시는 하느님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왜 신약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정 반대의 현상과 상황들이 일어날까요? 거기에 대한 힌트가 역대상의 야베스의 기도에 나와 있습니다.

 

(역대상4:9~10) 9 야베스는 일가 가운데서 가장 세력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고생하며 낳았다' 고 하면서 그에게 야베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10 야베스는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이렇게 빌었다. '부디 저에게 복을 내리시어 제 영토를 넓혀 주시고, 손수 액운을 막아 어려운 일 당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느님께서 그가 구한 것을 이루어 주셨다.

 

여기 보면 야베스가 '부디 저에게 복을 내리시어 제 영토를 넓혀 주시고, 손수 액운을 막아 어려운 일 당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했더니 하느님께서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합니다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전부 야곱의 아들 유다의 후손들의 족보입니다. 이름이 쭉 나열 되다가 그 중에 한 사람에게만 두 절에 걸친 부연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바로 야베스입니다.

그러니까 그 야베스의 이야기는 유다의 후손들의 삶이 이러한 것이다라는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유다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안에서 구원을 받게 될 모든 교회의 삶이 그러한 것임을 상징적으로 대표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역대기상 4장의 족보에 나와 있는 인물들의 연대를 측정해 보면 야베스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해 나가던 시절의 인물이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의 인도를 따라 가나안을 정복해 나갔지만 완전한 정복을 이룬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모두 정복한 것으로 보고 아홉 지파와 반 지파에게 땅을 제비뽑아 분할하여 각 지파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여호수14:2) 나머지 두 지파 반은 요르단 동편 땅을 차지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아직 땅을 다 정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가나안 땅을 미리 나누어 준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시기로 한 땅이므로 그 땅은 반드시 우리 것이 될 것이라는 확신 하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하느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걸 희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비를 뽑게하여 각 지파별로 분할할 때 유다 지파에 속한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요구하기를 자기네 지파 만큼은 제비를 뽑지 않고 자기들이 거할 땅을 지명할 테니 그 지명한 땅을 달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그 땅이 무시무시한 거인들인 아낙자손이 살고 있는 헤브론 땅이었습니다.(여호수14:12)

헤브론 땅이 어떤 땅입니까?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머물 때 모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열 두 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내지요? 그 때 정탐꾼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나머지 열 명이 가나안 땅 정복에 대해 아주 부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그 땅에는 네피림의 후손인 아낙 대장부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과 자기들을 비교하면 자기들은 메뚜기 같다고 엄살을 피웁니다. 그 때 온 이스라엘이 울부짖으며 모세와 아론과 하느님을 원망했습니다.(민수13:32-14:3)

그러나 그 때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그 땅이 하느님이 주신 약속의 땅으로 심히 아름다울 뿐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의지하여 그 땅으로 들어가자고 합니다.(민수14:6-10) 그 때 하느님께서 유다지파의 후손인 갈렙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그가 정탐하고 돌아온 땅, 아낙 자손이 살고 있는 헤브론 땅을 주시겠다고 특별히 약속을 하셨습니다.

 

(민수14:24) 그러나 나의 종 갈렙은 그 마음이 남과 달라 나의 뜻을 따라 할 일을 다 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그로 하여금 가서 보고 온 땅으로 다시 들어가도록 하겠고, 그의 후손이 그 땅을 차지하도록 해 주리라.

 

그래서 훗날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요구하기를 자기네 지파는 제비 뽑지 않을 테니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그 산지 가장 어렵고 난해한 난공불락의 땅을 달라고 요구를 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 갈렙의 유다지파에 야베스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야베스는 지금 헤브론 땅을 정복하기 위해 성전을 치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야베스는 유다지파가 아직 정복하지 못한 헤브론 땅을 하느님의 약속만을 믿고 싸워서 영토를 자꾸 넓혀가야 하는 그 시절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베스가 영토를 넓혀 달라는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일개 유다 지파가 아낙 사람들의 헤브론 땅을 완전히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야베스는 달랐습니다. 그는 하느님이 약속하신 땅이므로 하느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임을 알고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그걸 믿음이라고 하고 그걸 희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야베스의 기도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성취가 되었습니다.

 

(열왕상5:5) 이렇게 솔로몬이 다스리는 동안, 유다와 이스라엘은 단에서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마음 놓고 살면서 저마다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두 발 뻗고 잘 수 있었다.

 

야베스는 그러한 하느님의 계약이 성취되는 과정에 있는 유다 지파에게 환난이 임하여 그 계약의 성취가 지연되거나 실패되는 일이 없기를 기도한 것이고 그러한 하느님의 계약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창세기의 저주 정녕 죽으리라 죽고 죽으리라’ (무트 타무트)의 저주와 반대되는 하느님의 복 바라크가 꼭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복에 복을 더하시어라는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도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아직 가시적으로 성취되지 않은 하느님의 계약을 굳게 붙들고 감추어진 자로 숨겨진 자로 성실하게 계약을 향하여 나아가는 믿음의 삶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삶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야베스가 그러한 기도를 드렸지만 그 야베스의 기도가 야베스 당대에는 응답이 안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야베스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때에 분명하게 이루셨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보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경이 야베스가 구한 것을 하느님께서 다 들어주셨다고 기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베스의 당대에는 여전히 전쟁이 있고 환난이 있었지만 하느님의 계획과 뜻은 야베스의 기도대로 완벽하게 성취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야베스의 기도 응답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가시적인 응답을 볼 수 없다 할지라도 믿음과 희망으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하느님 계약의 성취를 바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그래서 야베스의 기도 앞에 그 야베스에 대한 묘사가 존귀한 자, 수고로이 낳은 자라고 기술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존귀한 자인데 수고로이 낳아진 자 누구입니까? 하느님 아버지께서 수고로이 낳은 유다의 후손들 즉 교회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하느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비록 그 약속의 성취가 이 땅에서 자신들의 삶 속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믿음과 희망으로 기도와 찬양과 예배를 통하여 기대하는 감추어진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베스의 기도나 시편 등에 나오는 하느님에 의해 지켜지고 막아지는 구약에서의 환난은 성도가 그의 당대에서 겪는 환난이라기 보다는 다가올 약속의 땅 하느님 나라에서의 환난을 말하는 것이고 그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 실패되어 지도록 위해를 가할 수 있는 환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 속에 그런 환난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구약의 환난을 면케 하신다라는 약속의 실체인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라는 어구의 환난은 말 그대로 우리 성도가 이 세상 속에서 환난을 통과하게 되지만 그 환난과 시험이 하느님의 계획과 뜻을 절대 방해할 수 없음을 가르치시기 위한 이 세상 속에서의 환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조금 쉽게 설명을 한다면 구약은 신약을 설명하기 위한 어린이용 그림책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구약은 복음을 알기 쉬운 그림으로 그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완성된 하느님 나라의 풍요라든가 완성된 하느님나라의 상태 그리고 거기에서 되어 질 일들이 알기 쉬운 그림으로 설명이 되고 있는 것이 구약입니다.

예를 들어 유치원 어린이들에게 을 설명할 때에는 하늘에서 선녀들이 밀가루를 뿌리는 것정도로 설명을 하잖아요? 어린 아이들에게 물 분자가 끓는점에 도달하여 수증기가 되면 기화지만 끓는점에 도달하지 않고서도 물 분자 자체의 운동으로 인해 수증기가 되어 공기 중으로 날아가는 것을 증발이라고 하는데 ,

그렇게 증발이 된 물 분자가 공기 중의 먼지나 다른 입자 등의 씨앗을 중심으로 뭉쳐 물방울이 되고 그 물방울 들이 모여 기단이 되어 그 기단의 충돌로 비가 내리며 기온이 낮을 때는 눈으로 내리는 것이란다이렇게 설명하면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구약에서는 선녀가 뿌려주는 밀가루정도로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그려주고 신약에서는 좀 더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모습으로 복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에 등장하는 하느님의 복을 받은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을 상징하는 것이고 그들에게 부어진 막강한 권세와 재력과 능력 등은 하느님나라 백성들에게 궁극적으로 주어지게 될 하느님나라의 풍요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선녀가 뿌려주는 밀가루그리고 그 완성된 하느님 나라에는 절대로 환난이나 가난이나 질병이나 고통이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구약의 그림 속에서는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이 세상의 물질적 복이나 건강이나 능력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기적 속에서 하느님 나라가 좀 더 풍성하게 계시가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죄의 삯인 죽음이 사라진 곳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죽음의 증상인 질병이나 귀신이나 가난이나 배고픔이 예수님에 의해 쫓겨나는 그림이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문둥병이나 혈루병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집니다. 그래서 부정해진 사람은 반드시 정결 예식을 행하던지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그건 악이라는 것의 전염과 확장의 힘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 악의 전염과 확장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예수님의 희생 제사를 상징적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으로 넘어오면 예수님이 그 부정한 것들을 마구 만지시는 에피소드 들이 반복하여 등장합니다. 열 두해 혈루병 앓던 여인이 예수님을 만졌습니다. 그러면 즉시 예수님은 부정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부정이 전염이 되지 않고 오히려 소멸이 되어 버렸습니다. 혈루병이라는 부정이 예수님의 몸에 닿자 사라져 버렸습니다. 문둥병 걸린 사람들을 예수님이 만지셨습니다. 구약 시대 같으면 부정이 예수님에게로 옮겨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 부정이 예수님에 의해 소멸이 됩니다.

예수님이 부정한 시체를 만지십니다. 그런데 그 부정인 죽음이 예수님 앞에서 물러갑니다. 죽음이 물러가고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그게 바로 하느님 나라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 죽음이 소멸이 되고 은혜의 나라가 오롯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음의 증상들이 완전히 소멸되고 하느님나라의 풍요로만 차고 넘치는 곳이 하느님나라라는 것을 구약의 그림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야베스의 기도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그 나라는 아직 가시적으로 우리에게 오지 않았습니다.

영적으로는 이미 우리 성도가 하느님 나라로 옮겨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사는 여전히 세상 권세 잡은 자의 손아귀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옛 세상에 속한 옛 몸을 입고 하느님나라의 가시적 도래를 기다리고 있는 이중적 현실 속에 사는 성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죽음의 증상인 환난을 당하게 되는 것이고 믿음으로는 영적 현실을 바라보며 평화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환난 속에서 하늘의 평화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세요?

평화라는 것은 우리의 삶에 아무런 잡음이나 분쟁이나 해로움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하느님의 계약이 모두 다 이루어진 상태 즉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하시고 하느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하느님께 온전한 순종을 드리며 사는 상태를 평화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불순종의 세상 속에서 완전한 순종에 의한 완전한 사랑을 받는 하느님나라를 믿음으로 보며 거기에서 평화를 얻는 것입니다.

지금은 분명 불완전한 상태이고 불완전한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한 상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분명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완성시켜 내시겠다고 하셨으므로 거기에서 완성된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누려버리는 것입니다평화는 다른 말로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평화는 혼용해서 써도 무방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평화는 이 세상 사전들이 정의해 놓은 그러한 종류의 평화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평화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세상은 줄 수 없는 평화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요한14: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 또한 환난이 없어지고 근심이 없어지는 그런 평화가 아니라 환난과 근심 속에서도 하느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에서 오는 필연적 완성에 대한 확신 속에서 오는 평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기쁨도 이 세상의 기쁨과는 완전히 다른 기쁨이었지요?

 

(요한15:11)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평화나 기쁨은 모두 나의 평화 나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평화, 예수님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우리가 이 세상의 물질이나 환경 상태 등에서 얻고자하는 세상적 평화와 기쁨을 모두 기각하고 부정하는 말입니다.

이제는 너희의 기쁨과 너희의 평화를 추구하며 살지 말고 나의 기쁨과 나의 평화를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의 기쁨과 평화는 버리고 나의 기쁨과 평화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약속하신 평화와 기쁨은 우리가 기대하는 그런 평안과 기쁨과는 완전히 반대쪽의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평화가 뭐였습니까? 예수님의 기쁨이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그게 뭔데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기 바로 직전에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상황은 최악입니다. 당신은 이제 세상의 힘에 의해 곧 잡혀 죽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에게 평화와 기쁨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최악의 상황 속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며 이 역사와 우주의 주관자이십니다. 따라서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과 환경이 어떠하다 할지라도 그 전지전능하신 역사와 우주의 주관자 하느님의 뜻을 쫓아 그 분의 뜻을 이루고 있다는 그 사실이 평화가 되고 기쁨이 되었던 것입니다바로 그 평안과 그 기쁨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의 이 세상적 기쁨과 평화를 파괴해 버리시고 그러한 세상적 평화와 기쁨이 파괴된 환난의 현실 속에서 하느님의 약속과 뜻과 계획을 믿는 믿음에서 오는 하늘의 기쁨과 하늘의 평화를 경험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정리를 하자면 하느님의 뜻 앞에서 나는 완전히 티끌로 낮아져 버리는 그 상태를 평화와 기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내가 원하는 세상적 기쁨과 내가 원하는 세상적 평안이 여전히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을 때에 우리는 주님의 평화와 주님의 기쁨을 절대 가질 수 없습니다.

세상적 평화와 기쁨은 내가 원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지고 내가 원하는 계획이 착착 내 뜻대로 진행이 될 때에 비로소 누릴 수 있게 되는데 우리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만족스러운 평안과 기쁨을 절대 누릴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느님의 뜻 앞에서 나의 뜻이 완전히 부정이 되어 버리고 그 분의 뜻과 능력을 신뢰할 때에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늘의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성도가 이 세상의 환난 속에서도 아무런 걱정도 없고 아무런 흔들림도 없으며 아무런 고통도 없이 살 수 있게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수없이 많은 흔들림과 걱정과 고통 속에서 살게 됩니다. 불안에 떨기도 하고 두려워 떨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두려움과 떨림과 고통과 흔들림 속에서도 그것을 능가하는 참 가치가 나에게 주어져 있음을 믿고 한발 한발 앞으로 내 딛는 것 뿐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요구되는 평화와 기쁨이 감정적으로 가시적으로 표가 나야 하는 것이라면 이런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내 기쁨과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서 바로 얼마 뒤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마르14:34~36) 34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남아서 깨어 있어라' 하시고는 35 조금 앞으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기도하셨다. 할 수만 있으면 수난의 시간을 겪지 않게 해 달라고 하시며 36 '아버지,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고 말씀하셨다.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 평화입니까? 그게 기쁨인가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에게 평화를 주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 주님 자신이 바로 얼마 후에 평화와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계시잖아요? 그게 담대함입니까? 그렇습니다.

담대함이란 모든 사건과 상황 앞에서 (겁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 고통도 없이 흔들림도 없이 씩씩하게 그 상황을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두렵고 떨리고 아프고 힘이 드는 상태에서 그러한 고통들보다 더 나은 가치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어렵게 한발 한발 내 딛는 것을 담대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담대함은 우리의 의지나 결단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믿음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화와 기쁨과 담대함은 우리가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그대로 되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열심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을 통하여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환난 속에서 여전히 흔들리고 아프고 민망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희망으로 주어진 완성된 하느님나라를 바라보며 한발 한발 가고 있는 그 상태를 평화요 기쁨이요 담대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디언 부부가 하느님을 버리고 교회를 떠났다가 그 극심한 고통과 환난 속에서 다시 하느님 앞으로 나아오는 그 상태가 바로 담대함인 것입니다. 상황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아들 둘은 이미 죽었고 딸도 폐인 상태이며 막내아들은 교도소에서 자살을 시도한 후 여전히 교도소에서 복역을 하고 있습니다. 직장도 아직 못 구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하느님나라에 대한 믿음이 그를 교회로 다시 끌어낸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과 이끌림을 담대함이라 합니다.

힘들어 죽겠는데 그 힘든 상황과 현실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나라가 있다는 것이 믿겨져서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그 모습에 평화와 기쁨과 담대함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천로역정에 보면 크리스천이 미궁이라는 곳에 들어가서 효시라는 이를 만나 담대라는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되지요? 그 때 담대라는 사람이 멋진 칼을 들고 대적들을 전부 물리치고 천성에 입성을 하는 모습을 계시로 본 크리스천이 자기도 그렇게 담대하게 천성을 향해 가겠노라는 결심을 합니다.

우리는 그런 장면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담대함이라고 하면 겁도 없고 두려움도 없고 흔들림도 없는 강인한 모습만을 떠 올립니다. 아닙니다. 담대함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환난 속에서 믿음에 의해 한발 한발 하느님께 이끌려 가는 그것이 담대함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 시간에 여기에 있는 것 우리 의지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아니라면 누군가 우리를 이끌어 이곳에 앉혀 놓으신 것이지요? 성령님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일도 안 풀리고 병도 안 낫고 상황도 좋아지지 않고 하는데 여전히 이 곳에 앉아 계십니까? 신기하지 않으세요? 뭐 별로 희망찬 비전을 얘기해 주지도 않잖아요?

하느님나라를 향한 믿음이 우리를 담대하게 만들어 이곳에 앉아있게 만든 것입니다. 여기에 지금 평화와 기쁨과 담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가면 또 사라지지요? 괜찮아요. 하느님은 다시금 우리를 붙들어 당신의 목표지점으로 이끌고 가실 거니까요.

담대함으로 평화로 기쁨으로 우리를 붙들어 내실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에게 믿음을 부으시고 그 믿음에 의해 세상의 쾌락과 매력을 밟고 일어서서 천성을 향해 한반 한발 가게 만드시는 성령 하느님의 열심을 가리켜 담대함이라 하고 거기에서 격발이 되는 것이 평화며 기쁨인 것입니다.

천로역정에 보면 크리스천이 미궁의 평화라는 방에서 잠시 자다가 또 떠나잖아요? 평화는 그렇게 늘 우리에게서 흘러넘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이 진심으로 믿어질 때 그 때 잠시 붙들 수 있는 하느님의 계약 성취에 대한 확신에서 오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믿음이 감지될 때 평화와 기쁨은 함께 옵니다. 상황은 여전히 환난인데 믿음에 의해 그 상황이 이겨집니다. 그걸 기쁨과 평화라 하는 것입니다. 뭐 대단한 느낌과 감정과 기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사자가 쇠사슬에 묶여 있다고 해서 그 사자 앞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갈 수 있습니까? 이웃집 개가 쇠사슬에 묶여 있어도 우리는 그 앞을 함부로 지나가지 못합니다. 꼭 그 줄이 끊어질 것 같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는 마귀가 예수님에 의해 결박이 되어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그 마귀는 우리를 절대 할 수가 없어요. 그래도 그 마귀의 포효는 줄에 묶인 사자처럼 우리를 충분히 겁나게 하고 두렵게 만듭니다. 그런데 마치 미궁으로 들어가는 크리스천처럼 앞에서 부르시는 하느님의 부르심 때문에 무서움 속에서도 한발 한발 가보는 것 그것이 담대함입니다. 그리고 그 담대함을 격발해 낸 믿음에서 평화와 기쁨이 나오는 것이고요.

 

오늘 본문도 잘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흩어짐을 예언하신 후에 당신의 외로움과 배신당함이 전제된 상태에서 평안과 담대함을 말씀하시지요? 어떻게 당신이 평화로우실 수 있으셨던가요?

그 어떤 외로움과 배신감과 고통과 환난 속에서도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사실이므로 평화로우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 사실이 담대함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의 실수와 넘어짐이 흩어짐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요한16:32~33) 32 그러나 이제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 두고 제각기 자기 갈 곳으로 흩어져 갈 때가 올 것이다. 아니 그 때는 이미 왔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33 나는 너희가 내게서 평화를 얻게 하려고 이 말을 한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하고 말씀하셨다.

 

32절에 제각기 자기 갈 곳으로 흩어져 갈 때라는 어구가 있지요? 거기에서 제 갈곳이라는 단어는 은신처 혹은 피할 곳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이미 각자가 피할 은신처를 다 마련해 놓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 앞에서는 내가 이제 믿습니다하면서 너스레를 떨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각기 자기의 은신처를 몰래 마련해 놓았을 정도로 겁을 내고 있고 두려워 떨고 있지만 담대 하라 평화로워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려움이나 떨림이나 흔들림이나 공포는 우리 성도들 모두에게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을 이겼다는 그 역사적 사실을 믿는 믿음이 평화요 기쁨이요 담대함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그 사랑 안에 하기만 하면 됩니다.

담대함이나 평화나 기쁨이 없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왜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이렇게 불안한가? 왜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이렇게 자주 흔들리는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끝내 완성의 자리에 세우실 것이라는 믿음이 우릴 이 자리로 이끌어 온 것처럼 결국은 천국입니다.

그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게 담대함이며 그게 평화며 그게 기쁨입니다. 결론으로 우리의 담대함과 평화와 기쁨을 더욱 공고히 다져줄 로마서 한 구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로마8:38~39)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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