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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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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14.연중 제32주간 금요일
지혜13,1-9 루카17,26-37
관상 신비의 삶 “무지에 대한 답은 지혜뿐이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예기하고, 창공은 그 손수하신 일을 알려 주도다.”(시편19,2)
예나 이제나 변함이 없는 것은 인간의 무지입니다. 아마도 인간의 숙명적 본질같습니다. 문명의 야만이라할 일이 비일비재 일어납니다. 도대체 무지에는 답이 없어 보입니다. 그나마 늘 깨어 노력하는 관상적 지혜로운 삶이 답이 되겠습니다. 옛 현자의 가르침도 좋은 참고가 됩니다.
“옛 어른들은 항상 삼가고 번민했기에, 오히려 근심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다산> “군자는 평온하고 너그럽지만, 소인은 늘 근심하고 두려워한다.”<논어>
늘 깨어 있는 자기훈련에 철저해야 함을 배웁니다. 레오 14세 교황의 어제 가르침도 좋은 깨달음이 됩니다.
봉쇄 아우구스티노회 관상 수녀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참 기쁨은 그리스도와의 친교 안에 있다.” <신비주의, 신비적 현상, 그리고 거룩함>이란 주제로 모인 참가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신비생활의 핵심에는 하느님의 사랑과의 일치가 있다. 참 목표는 언제나 하느님과의 친교에 있다. 성인들의 삶을 평가할 때 바로 균형의 중요성이다.”
물질만능의 야만적 탐욕의 눈먼 자본주의사회에서 관상신비생활에 대한 관심이 점증하는 현실을 반영합니다. 인공지능에 대한 교황의 말씀도 좋은 참고가 됩니다.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은 AI의 조작에 상처받기쉽다. 보호는 정책들에 환원될 수 없다. 그것은 디지털 교육을 요구한다. AI이 위협이 아닌 협조자로서 봉사하도록 보장해야만 한다.”
정말 심각해진 AI의 영향입니다. 흡사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느낌입니다. 새삼 신비관상생활이 절박한 시대의 요구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오늘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반복되는 인간 무지의 현실을 반영합니다. 제1독서 지혜서는 <자연숭배의 어리석음>을 일깨웁니다.
예나 이제나 똑같이 반복되는 인간무지의 현실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자 지혜의 원천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AI(인공지능)이 아니라, 살아 계신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뿐이요 하느님 없이 인간은 결코 무지의 어둠과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그 안에 들어 찬 사람은 본디 아둔하여 눈에 보이는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시는 분을 보지 못하고,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만든 장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세상 모든 것들 다 알아도 <하느님>을 모르면 결코 겸손할 수 없고 똑똑한 바보, 참으로 무지의 눈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어지는 지혜서의 말씀도 참 엄중합니다. 무지를 일깨우는 죽비소리처럼 들립니다.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보아 그 창조자를 알 수 있다...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 하도 아름다워 그 겉모양에 정신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결코 무지에 대한 책임에서 그 누구도 면제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라면 하느님 공부와 참나의 공부는 최우선 평생공부입니다. 우리는 테야르 샤르댕이 말했듯이 신적 세계에, 모든 것이 하느님의 손길로 닿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숨쉬고 있는 공기와 같습니다. 하루를 보내면서 이를 의식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선물이며 평화의 원천입니다.
시인 제라르 멘리 홉킨스는 “가장 소중한 신선함은 사물의 깊은 곳에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빛이신 하느님을 모르니 무지의 어둠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잊고 육적 탐욕의 현실에 눈먼 무지의 실상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복음입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은 모두 멸망하였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물과 불에 의한 멸망이요 다음은 무엇일까요? 기후위기와 더불어 불길한 조짐이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이것은 위협이 아니라 경고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깨어살라는, 주님과의 친교를 회복하여 신비적관상의 지혜로운 삶을 살라는 경고입니다. 이렇게 주님 안에서 깨어 사는 관상적 지혜의 삶이라면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어지는 말씀 역시 우리 모두를 향합니다.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세상 재물에 집착하여 뒤돌아 보다가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를 반면교사로 삼아, 늘 하느님을 바라보며 무욕과 이탈의 초연한 자유로운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환경중에도 천국을 사는 이도, 지옥을 사는 이도 있음을 다음 일화가 보여줍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주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주님 안에서 <깨어 있던> 자와,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죽어 있던> 자의 차이일입니다. 주님과 제자들이 주고 받은 문답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영원한 화두처럼 들립니다.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제자들의 물음에 주님은 직답을 피하고 화두같은 답을 주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여든다.”
버림받은 이들에 따르는 피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심판을 보여줍니다. 역시 하느님을 잊고 눈먼 무지의 삶으로 스스로 자초한 심판입니다. 천망회회 소이불루(天網恢恢疎而不漏), 하늘의 그물이 엉성한 듯 해도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뜻으로 아무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는 노자도덕경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죽음을 통과해 새 생명으로 시작할지는 은총과 더불어 우리 자신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그러니 무지에서 벗어나 주님 안에서 깨어 지혜로운 관상 신비의 삶을 살도록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의 계명은 올바르니 마음을 즐겁게 하고, 주님의 법은 환하시니 눈을 밝혀 주도다.”(시편19,9).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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