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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9일 수원교구 묵상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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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신부님_"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18,14)
'작은 이들을 향해 있는 예수님과 성모님!'
오늘 복음(마태18,12-14)은 '되찾은 양의 비유'입니다.
작은 이들, 곧 가난한 이들, 죄인들, 보잘것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오시는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로 간택되신 성모님도 보잘것없는 나자렛 시골 처녀였습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보잘것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발현하셨습니다.
12월 9일인 오늘은 '멕시코의 어머니 과달루페 성모님'께서 '후한 디에고'에게 발현하신 날입니다. 후한 디에고(57세)는 가난한 인디언이었습니다.
'프랑스 루르드 성모님'도 가난한 시골 소녀 '베르나데트(벨라뎃다.14세)'에게 발현하셨고, '포르투칼 파티마 성모님'도 세 어린 목동들인 '루치아(10세), 프란치스코(9세), 히야친타(7세)'에게 발현하셨습니다. 그리고 '벨기에 바뇌 성모님'도 당시 냉담자였던 소녀 '마리에트 베코(12세)'에게 발현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도구로, 하느님 구원 사업에 도구로 선택된 사람들은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모든 이에게 모든 것(Omnibus Omnia)'이 되려고 오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양 백 마리 전체를 위해 오신 분'이십니다. 때문에 예수님에게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마태18,13)
사회교리의 핵심 가치는 '공동선과 연대성의 원리와 보조성의 원리'입니다. 이는 '우리 주위에 잃어버린 양의 모습을 하고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관심을 갖자는 것'입니다. '함께 행복해지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함께 노력합시다!
(~ 에즈4,5)
전삼용 신부님_그렇게 자녀가 되어간다
태양 형제, 달 자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남긴 아름다운 기도문 태양의 찬가를 아십니까? 그는 이 노래에서 태양을 형님이라 부르고, 달과 별을 누이라 부릅니다. 심지어 바람과 불, 물과 땅, 그리고 죽음조차도 형제자매라고 불렀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는 미치광이거나 시인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무생물인 해와 달과 형제가 될 수 있습니까? 하지만 프란치스코에게 이것은 문학적 비유가 아니었습니다. 뼈에 사무치는 영적 실재였습니다.
그가 깨달은 진리는 단순했습니다. "나를 만드신 분도 하느님이고, 저 태양을 만드신 분도 하느님이다. 우리는 한 아버지에게서 난 한 식구다." 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자, 아버지가 만드신 모든 피조물이 남이 아니라 내 형제요 자매로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자녀가 되어가는 첫걸음입니다.
생명에 대한 외경: 이 마음을 가졌던 또 한 명의 인물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성자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입니다. 그는 밀림 속에 병원을 지을 때, 인부들이 땅을 파다가 개미 떼를 발견하면 공사를 멈추게 했습니다. 그리고 개미들이 안전하게 이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길을 돌아가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까짓 벌레가 뭐라고 공사를 지체합니까?"라고 불평했습니다. 하지만 슈바이처는 말했습니다. "나는 살려고 하는 생명들 가운데서 살려고 하는 생명입니다." 그가 개미를 밟지 못한 것은 개미가 귀여워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작은 생명 안에 깃든 창조주의 숨결, 즉 아버지의 서명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자연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자기 가족을 사랑합니다. 사랑은 이렇게 가장 먼 곳(하찮은 미물) 에서부터 가장 가까운 곳으로 흘러들어와 완성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 가족만 사랑하는 사람은 이기심에 갇혀 타인과 자연을 파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당에서 서로를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정말 옆에 앉은 분을 내 형제처럼 여기십니까? 우리는 너무나 무관심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직 하느님을 온전한 아버지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으니, 아버지가 만드신 작품들도 소중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화] 낡은 바이올린을 선택한 집사 여기, 진짜 자녀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녀 없이 병들어 죽어가던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외아들은 이미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였습니다. 임종을 앞둔 주인은 평생 자신을 위해 일해 준 식솔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다 모아놓고 말했습니다. "내가 떠나기 전에 너희에게 선물을 주고 싶다. 이 집에 있는 귀중한 물건 중 딱 하나씩만 골라 가져가거라."
사람들의 눈이 반짝였습니다. 그들은 앞다투어 가장 비싼 물건들을 집어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수천만 원짜리 그랜드 피아노를 찜했고, 어떤 사람은 최신형 전자기기를, 어떤 사람은 대리석 식탁을, 어떤 사람은 금고 속에 있던 패물을 챙겼습니다. 모두가 '돈이 되는 것'을 골랐습니다.
그런데 가장 나이 든 늙은 집사는 구석에 먼지가 뽀얗게 앉은 낡은 바이올린 케이스를 집어 들었습니다. 줄도 끊어지고 볼품없는 악기였습니다. 주인이 의아해하며 물었습니다. "아니, 자네는 왜 하필 그 쓸모없는 것을 가져가려나? 저기 금송아지도 있는데." 늙은 집사는 바이올린을 소중히 품에 안으며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주인어른, 이 바이올린은 먼저 떠난 도련님께서 생전에 가장 아끼시던 것입니다. 도련님이 이것을 켜실 때 주인어른께서 얼마나 행복해하셨는지 저는 기억합니다. 저는 도련님이 너무나 보고 싶고, 그분을 사랑했던 주인어른의 추억을 간직하고 싶어서 이것을 택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주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주인의 '재산'을 사랑했지만, 이 노인만이 주인의 '마음'을 사랑했고 주인이 사랑했던 '아들'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주인은 변호사를 불러 유언장을 고쳤습니다. "내 전 재산을 이 집사에게 상속한다. 그가 내 아들을 기억하는 유일한 가족이기 때문이다."
[복음]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가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흔아홉 마리 양을 남겨두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는 목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세상의 계산법으로는 바보 같은 짓입니다. 1마리보다 99마리가 더 비싸니까요. 하지만 하느님 아버지께는 그 한 마리가 그냥 '가축'이 아닙니다. 당신이 직접 빚어 만드신, 대체 불가능한 '자식'입니다.
우리가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길거리에 쓰러진 노숙자, 나에게 상처 준 이웃, 성당에 나오지 않는 냉담 교우... 그들은 낡은 바이올린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가치가 없다고 버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아버지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 안에는 아버지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핏값이 서려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면, 아버지가 아끼시는 그 낡은 바이올린을 쓰레기통에 던질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그것이 바로 자녀의 마음입니다.
[결론] 벤야민을 잃으면 아버지가 죽습니다 구약 성경의 요셉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형들은 과거에 요셉을 시기하여 노예로 팔아넘겼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식량을 구하러 이집트에 왔을 때, 요셉은 형들을 시험합니다. 막내 벤야민을 도둑으로 몰아 잡아두려 한 것입니다. 그때 과거에 요셉을 팔자고 주도했던 유다가 나섭니다. 그리고 요셉에게 무릎을 꿇고 애원합니다.
"나리, 제발 저 아이를 보내주십시오. 저 아이가 돌아가지 않으면 제 아버지는 슬픔으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아버지의 목숨과 저 아이의 목숨은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차라리 저를 종으로 삼으시고 아이는 보내주십시오."
유다는 벤야민을 끔찍이 사랑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벤야민을 잃으면 겪게 될 '아버지의 고통'을 알았기에, 아버지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 요셉은 방성대곡하며 형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입니다. 유다가 비로소 아버지의 참된 아들이 되었음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신앙생활은 이렇게 자녀가 되어가는 과정입니다. 내 눈에 보기 좋은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아직 남입니다. 하지만 내 눈엔 별로여도, 아버지가 사랑하시기에 나도 소중히 여기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오늘 여러분 곁에 있는 타인을 바라보십시오. 그가 바로 아버지가 찾고 계시는 잃어버린 양이고, 주인이 아끼시는 낡은 바이올린입니다. 그를 소중히 여기십시오. 그러면 아버지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상속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태 18,12-14: 목자와 길 잃은 양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는 착한 목자의 비유를 전한다. 주님은 단순히 아흔아홉을 지키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시고,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기 위해 끝까지 나아가시는 분이시다.
성 이레네오는 아담의 타락을 이 비유와 연결하며 이렇게 말한다. “잃어버린 양은 바로 인류 전체이다. 하느님은 잃어버린 아담을 다시 찾아 구원의 길로 데려오셨다.”(Adversus Haereses III,23,8) 아담은 무리에서 벗어난 길 잃은 양이었고, 그 결과 인류 전체가 하느님에게서 멀어졌다. 그러나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죽음에 빠진 우리를 어깨에 메고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오신다.
성 치프리아노는 이렇게 말한다. “주님께서는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위해 기뻐하시며, 그의 회개가 온 하늘의 기쁨이 된다.”(De Lapsis 36) 이것은 단순한 수학적 비율의 문제가 아니다. 아흔아홉과 하나의 비교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는 특히 상처받고 잃어버린 자에게 더 기울어지는 사랑임을 보여준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며,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셨다.”(605) 이 말씀은 단지 목자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사명을 보여준다. 즉, 교회는 잃어버린 사람을 찾고, 소외된 이를 포용하며, 구원의 문을 누구에게나 열어야 한다. 교회의 지도자뿐 아니라, 모든 신자가 이 목자적 마음을 지녀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비유를 묵상하며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길 잃은 양이었고, 그분은 나를 어깨에 메고 돌아오셨다. 나는 내 힘으로 돌아올 수 없었으나, 그분의 사랑이 나를 찾으셨다.”(Sermo 46,18) 우리는 종종 스스로 아흔아홉 마리 안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언제나 길을 잃는 한 마리 양이며, 늘 주님의 자비가 있어야 하는 존재이다. 주님께 돌아온 뒤에는 책망이나 심판이 아니라, 오직 기쁨만이 있다. 이것이 하느님 사랑의 본질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세 가지를 일깨워준다. 1. 인류 전체는 길 잃은 양과 같았지만,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2. 하느님의 사랑은 특히 상처받고 멀어진 자에게 더 큰 기쁨으로 드러난다. 3. 우리 자신도 늘 잃어버린 양임을 기억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서로에게 목자가 되어야 한다. 회개한 이를 조건 없이 받아들이고, 신앙의 위기에 처한 이웃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기쁨이 완성될 것이다.
김건태 신부님_길 잃은 양
마태오 복음저자는, 이 비유 이야기를 전하면서,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애씀보다는 양을 되찾은 기쁨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마태오에게 하느님은 길을 벗어난 양을 되찾기 위해 애쓰신 노고를 마다하신 채, 그 양을 되찾으심으로, 곧 우리를 용서하심으로 기뻐하시는 분으로 자리하십니다. 결국, 마태오는, 하느님은 늘 길 잃은 양과 같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당신 사랑으로 우리를 보고 계신 분으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우리는 당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시기까지, 당신의 독생 성자를 사람으로 이 세상으로 보내시고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구원하시기까지 되찾을만한 가지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오시는 성탄을 준비한다는 것은 이처럼 믿음의 차원에서 하느님의 눈으로 우리 자신과 이웃을 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성부께서 베푸시는 무한한 자비의 경이로운 걸작입니다. 우리가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오늘도 당신 자비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 모두 당신의 아름다운 작품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바람, 이러한 하느님의 호소는 특별히 대림시기에 더욱 깊이 깨닫고 응답해야 할 과제입니다.
이 비유 이야기는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확언으로 끝맺음합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성부께서는 모든 이가 구원되기를 바라시며, 특별히 작은 이들이 구원하는 당신 사랑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성탄은 누구보다도 작은 이들, 우리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축제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또는 우리 주위에서, 올 성탄 축일이 진정 그러한 축제일지 아닌지는 우리 각자의 다짐과 노력과 실천에 달려 있는 현실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길 잃은 양을 찾아 저 하늘 높은 곳에서 이 땅 밑바닥을 내려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면서,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 힘들어하는 작은 이들을 도와 그들과 함께 성탄을 준비하는, 거룩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송영진 신부님_<우리 쪽에서도 ‘되찾은 양’이 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2-14).”
1) ‘되찾은 양의 비유’는 “회개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구원받는 것을 크게 기뻐하시는 분이고,
동시에 구원받지 못하고 탈락하는 사람들 때문에
크게 슬퍼하시는 분입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는 하느님의 그 ‘큰 기쁨’과
‘큰 슬픔’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회개는 구원받을 자격을 얻기 위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큰 기쁨을 드리는 일입니다.
따라서 ‘되찾은 양의 비유’는,
“회개하고, 끝까지 충실하게 노력해서, 구원을 받음으로써
하느님께 큰 기쁨을 드려라.” 라는 가르침이고,
간단하게 줄이면 “회개하여라.”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잃은 양’을 찾아 헤매는
‘착한 목자이신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고 있다고 해도,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
돌아가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즉 회개하지 않으면,
‘예수님은 착한 목자’ 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소용도 없는 것입니다.
실제 삶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아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입니다.>
2) ‘되찾은 양의 비유’에서 ‘아흔아홉 마리’는 양을 잃은
목자의 슬픔과, 잃은 양을 되찾은 목자의 기쁨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뿐이고, 그 이상의 특별한 뜻은 없습니다.
메시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원래는 ‘모든 사람’이 ‘잃은 양’이었다는 것입니다.
<‘잃은 양’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3) 냉담 중인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기 발로 목자에게
되돌아가려는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목자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실행해야 할 ‘의무’가 아니라, ‘자비’입니다.
냉담 상태는 목자에게 찾아오라고 요구할 권리가 아닙니다.
<목자에게 찾아오기를 ‘간청’하는 것과 찾아오라고
명령하듯이 ‘요구’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이라면, 목자가 찾아오는 것을
미안해하고, 고마워하고, 기뻐하고, 반가워하는데,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미안해하지도 않고,
고마워하지도 않고, 목자를 반가워하지도 않습니다.
회개는 스스로 해야 합니다.
목자가 회개를 대신 해 줄 수는 없습니다.>
4)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모든 신앙인은 ‘잃은 양’에서
‘되찾은 양’으로 변화된 사람들인데, 그 ‘변화’에 초점을
맞추면 가장 대표적인 예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박해자 사울’을 부르신 일은(사도 9,4),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 나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울’이 부르심을 받자마자 곧바로 응답하고
‘바오로 사도’가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갔다.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사도 9,8-9).”
아마도 사울은 사흘 동안 자신의 체험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고 회개했을 것이고, ‘진리’에 대해 깨달았거나,
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얻게 되었을 것입니다.
앞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모르고 살던 그의 삶을
상징하는 것으로, 또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는 것은,
그의 회개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사흘’이라는 기간도 상징적입니다.>
이렇게 사도행전에는 사흘 동안의 일만 기록되어 있는데,
갈라티아서를 보면, 3년의 시간이 더 걸렸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갈라 1,17-18).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만난 뒤에 아라비아의 광야에서
‘3년 동안’ 묵상하고 회개하고 보속하고 기도하면서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한 준비를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세관장 자캐오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응답과 회개와 보속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5) ‘잃은 양’인 ‘나를’ 찾고 부르시는 것은 목자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고 ‘되찾은
양’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내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목자이신 주님’께서 ‘잃은 양’을 찾으신다고 해서
‘잃은 양’이 자동적으로 ‘되찾은 양’이 되는 것은 아니고,
주님의 부르심은 내가 응답하고 노력해야만 완성됩니다.
또 한 번 ‘되찾은 양’이 되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잃은 양’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하고,
‘되찾은 양’으로서 살아가려고 성실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사실 실제 현실을 보면, ‘되찾은 양’이 되었다가
또다시 ‘잃은 양’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대림 제2주간 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병자를 위한 기도
○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앓는 사람에게 강복하시고
갖가지 은혜로 지켜 주시니
주님께 애원하는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성직자분들, 모든 병고로 시달리시는 분들, 돈이 없어서 병원을 찾기 어려운 우리 주변의 불쌍한 환우들의 병을 낫게 하시며
건강을 도로 주소서.
● 주님의 손으로 일으켜 주시고
주님의 팔로 감싸 주시며
주님의 힘으로 굳세게 하시어
더욱 힘차게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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