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6일 (화)
(백) 부활 제3주간 화요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사순 제3주간 화요일 복음묵상

스크랩 인쇄

강만연 [fisherpeter] 쪽지 캡슐

2021-03-08 ㅣ No.145128

 

오늘 복음의 주제는 용서와 그 한계에 관한 것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비유도 너무나도 쉬운 비유라 잘 아는 복음이지만 굳이 이런 정도의 비유이면 그냥 예수님께서 단순하게 직설적으로 말씀을 하실 수도 있으셨을 텐데 굳이 이렇게 하실 이유가 있으셨을까 하는 생각도 한번 해봅니다. 비유를 들기 전에 이미 예수님께서 용서의 횟수를 일흔일곱 번까지라고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하늘 나라의 어떤 임금을 말씀하시는 걸로 봐서는 하느님께서 어떤 성품을 지니셨는가 하는 걸 보여주신 측면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을 바라보는 관점을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다르게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주인에게 초점을 둔다면 하느님의 자비가 무한하다는 것을 나타낼 수가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에 나온 악한 종에 초점을 둔다면 이 종이 우리의 모습과도 같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음이라는 영원한 형벌을 받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저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며 죽음으로써 저희의 죄를 보속해주신 분이신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으로 죄를 사함 받은 몸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주인으로부터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것입니다. 자신이 탕감 받은 빚에 비하면 남이 자기에게 빚진 것에 대해서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가혹한 처사를 하는 것에 주인은 분개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종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잘 아는 복음이지만 강론을 들어서 아는 내용과 막상 묵상글을 작성하면서 오늘 복음을 묵상할 때와는 그 느낌에 확연한 차이가 납니다. 좀 더 범위를 좁혀서 본다면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뿐만 아니라 신앙공동체에서도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살아가는 곳에서는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고 또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남에게 용서를 해야 할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말씀이나 신부님의 강론을 통해서 용서를 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는 있지만 그건 어떤 경우에는 하나의 이론에 불과하지 현실에서는 적용이 어렵다고 치부할 경우도 있습니다. 실제 그런 경우를 종종 그동안 본당 생활을 하면서 봐왔습니다. 이런 모습은 비단 천주교만 그런 게 아니라 개신교에서도 비일비재합니다. 그만큼 쉽지 않다는 겁니다.

 

쉽지 않다고 해서 어물쩍 그냥 넘어가는 식으로 하면 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무한하지만 그것도 우리가 어느 정도는 하느님의 마음에 호응을 했을 때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주인이 악한 종에게 한 말을 보면 그럴지도 모를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겠다고 한 말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모습만 보면 냉혹하다고 할 수 있지만 원래 이전의 모습에서는 한없는 자비의 모습을 보여주신 모습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봤습니다.

 

우리도 주위에 형제자매나 누구에게든 용서를 하지 않으면 우리의 죄값을 탕감 받은 것에 상응하는 대가를 완전히 치를 때만이 다시 죽음을 면할 몸이 될 거라는 생각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신뢰해야겠지만 그 신뢰에 앞서서 우선 자신이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수 있게 그에 합당한 몸과 마음의 자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341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