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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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글방/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요한 3.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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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9-14 ㅣ No.149726

(신앙상식) 성 십자가 현양축일(9월14일)

(공동번역성서) 2021. 9. 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도란도란글방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요한3.14-17)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4절을 보면 주님께서 광야에서 구리뱀이 들려진 것처럼 자신도 들려져야 한다라고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죠 이 이야기는 민수기 214-9절에 이야기에요

 

(민수21,4-9) 4 그들은 에돔 땅을 돌아서 가려고, 호르 산을 떠나 갈대 바다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5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6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백성을 물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다. 7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하였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8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9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廣野)를 건너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에돔지방을 지나게 되었어요 그런데 에돔 사람들은 치사하게 이스라엘이 자기네 동네를 못 지나가게 막아 버렸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에돔을 둘러서 가야 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여정이 심히 고단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금방 불평을 하기 시작했죠

왜 애굽에 잘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이렇게 고생(苦生)을 시키냐 그러고 모세에게 대들었어요 그때 하느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불뱀을 푸셔서 이스라엘을 물게 했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죠 불뱀이라는 것은 물리게 되면 몸이 불처럼 열이나고 곧 죽게되는 그런 맹독을 가진 뱀이였어요 그래서 불뱀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와서 하느님께 부탁해서 우리를 좀 살려달라고 부탁해라 이렇게 이야기를 했어요 하느님은 모세에 부탁을 들으시고 모세에게 처방(處方)을 내려 주시는데 그 처방이 무엇이였냐하면 구리로 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높이 달고 뱀에 물린 자들에게 그 뱀을 쳐다보도록 하라는 거였어요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죽어가는 사람들이 뱀 때문에 그렇게 된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뱀을 구리로 만들어서 높이 달아서 그걸 보라고 하니까 그 뱀을 순순히 처다 봤을까요? 사람들이 거기다가 그들은 창세기를 이미 모세로 부터 배웠던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짐승도 뱀이였어요 저주와 심판 죄악의 상징이였단 말이죠 뱀은, 그것도 설상가상으로 구리로 만든 거에요 구리는 심판을 상징하는 거였거든요

그러니까 더더욱 그 구리뱀 장대는 홀대를 당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그걸 본 사람들은 살아났습니다. 당시 고대시대에는 뱀에 물리면 고약이나 술 같은 것을 사용해서 치료를 했다 그래요 차라리 그런 비슷한 약방문이라도 써주었다면 그들이 열심히 노력이라도 해봤을 거에요 그런데 전혀 엉뚱하게 구리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달고 그냥 쳐다보기만 하라 그러니까 아주 기가찼던 거죠

 

주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그 민수기에 이야기가 바로 당신이 저주에 구리뱀이 되셔서 저주에 나무인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예표(豫表)하던 것이였음을 본인의 입으로 말씀해 주시는 거에요 내가 바로 그 구리뱀으로 예표된 자다’ ‘내가 들리고 나를 바라보아야 너희들은 거듭날 수 있는거야라고 이렇게 거듭남의 방법을 친절하게 이야기해주시는 거에요

니고데모가 무척 당황했겠죠 그는 할례(割禮)를 받고 제사(祭祀)를 지내는 사람이였고 율법(律法)을 목숨걸고 지켰던 사람이에요 그리고 도덕적 학문적인 숭앙(崇仰)을 받던 그 사람에게 대뜸 너는 거듭나지 않으면 절대 구원받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신 후에 그 거듭남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구리뱀을 바라본 것처럼 장대에 달린 자신을 바라보아야 주어진다고 말씀하시니까 당황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가능성에 절망하고 오로지 눈을 들어서 위에 하느님을 바라볼 때 구원이 주어질 수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마 구약에 능통했던 그 니고데모는 그 민수기 21장을 금방 떠올렸고 민수기 21장에 이야기가 바로 이양반 이야기를 하는 것이구나라고 금방 알아먹었을 거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그 세상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14절에서 들리다라고 번역이 된 그 휩소우리는 단어는 아람어 제캅에서 나온 말인데요 들어올리다, 교수형에 처하다라는 뜻이 있는 반면에 높아지다 영광속에 들어올려지다라는 전혀 반대의 뜻을 한 단어가 갖고 있는 거에요

 

(요한8,28) 28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여기에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 나오죠 이게 휩소우에요

 

(요한12,32) 32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사도5,31) 31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이게 휩소우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휩소우, 들여 올려지다.’ 그러면 장대인 십자가에 척 박히다 교수형에 처해지다 이렇게만 알고 있는데 그 단어는 높이 올려지다. 영광을 받다.’ 이런 뜻도 갖고 있단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어요 이 땅에서 저주의 장대 즉 십자가에 메달리는 것이 바로 그를 하느님께서 높이시는 방법이라는 거에요 그 저주에 장대 위로 올려진다는 것은 나에 세상적 의지가 부수어지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걸 말하는 거죠 그게 십자가잖아요

예수님께서 자기에 선택을 따라 선택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이 시키는 대로 쫒아간게 십자가란 말입니다 그게 장대에 높이 들리는 거란 말이죠 우리는 그렇게 자신을 비우시고 하느님 아버지에 뜻에 순종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에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되는 거구요 그렇게 은혜로 구원을 얻은 자들은 자신도 십자가로 들어 올려지는 삶을 살게 되는 거에요

 

(요한3,15)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저주에 장대위로 들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구원을 얻는 자들을 믿는 자, 영생을 가진 자 이렇게 불러요

그러니까 십자가로 들려 올려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역시 그들 각자의 십자가(十字架) 위로 들여 올려지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구요 성경은 그 삶을 순종(順從)의 삶이라고 부르는 거에요

그들을 15절이 사람의 아들을 믿는 자, 영생을 얻은 자라고 부르는 거에요 그러니 거듭나서 永生을 얻은 자들을 人子를 믿는 자라고 부르는 것이고 그들에 삶을 순종에 삶이라고 부르는 거에요 다 같은 뜻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3장 마지막 절에서 그 믿음을 순종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요 볼까요

 

(요한3,36) 36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

 

믿음과 순종이라는 것을 똑같은 선상에다 놓고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항상 행위 순종을 내포하고 있는 거에요 믿음과 순종이 따로 따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나는 믿음이 있어 그러는데 전혀 변화가 없고 전혀 순종하는 삶이 안 나올 수는 없다는 거에요

 

(로마1,5) 5 우리는 바로 그분을 통하여 사도직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믿음의 순종을 일깨우려는 것입니다.

 

믿으면 순종케 된다는 거에요 순종이 뭐에요 십자가를 지는거, 내가 죽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의 삶이에요 그게

 

(야고1,22-25) 22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23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24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25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죄인들은,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서서 바로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하느님에 은혜를 받고 십자가를 보고 구원을 얻은 자들은 그렇게 살지 못한다는 거에요

새대가리라는 말 아시죠? 제가 그 뜻을 정확히 알았어요 저희집 처마에 새들이 엄청 와서 앉아서 조잘 조잘 대요 그런데 그렇게 조잘 조잘 대는 건 괜찮은데 똥을 싸고 가요 수십마리가,

매일 집이 지저분 해지는 거에요 저걸 어떻게 하나 막 쫓아도 안가요 슈퍼에 가니까 올빼미 인형이 막 쌓여 있더라구요 그래 그거 뭐하는 거냐 그랬더니 이거를 갖다 달아놓으면 새들이 안온대요 설마했죠 사다가 한번 달았어요 그런데 진짜 안오더라구요

그런데 인간들은 더하는 것입니다 거울보고 자기 얼굴이 이렇게 생겼지 그러고 돌아서서 내가 지금 뭘 봤지 그렇다는 거에요 죄인들은 하느님에 말씀을 듣고 바로 돌아서서 잊어버린다는 거에요

 

(야고2.14-2) 14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16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8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대에게는 믿음이 있고 나에게는 실천이 있소.” 나에게 실천 없는 그대의 믿음을 보여 주십시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 19 그대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심을 믿습니까?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마귀들도 그렇게 믿고 무서워 떱니다. 20 , 어리석은 사람이여! 실천 없는 믿음은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싶습니까?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사악을 제단에 바칠 때에 실천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22 그대도 보다시피, 믿음이 그의 실천과 함께 작용하였고, 실천으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에 선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순종이라는 십자가를 열심히 지는 사람들인 거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 15절에 사람의 아들을 믿는 자에 믿는다 피스티온이라는 단어가요 그 피스티오 믿는다 믿다에 현재 분사에요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한데 그 믿음은 현재 분사형에 믿음이라는 거에요 계속해서 발휘되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건, 거기까지가 니고데모에게 주님께서 거듭남에 대해 설명을 하시는 부분이고 이제 16절 부터는 요한이 지금까지에 내용을 요약해서 이제 설명을 하는 대목이에요

요한복음 316절은 절에 있는 스님들도 거의 외워요 그만큼 이 그리스도교에 핵심교리가 그 속에 모두 담겨있는 아주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 구절속에 들어있는 아주 중요한 그 그리스도교의 교의(敎義), 도그마를 크게 인제 두가지로 나눌 수 있어요

 

첫번째 교리가 더 샌딩 포뮬라라는 거에요 보내심에 교리하느님께서 위에서 아래로 당신에 아들을 보내셨다라는 거에요

그것도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닌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아들을 위에서 아래로 보내셨다라는 거에요 이 땅에 있는 모든 종교(宗敎)중에 사람이 섬기는 신이 먼저 인간을 찾아온 종교가 있습니까?

이 땅에 모든 종교는 인간이 자기에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찾아가는 식으로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오직 그리스도교만 하느님이 아들을 보내시는 그런 행식으로 되어 있는 거에요 그게 더 샌딩 포뮬라 보내심에 교리인 거에요 그게 316절 안에 들어있다라는 것이고 그 보내심에 교리 안에는요

하느님에 그 아들에 선재 사상이 들어있는 거고 하느님에 아들이 하느님에 전권대사로서 하느님에 대권을 위임받아서 그분에 뜻을 집행하는 분이라는 내용이 내포되어 있는 거에요 하느님이 보내셨으니까 자기에 권력을 그 아들에게 주어서 보냈을 거 아닙니까 이 샌등 포뮬라가 성립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로서의 그 자격이 없게 됩니다 선재하지도 않았고 아무런 권세와능력도 없는 자가 중보자로서에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없는거니깐요

14절에 아들을 보내셨다 그 보내셨다 아포스텔론은요 내쫒다 유기(遺棄)시키다라는 뜻인 거에요 유기가 뭐에요 가끔 미혼모들이 애 낳고 쓰레기장 같은데다 살짝 갖다 버리죠 그걸 유기라고 한다구요 하느님께서 자기 아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버리셨다라는 거에요 아포스텔 우리에 구원을 위해 하느님으로 부터 그렇게 세상으로 유기되어 버리신 거에요

 

그 두번째 교리(敎理) ‘도그마더 기빙업 포뮬라라고 하는데요 내어줌에 교리 이렇게 번역하면 되겠죠 내어줌에 교리 포기함에 교리 하여튼 기빙 업 포뮬라인데요 하느님은 죄인들을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을 내어 주셨다

 

(로마8,32)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자 이런 것들을 우리가 너무 많이 들어서 별로 감동이 없어요 하느님께서 아들을 보내셨다 유기시키셨다 내어 주셨다 기빙업 기브업 하셨다 이런 말을 들어도 별로 그렇게 감동스럽지가 않아요 이거 참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眞理)에는 너무 둔감해져 있어요 사실 이거 이외에 이거보다 더 우리를 감동(感動)시킬 그런 구절은 사실 성경(聖經)에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우리 눈에는 감사의 눈물이 안 흐르면 안된다 말입니다 그런데 엉뚱한 소리들을 너무 많이 들어와서 그런 진리를 듣고서는 감동이 없어요 어떻게.

거기에 요한이 예수님을 외아들이라고 부르죠 그런데 그 모노게네스라는 말은요 단순히 그 온리 선 외아들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에요 그 단어는 독특한 것 사랑받는 것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것을 나타낼 때 쓰이는 단어에요 하느님께서 이 추악하고 더러운 죄인들을 위해서 하느님에 가장 귀()한 것을 주셨다는 말이에요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는 아비에 마음을 조금 보여주셨어요

 

(창세22,2) 2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여기보면 하느님께서 이사악을 가리켜서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아하브 아쉐르 야히브라고 블러요 너무나 사랑하는 유일무이한 독생자라는 뜻이에요 아하브 아쉐르 야히르 하느님은 아브라함에 이야기를 통해서 하느님에 마음을 교회들에게 조금이라도 알리고 싶으신 거에요

그래서 그 아브라함에 아들 이사악을 가리켜 너무 너무 너무나 사랑하는 유일 무이한 외아들 이렇게 부르시는 거에요 하느님은 그 사랑하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직 원수(怨讐)되었던 자들을 위해 유기(遺棄)시켜 버린 거에요 이 땅으로~

 

(로마3,10-18) 10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11 깨닫는 이 없고 하느님을 찾는 이 없다. 12 모두 빗나가 다 함께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 호의를 베푸는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13 그들 목구멍은 열린 무덤, 혀로는 사람을 속이고 입술 밑에는 살무사의 독을 품는다. 14 그들의 입은 저주와 독설로 가득하고 15 발은 남의 피를 쏟는 일에 재빠르며 16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만이 있다. 17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18 그들의 눈에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우리가 이런 자들이였단 말이죠 그런데 이런 자들을 위해 아들을 유기(遺棄)시켜 버린 거에요

 

(로마5,8-11)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1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자들이였어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러한 죄인들을 먼저 사랑하신 거에요 먼저 사랑은 이렇게 하느님에게서 먼저 흘러나오는 거에요 우리 인간은 하느님에 사랑을 알기 전까지 절대 사랑을 할 수 없어요 뭐 흉내는 낼 수 있어요

그래서 사랑을 말하는 이 요한복음 316절에 그 주어가 바로 하느님인 거에요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어, 사랑에 주어는 항상 하느님인 거죠 거기에는 하느님께서 사랑에 주도권과 선수권을 모두 쥐고 계심이 내포되어 있는 거에요 타락한 인간들에게는요 여전히 하느님에 형상(形狀), 형상의 잔재가 좀 남아있기 때문에 사랑의 흉내를 낼 수 있어요 우리가 인내에 흉내 용서에 흉내 이런 걸 낼 수 있는 거 처럼 사랑에 흉내를 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연보호를 한다 사랑이죠 사랑에 모습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듯이 부모가 자식을 목숨걸고 사랑하는거 사랑에 한 단면이죠 모습이죠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도 그러한 사랑에 모습 사랑에 한 단면 이런 것을 보여줄 수 있다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에 사랑은 결국 자기 중심적이에요 그래서 자기감정에 지배를 벗어나지 못해요 인간의 사랑은 이렇게 한계가 있는 것이죠 수시로 변해요 내가 목숨걸고 사랑했는데 부모 때문에 상처를 받어. 그러나 모든 인간은 다 그렇게 완전한 사랑을 할 수가 없어요

아무리 목숨걸고 사랑하는 부모 자식간에 관계라 할지라도 말이죠 인간에 사랑은 지속적이지 못하고 안전하지 못해요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그 사랑은 죄인들에 사랑은 나라는 울타리를 넘지 못해요 결국은 나로 수렴된다는 거에요

 

에페소서 1장에서는 우리가 창조이전에 택함을 받았다 그러죠 베드로전서 1장에서는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예정되었다 알리신바 되었다 그러잖아요 요한묵시록에서 요한은 예수님이 창세전에 죽었다 그럽니다.

 

(묵시13,8) 8 세상 창조 이래 땅의 주민들 가운데에서, 살해된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은 모두 그에게 경배할 것입니다.

 

여기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되는 하느님에 백성들은 어린양에 생명책(生命冊)에 기록된 자들이다라고 말씀하세요 창세전에 어린양에 생명책에 기록이 된 자들, 그런데 그 어린양의 생명책은 죽임을 당한 어린양에 생명책이에요

그러니까 어린양은 하느님에 그 영원 속에서 이미 창세전에 죽임을 당했다라는 것이죠 그 말은 십자가는 가시적으로 이 역사속에서 2천년전에 골고다 언덕위에 선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창세전에 죽임을 당하시고 역사에 저편에서 그 십자가에 효력을 이 세상으로 뿜어내고 계셨던 거에요 가시적으로 보여지는 건,

물론 2천년 전이지만 그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전에 십자가를 지시고 그 십자가의 효력을 이 전 역사에 뿜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에 십자가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도 전부 예수님에 십자가로 구원을 받은 거에요

그러니까 거기에서 그 사랑에 대상은 단순히 민족적 이스라엘만이 아니다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죠 왜 예수님에 십자가는 창세전에 섰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생긴지는 얼마 안됐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전부터 그 십자가의 효력은 쭉 있어 왔다라는 거에요 주님은 창세전에 구리뱀과 같이 십자가에 달리셨고 그 십자가를 바라본 사람들은 모두 살아난 거에요 아벨이 어느나라 사람이에요 셋은 어느나라 사람입니까 노아는? 하느님 나라 사람이죠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은 전부 이스라엘 사람인줄 알아요 그 사람들은 그런데 구원 받았죠 에녹도 마찬가지에요 그리고 성경(聖經)에 룻이나 라합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족보(族譜)에 올라가 있는 것은 그 예수 그리스도에 십자가에 효력(效力)이 유대인들에게만 국한(局限)되지 않았다라는 것을 계속해서 성경이 피력하고 있는 거에요

그 예수 그리스도에 십자가는 그 유대인들 뿐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을 포함한 모든 세상에 열린 것이였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힌트해 주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하느님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어라는 말이 여기 들어있는 거에요

왜 지금 니고데모에게 유대인 티피컬한 유대인인 니고데모에게 하는 이야기 중에 이 이야기가 나오는 거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너희들뿐만이 아니라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셨다라는 말을 거기다 집어넣고 있는 거란 말이에요 지금 요한이 그 위에서 계속 유대교 형식주의, 잎파리만 무성한 그 형식주의 유대교를 계속 깨고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서 하느님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여 라고 이야기하는 거란 말이에요 거기서 세상 코스모스는 원래 잘 꾸며진 장식이란 뜻이죠 코스모스 거기에서 코스메딕이라는 단어가 나온 거에요 코스모스 하느님께서 요모조모로 잘 꾸미고 조화시켜서 만들어 놓은 아름다운게 뭐에요 우주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단어가 우주에 쓰인 거에요 코스모스 그런데 이 우주에서 우리 인간에게 가장 의미있는 곳이 당연히 지구고 그 지구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세상 코스모스라는 단어가 언제부터인가 적용되게 됐어요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그 세상에 의미는 대부분 하느님과 관계없이 이 지구 이 땅을 살아가는 전 인류를 지칭하는 거에요 그리고 그 세상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오셔서 하느님과 관계있는 자들을 창조해 내시자 그 때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적하는 인류를 지칭하며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과 이렇게 대조하여 사용되었죠 세상, 그리고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 이렇게 대조되어 사용되었잖아요

정말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모든 인류를 사랑하셔서 그 외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을까요? 그렇다면 모든 인간을 다 구원하시기로 작정하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면 성경에 지옥이라는 것이 나오면 안되잖아요 거기에서 무슨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런 말 나오면 안되잖아요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이 꺼지지 않는다 이런 말 나오면 안되잖아요

그래 성경을 보면 지옥에 대한 구절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나와요 성경과 그들에 주장은 모순이 되는 거에요 그들은 하느님에 속성 중에 사랑 뿐 아니라 공의(公義)가 있다라는 것을 놓치고 있는 거죠 그 사랑과 公義가 십자가에서 어떻게 해결되는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일단 전 인류를 위해서 죽여 놓고 이 아들을 믿는 자는 구원해주고 믿지 않는 자는 탈락시켜 버린다? 만약에 한사람도 안믿으면 어떻게 되는 거에요 괜히 죽은 거죠 예수님이 죽은건데 하느님에 아들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죽었는데 아무도 안믿어줘 개죽음 당한거죠

하느님과 예수님이 나중에 만나갖고 머리 글쩍이면서 이럴줄 몰랐다 어떻게 한명도 안믿어주냐? 그게 하느님한테 어울리는 상황입니까?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면서요 그분에 구원이 인간의 선택에 따라 달려 있다면 그분은 도대체 그 전지전능함을 어디다 쓰시는 분이냐 말입니다

성경(聖經)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아요 예수님은 전 인류를 위해 오셔서 죽은 것도 아니고 일단 전 인류를 위해 죽어 주셨다가 아무도 안믿어 주면 그냥 없던 걸로 해버리면 그런 허탈한 일을 하러 오신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창세전(創世前)에 택해진 어떤 사람들만을 위해서 오신 오셨더는 거라구요 이 땅에 하느님은 하느님의 백성들만을 위해 그들이 이 땅에 있기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요한17,6) 6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뽑으시어 저에게 주신 이 사람들에게 저는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냈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세상 전체가 아니라 세상 중에서 네게 주신 사람들에게~

 

(요한17,9) 9 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요한17,14-16) 14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5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16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에 관심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자들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어떤 한 무리에게만 있죠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만을 위해서 오셨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단 말입니다

 

(요한15,19) 19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전 인류인 세상을 위해서 오셨다면 왜 제자들보고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하겠어요? 분명 하느님은 세상에서 건짐을 받은 선택을 받은 자들만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거에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 요한복음 316절에서 쓰인 하느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요한은 가나에 혼인잔치와 성전 파괴사건 그리고 니고데모의 이야기로 은혜의 복음을 이렇게 전개해 나가면서 하느님은 겉으로 들어나는 그런 형식적인 인간들에 열매를 보고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준비하신 세상을 향한 사랑으로 그분에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다라는 그 복음에 핵심을 던지고 있는거란 말입니다.

그렇게 여전히 죄인이였고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한 세상을 향한 사랑을 묘사하기 위해 요한은 거기서 감탄문을 쓰고 있어 요한 316절을 헬라어로 보면 후토스 가르 에게페센이에요 직역하면 ! 이 얼마나 큰 사랑인가에요 히브리인들은 어떤 것을 강조할때 감탄문을 써서 사용하죠

하느님에 그 크신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 요한은 감탄문을 써서 그 사랑을 표현해요 오 이 얼마나 큰 사랑인가 우리가 이런 감탄을 해야 된다니깐요 성경을 보면서 히브리서 13장에 나오는 도대체 예수님께서 끌려 나가신 영문 밖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인가를 제가 성경에서 쭉 찾아왔어요 그런데 정말 그곳은 더럽고 끔찍한 곳이에요

영문 밖은 바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이 세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여기서 죽으셨대니깐요

거기는 때려죽인 시체들 갖다 버리는 곳, 살인자를 갖다가 때려죽이는 곳, 똥갖다 버리는 곳, 부정한 것들 갖다 버리는 곳, 문둥병자들 쫓아내는 곳. 그 영문 밖이에요

()밖 예수님이 그리로 내려오신 거에요 뭐하러? 그 부정한 것들, 또 살인자, 맞아 죽은 시체, 문둥병자, , 이게 누구에요 우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자리에 오셔갖고 우리 대신에 살인자가 되시고 문둥병자가 되시고 부정한 것이 되셔서 똥이 되셔서 거기서 죽은 거에요 예수님이, 하느님에 아들이, 나를 위해, 이게 믿겨지면 우리들은 복음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계신 거에요

그게 믿겨진다면 예수님이 나를 위해 똥이 되셨다 하느님 천지를 창조하신, 이 천지는 그분을 위해 존재하는 건데 그 하느님이 나같은 이 더러운 배설물(排泄物)같은 나를 위해 이 땅에 내려오셔서 똥이 되서 죽은 거에요 영문 밖에서~

그 사랑을 우리가 성경에서 보면서 오호호 이 얼마나 이 얼마나 큰 사랑인가!’ 이 요한과 같은 이런 감탄사를 내 밷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게 정말 우리에게 이해가 되어 진다면~,

그런데 나를 위해 똥이 되어 죽으신 그 예수님 앞에 가서 병 안고쳐 준다고 개지랄들 떨고 있는게 이게 말이에요? 부자 안 만들어 준다고 거기서 투정부리고 있는게 이게. 아니 나 대신 문둥병자가 되셔서 똥이 되셔서 부정한 자가 되서 살인자가 되서 죽으신 그 예수의 십자가 앞에 가갔고 무슨 기적을 더 보여달라고 그러는 거에요 거기에서 그거 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있습니까 예?

 

하느님께서 호세아를 불러서 얘야 너는 내 역할을 하고 고멜에게 이 세상에 교회 하느님에 백성들에 역할을 맏겨서 드라마를 한번 만들어 보자 그러시는 거에요 너는 가서 그 고멜에게 청혼을 하거라 그리고 하느님이 큐 싸인을 딱 주는 거죠 그래서 호세아가 고멜에게 찾아가서 창녀 고멜에게 찾아가서 결혼해주세요

호세아는 눈이 없습니까 체면이 없습니까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 하느님이 시키니까 해야 되는 거에요 창녀한테 가서 결혼해주세요 그는 예언자였잖아요 그 창녀가 이거 왠 떡이야 얼른 결혼했죠 그래서 그 아이까지 셋이나 낳았는데 계속해서 바람을 펴요

그때 하느님께서 호세아에게 어떻게 까지 시키냐 하면 그 바람피고 있는 고멜에 남자친구에게 먹을 것까지 갖다 줍니다 나중에 그러죠 그거 다 내가 갖다 준거였는데 이 여자는 그게 지 남자친구가 준건줄 알았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렇게 까지 한거에요

그런데 결국은 단물 다 빠지고 나니까 버려졌어요 이 여자도 그 쾌락이 영원히 지속될줄 알고 계속 남자 바꿔 가며 바람폈는데 인제 늙고 쭈글쭈글 해졌겠죠 단물 다 빠지니까 다 버렸어요 그래서 노예시장에 팔려갔습니다 당시 노예시장은요 노예들을 빨가벗거 놓고 값을 경매로 매겼다고요 죄를 짓고 하느님으로 부터 숨어 버린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에 모습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고멜이. 그 때 호세아가 찾아가죠 그 여자가 발가벗겨져서 수많은 사람들앞에서 팔리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 여자가 어딜 쳐자봤겠습니까 땅바닥만 쳐다보고 있었겠죠 부끄러워서,

뭐 그렇게 단물 다 빠진 그 노예를 비싼 값 주고 누가 사가겠습니까 싼 값으로 은 한냥 두냥 나왔겠죠 그런데 갑자기 저 쪽에서 은 열다섯냥 보리 한 호멜 반 보리 한 호멜 반은 열다섯 냥이라 그랬어요 은 삼십냥 부른 거에요 누가,

그러니까 깜짝 놀랬겠죠 누가 나같은 걸 은 삼십냥으로 사갈려고 할까 하고 딱 봤더니 자기가 그토록 괴롭혔던 그 남편이 자기를 사갈려고 고운 옷을 준비해놨고 은 30냥이라는 거액을 갖고 와서 자기를 사는 거에요 그리고는 그 아내에게 부탁합니다 이제는 내가 널 샀으니까 음행하지 말어 그러지 않습니까 그거에요

30냥에 우리들을 예수가 사시지 않았습니까? 그 은 30냥은 출애굽이 2장에서 뭘 상징하는 거였어요 생명에 대한 속전이였잖아요 소가 누구를 받아 죽이면 은 30냥 내라였단 말입니다 그 은 30냥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안다면 우리는 창녀 고멜보다 더 수시로 배반하는 자들 아닙니까? 그런데 하느님이 찾아오셔서 그 벌거벗겨진 부끄러운 자들 그 자들을 사겠다고 자기가 은 30냥이 되셔갖고 은 30냥에 팔려갖고 자기가 뻘거볏거 져갖고 온 천하 세상 사람들이 보는 언덕위에 그 십자가에 매달려 버린 거에요 그게 호세아와 고멜의 이야기입니다

그게 우리와 하느님에 이야기구요 그래 그 사랑 앞에서 뭘 더달라고 그러는 것입니까? 하느님이 우리와 결혼을 하시면서 호세아서에 나오죠 하느님은 지참금으로 우리에게 하느님에 성품을 주세요 우리에게 돈주지 않고 건강주지 않습니다 하느님에 성품을 지참금으로 주신다니깐요 하느님에 자녀가 되는 순간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돈을 얻어 낼려고 하면 안되요 만사 형통 일사천리 이런 거 얻어 낼려고 하면 안됩니다.

 

(호세2,19-25) 19 나는 그 여자의 입에서 바알들의 이름을 치워 버리리니 그 이름이 다시는 불리지 않으리라. 20 그날에 나는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하늘의 새와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것들과 계약을 맺고 활과 칼과 전쟁을 이 땅에서 없애 버려 그들이 편안히 자리에 누울 수 있게 하리라. 21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 22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23 그날에 내가 응답하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리라. 24 땅은 곡식과 햇포도주와 햇기름에 응답하고 그것들은 이즈르엘에 응답하리라. 25 나는 그를 이 땅에 심고 로 루하마를 가엾이 여기리라. 또 내가 로 암미에게 너는 내 백성이다.” 하고 그는 저의 하느님!” 하고 말하리라.

 

보세요 뭘 줘요 정의(正義)와 공정(公正)이라는 거에요 은총(恩寵)과 자비(慈悲)와 진실(眞實)함 이거를 지참금으로 우리에게 주신다라는 거에요 그래서 하느님에 사랑을 입어서 거듭나게 된 사람들은 하느님에 성품을 조금씩 드러내며 살게 되어 있는 거에요 우리는 이 땅에서 그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에 노력(努力)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은혜(恩惠)로 우리에게 주어져요 이렇게 모든게 주어진다구요 그런데 왜 안나오느냐 이 시퍼런 나의 옛 자아가 그걸 막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그 옛 자아를 죽이는 거에요 그때에 하느님이 나에게 쏟아 부어주신 그 은혜 하느님에 성품들이 밖으로 튀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내가 죽는 거에요

그래서 광야에서 60만명이 다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죽기 위해 이 땅을 살아가는 거에요 그래서 즈가리야서에 보면 하느님께서 하느님에 목자를 치시므로 내 백성들이 나에게 돌아오게 되는데 3분의 1만 돌아오게 된다 그래요 3분의 2는 다 죽고 그런데 고 3분의 1을 하느님이 그때부터 요렇게 받들어 갖고 일사천리 만사형통으로 데리고 가는게 아니라 불속에 던져 넣어 버리시겠다 그런다니깐요 볼까요

 

(즈가13,7-9) 7 “칼아, 나의 목자를 거슬러, 내 동료를 거슬러 깨어 일어나라. 만군의 주님의 말씀이다. 너는 목자를 쳐서 양 떼가 흩어지게 하여라. 나도 손을 돌려 그 새끼들을 치리라. 8 주님의 말씀이다. 온 땅에서 삼분의 이가 잘려 죽고 삼분의 일만 살아남으리라. 9 나는 그 삼분의 일을 불 속에 집어넣어 은을 정제하듯 그들을 정제하고 금을 제련하듯 그들을 제련하리라. 그들은 나의 이름을 부르고 나는 그들에게 대답하리라. 나는 그들은 나의 백성이다!’ 하고 그들은 주님께서는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하리라.”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 불속으로 들어가는 거에요 낙원으로 들어가는게 아니라 불속으로 들어가는 거에요 그래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게 된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래야 그들을 가리켜 내가 내 백성이라 부를거라고 하지 않습니까

성경(聖經) 어디에 예수 믿으면은 만사형통(萬事亨通) 일사천리(一瀉千里)라고 소원성취(所願成就) 해준다고 그런 구절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구원(救援)받는 순간 불속으로 던져지게 되고 거기에서 나에 옛것들 태워가는 거에요 그걸 환란(患亂)이라고도 하고 고난(苦難)이라고도 하고 시험(試驗)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이 고단한 거에요 왜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성품이 그 불속을 통과해야만 드러나게 되거든요 그 기고만장한 고집 못된 성품 모난 성격 불속에 들어가서 태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많은 환란과 고난을 통과한 그런 사람들 보면은 의젓하잖아요 그렇지 못한 사람들 보면 어딘가 모르게 방정맞아 촐싹대고 그렇지 않아요? 이건 성경에 일관성 있는 그런 진술이지요

우리들을 가리켜 손가락질하는 그들이 바로 대적(對敵)인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핍박하고 부끄러움을 주고 창피를 줄때 하느님께서 증거자료를 증거화면을 낱낱히 찍고 계시는 거에요 나중에 심판대에서 딱 보여 줄려고, 너희가 바로 이렇게 내 대적에 행위를 그 땅에서 하지 않았느냐 이렇게,~

그러니까 ()죽을 필요도 없어요 그렇다고 기고만장(氣高萬丈)할 이유도 없고 그 역할 속에서 열심히 가는 거에요 우리 성도(聖徒)는 그렇게 내 것을 세상에 힘으로 갖고 있는 것을 자꾸 이 땅에서 태우는 거에요 불속에 들어가 그리고 나중에 하느님만 붙들고 하느님이 주신 그 하느님에 성품 드러내며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거 말고 뭐 딴걸 바라시냐구요 예? 오늘 결단하십시오 성품 인격 그 힘갖고 남 밟고 험담하고 불평하는데 쓰시겠어요 우리가 선택하고 오늘부터 그 선택한 삶을 열심히 경주하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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