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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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글방/ 하늘의 생명의 빵 예수 그리스도(요한6:3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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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4-20 ㅣ No.146216

(공동번역성서) 2021. 4. 20. 부활 제3주간 화요일 도란도란글방

하늘의 생명의 빵 예수 그리스도

 

(요한6:31~40)

31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33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34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36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우리는 어제 주님께서 강력하게 금지하신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 성도들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한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은 또 무엇인지에 관해 자세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이란 단순히 세상의 것들을 얻기 위해 하는 일만이 아니라 하느님과 관계없이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 행하는 종교행위까지도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래서 나의 구원을 위한 신앙생활도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일 수 있고, 신앙생활은 나의 구원을 위한 행위로 점철이 되어서는 안 되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성도의 분투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한 일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하느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에 나의 삶의 우선순위를 두고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의 보내신 자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정의를 해 주시는데 그 믿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므로 우리가 해야 할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은 예수를 믿는 믿음을 발휘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의 일에 동참하려면 우리의 삶 속에서 보이는 것들이 자꾸 주어지는 것이 오히려 우리의 믿음의 발휘를 방해할 수도 있는 것 이라고 말씀을 드렸지요? 예수님은 그렇게 인간의 힘과 노력과 열심을 의지하여 이 세상 것들을 얻어내려 하는 거짓 믿음에 대한 경고를 31절 이하에서도 계속해 나가십니다.

 

오늘 본문 31절에서 34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계속해서 썩지 않는 양식과 하느님의 일에 대해 설명을 해 주시는 주님께 모세가 자신들의 조상에게 내려준 하늘의 만나와 같은, 실제적이며 현물(現物)적인 차원의 세상의 빵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또 다시 친절하게 하늘의 빵에 대해 설명을 하십니다. 하늘의 빵은 너희들이 요구하는 세상의 배를 불리는 그런 빵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참 빵을 말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랬더니 그 곳에 있던 유대인들이 그 빵을 항상 우리에게 주세요하고 요구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 대화를 보면서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이 생각나시지요?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하시면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하늘의 생수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내가 다시 물을 길러 이곳에 오지 않을 수 있도록 그 물을 내게 주세요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물을 육적(肉的)인 물로 이해를 했습니다. 그 여인이 필요로 하는 물은 한번 마시면 영원히 목이 마르지 않아 다시는 물을 길러 오지 않아도 되는 신비한 세상의 물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육신의 삶에 편안함을 제공해주는 물이었던 것 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찾아와 빵을 달라고 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처음부터 육신의 배부름에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그들에게 너희가 먹고 배부른 고로 나를 찾아왔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36절을 보면 주님께서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6:36) 36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예수님을 쫓아 온 사람들이 내가 너희에게 줄 빵은 생명을 주는 빵이라고 했더니 그 빵을 우리에게 항상 달라고 말을 했습니다. 언뜻 보면 그들이 세상의 빵이 아닌 생명의 빵을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않는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주님은 하늘의 생명인 영생을 말씀하셨던 것이었는데 그들은 이 세상의 생명에 필요한 빵으로 이해를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영적인 생명을 본 것이 아니라 육신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세상의 힘을, 다른 말로 생존에 필요한 빵을 요구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현대 교회를 향한 하느님의 경고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육적인 생명에 보탬이 되는 어떤 것 정도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긴 믿는다고 하는데 예수를 믿어서 얻어지는 참된 유익인 영생이라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육적인 생명인 생존에 필요한 유익을 하느님으로부터 얻어 내려는 이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었는데도 자기가 기대한 세상적 유익이 주어지지 않으면 가차 없이 하느님을 향해 원망의 화살을 날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그런 것은 믿음 아니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어서 육신의 문제를 해결 받고자 하는 사람들의 믿음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이 다 하느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세상적인 것들은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으로 잘 자라나기 위한 신앙의 여정 동안에 필요한 비용 (expense)으로, 혹 조금 과분하게 주어질 때는 하느님께서 당신이 택하신 청지기들에게 주인이신 당신의 뜻을 잘 분별하여 당신의 뜻에 맞게 요소요소에 잘 전달하라고 맡기시는 것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종교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 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35절을 보면 주님께서 그러한 세상 것을 기대하지 않는 참 믿음에 대해 기막힌 묘사를 하십니다.

 

(요한6:35) 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당신께 나아오는 자, 세상 것들을 기대하지 않는 믿음을 소유한 자들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은 진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 것들이 주어지던 주어지지 않던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 이미 배부르고 목마르지 않는 상태가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믿음만으로 행복하십니까? 정말 예수를 믿는 믿음만으로 만족하세요? 그게 잘 안되지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에게 세상 것들이 부족하게 주어졌다는 것이 인식이 되면 이내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지요 왜 그래요? 주님께서는 분명 내게 오는 이는 결코 배고프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하고 공언(公言)을 하셨는데 우리는 왜 이렇게 수시로 세상 힘에 대해 목이 마르고 수시로 세상 힘에 대해 배고픔을 느끼지요? 우리가 뭔가 잘 못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께 나아가고 어떻게 예수님을 믿어야 우리가 영원한 목마름에서 해갈 될 수 있고 영원한 결핍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까?

앞서 예를 들었던 사마리아 여인에게로 다시 돌아가서 그 여인이 자신의 목마름을 어떻게 해결을 받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겠지요? 그 대화 속으로 다시 돌아가 보지요.

 

(요한4:13-19, 28-29) 13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15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16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17 그 여자가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18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 대로 말하였다.” 19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 28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29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주님께서 영생을 주시는 당신 자신을 가리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라고 소개를 하십니다. 그랬더니 그 사마리아 여인이 자신에게도 그 물을 주어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해 달라고 요구를 합니다. 그 때 주님께서 뜬금없이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여자는 즉시 자신은 남편이 없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 여인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모두 이혼을 하고 지금 어떤 다른 남자와 동거(同居) 중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그 여자의 상황을 정확하게 언급을 하시자 그 여자가 주님을 가리켜 예언자라 불렀고 결국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뛰어가 예수를 그리스도, 즉 메시아로 전했습니다.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내 달렸다는 것은 그 여인은 이제 이 세상의 목마름 같은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뜻은 그 여인은 이제 영적인 생수를 받아 마시고 영생이 주는 시원한 해갈과 영생이 주는 풍성한 배부름을 맛보는 자가 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어떻게 그 여인이 그렇게 바뀌게 되었습니까? 그 여인이 이 세상의 물을 달라고 주님께 요구하는 장면과 물동이를 버려두고 세상의 목마름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가 된 장면 사이에는 한 사건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적인 목마름의 해갈(解渴)에만 관심을 갖고 있던 여인에게 갑자기 네 남편을 데려오라고 말씀을 하심으로 그 여인의 수치스런 실상을 폭로(暴露)하셨습니다. 그 때 그 여인은 예수님의 의도대로 자신의 수치스러운 모습을 비로소 인식을 했고 그에 대한 증거로 예수님을 향해 예언자라 부른것입니다.

그 여인은 그렇게 자신의 수치스럽고 더럽고 추악한 실체를 확인하고 나니 자신의 인생 속에서 정말 해결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이신 예수께 나아오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다른 말로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는 참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만 만족할 수 있는, 환언하면 세상의 물동이를 버린 여자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죄에 물든 타락한 인간의 비참함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생명에 대한 갈급함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께 육신의 편안함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없는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하고 더러운 상태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절실하게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편안함이 아닌 새 생명의 주님께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비참한 지경의 자신에게 그렇게 엄청난 새 생명을 허락하신 예수님 만으로 만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은 죽음의 자리에 서본 사람에게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떠난 자리가 정녕 죽음과 같은 결핍의 자리이며 어두움의 자리이며 추악함의 자리라는 것을 깨달은 자들은 생명이신 예수만을 붙들게 됩니다. 그러한 인간의 비참함을 보지 못한 자들이 참된 희망이신 예수님을 보고 다른 희망을 좀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 그리 나쁜 것인가 하고 이의를 제기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도 믿고 세상의 복도 받는 것이 뭐 그리 나쁜 것 인가?’ 정말 세상의 복이라는 것이 주어지게 되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더욱 공고해 지던가요? 세상의 복이라는 것에는 예수님만을 신뢰해야 하는 참 믿음을 오히려 방해하는 요소가 더 많습니다.

내가 자꾸 세상의 다른 복들을 예수님께 구한다는 것은 예수님 저는 예수님만으로는 만족이 안 되니까 제가 예수님 말고 의지할 다른 것들도 좀 주세요.’라는 불신앙 의 고백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나서 곧바로 세상의 것들을 모두 다 버릴 수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가 정말 구원받기 전의 자신의 비참함과 구원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면 우리 성도의 주된 경향(傾向)이나 특성(特性)이 세상의 복이라는 것을 등지고 예수라는 참 복을 향해 질주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믿고 의지하는 것이 하나 더 추가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오히려 내가 예수 외에 의지하고 신뢰하고 있던 모든 것들을 허물어 버리고 오직 예수만을 붙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예수 이외의 세상 것들은 참 생명이신 예수에게로 향하는 길을 자꾸 가로 막는 장애물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의지하고 있던 세상 것들을 하나하나 놓아 버리고 예수만을 오롯이 붙드는 것을 예수를 믿는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우리의 주된 경향이나 특성이 예수 이외의 다른 세상의 것들로, 예수에게 얻어낼 수 있는 다른 세상의 것들로 우리의 배를 채우기를 원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 죄인들의 비참함이 어떠한 것인지를 자각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며 그런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예수를 통해 주어지는 세상의 힘들을 신뢰하고 믿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받기 전의 자신의 처지에 대해 올바른 자각이 있는 이들만이 세상의 힘들이 주어지지 않아도 예수님만으로 행복하고 예수님만으로 만족하고 예수님만으로 기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35절을 통해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래서 설교자에게서 인간의 죄에 대한 지적과 질타(叱咤)가 빠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가 폭로 될 때 아주 기분 나빠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자신들의 죄가 폭로되고 지적을 당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느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배를 채우고 목마름을 해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반드시 필연적으로세상의 힘을 초개처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 의빵만을 붙들고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추구하게 되고 결국엔 그렇게 완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증거 구절이 35절 과 37절인 것입니다.

지금 읽은 35절에서 주님은 내게 오는 이는 결코 배고프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주님께 나아오는 자들은 모두 예수님만으로 배부르고 예수님만으로 만족하게 된다는 말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힘으로 예수께 나올 수도 있고 안 나아 올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내게 오라는 명령을 하시는 것처럼 말씀을 하실까요?.

 

(요한6:37) 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셔서 주님께 주신 자는 반드시 주님께 나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35절의 말씀처럼 오직 주 예수님만으로 배부르고 오직 주 예수님만으로 행복의 근원을 삼는 이들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라는 생명의 빵과 생수를 먹고 마신 이들은 이제 예수가 그 인생의 최고 목적이 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 이상 이 세상 것들에 연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삶,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고민하며 추구하며 분투 속에 그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구약 성경으로 가서 구약 성경에는 그러한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참 생명의 빵인 예수 그리스도를 먹은 성도들의 삶이 어떠해야하는지가 그림으로 어떻게 설명이 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은 모두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로 수렴(收斂)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영화의 화면이고 신약은 영화의 자막(字幕)이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약은 그림으로 설명된 신약인 것이며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나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에는 어떤 그림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빵이 설명이 되어 있는가?

우리는 참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께 바쳐지는 하늘의 제사를 구약의 성막과 성전에서 제물로 바쳐지는 짐승들을 통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인간의 죄로 인해 성전과 성막에서 하느님께 바쳐진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상징으로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사 중에 짐승을 잡아서 죽이는 제사 말고 곡식으로 빵을 만들어 바치는 제사가 있었습니다. 소제(燒祭)입니다.

이 소제는 일반적으로 번제(燔祭)와 함께 드리는 제사였지만 특별히 소제를 강조해서 명하신 날이 있었습니다. 그날이 바로 첫 이삭 드리는 날이라는 절기와 초실(初實)절이라는 절기였습니다. 레위기 23장에 보면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첫 이삭 드리는 날은 어린양의 대신 죽음으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장자들이 살아난 과월절로부터 삼일 후입니다. 과월절 이후의 첫 안식일 다음날이지요. 그날은 보리가 처음 추수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처음 추수된 보리를 하느님 앞에 빵으로 태워 바치는 날이 첫 이삭 드리는 날인 것입니다.

그 소제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숨어 계신가 보세요. 첫 이삭이 추수가 된다는 것은 첫 이삭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추수된 곡식이 곱게 가루로 빻아져서 빵이 되어야 합니다. 첫 이삭의 수난(受難)과 죽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수난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가 첫 열매가 되어 하느님께 바쳐지는 날이 바로 첫 이삭 드리는 날의 소제에 담겨있는 그림인 것입니다.

 

(요한12:24) 24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날이 바로 과월절이지요? 그 과월절 이후 삼일 째 되는 날이 첫 이삭 드리는 날입니다. 그날 주님께는 부활입니다. 그렇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께 온전히 드려지는 첫 이삭, 첫 열매가 되어 바쳐지므로 많은 열매와 이삭들이 하느님께 열납 되어지게 된 것입니다.

 

(고전15:20~23)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21 죽음이 한 사람을 통하여 왔으므로 부활도 한 사람을 통하여 온 것입니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 23 그러나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 맏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분께 속한 이들입니다.

 

바로 이 그림이 구약의 과월절에 드려지는 어린양과 첫 이삭 드리는 날에 드려지는 소제의 제물에 담겨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고 밀이 처음 추수되는 초실(初實)절에도 하느님은 소제를 특별히 명하셨습니다. 초실절은 밀이 추수가 되는 날이라서 맥추절이라고도 하고 과월절에서부터 50일 째 되는 날이라 오순(五旬)절 이라고도 부르지요. 그 때는 추수한 밀을 하느님 앞에 빵으로 만들어 태워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그 날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제 첫 이삭 드리는 날에 부활을 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었던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성령이 부어져서 예수와 같은 순결하고 온전한 하늘의 빵으로 많은 열매들이 맺혀지는 날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늘의 빵, 생명의 빵은 첫째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고 둘째로는 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늘의 빵으로 부름을 받은 하느님의 백성들에게로 그 역할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의 빵을 상징하는 소제의 빵에는 꼭 들어가야 할 것과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레위2:11) 11 너희가 주님에게 바치는 곡식 제물은 어떤 것이든 누룩을 넣어 만들어서는 안 된다. 어떤 누룩이나 어떤 꿀도 주님을 위한 화제물로 바쳐서는 안 된다.

 

야훼 하느님께 드려지는 제물인 소제에는 누룩과 꿀이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누룩은 빵을 부풀리는 효소입니다. 효소는 부패를 일으키는 재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누룩을 죄를 상징할 때 종종 씁니다. 그리고 꿀은 세상의 힘이 주는 달콤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드려질 수 있는 제물은 부패(썩어짐)의 근원인 죄와 인간들이 하느님 이외의 것으로 행복하기 위해 만들 어 놓은 세상 것들이 배제된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죄와 세상의 허물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빵을 먹은 자들이 바로 그 예수라는 점도 흠도 없는 빵으로 하느님 앞에 보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빵이신 것입니다. 반면에 그 소제의 빵에는 반드시 들어가야 할 것 이 있습니다. 기름과 유향입니다.

 

(레위2:1) 1 ‘누가 주님에게 곡식 제물을 예물로 바칠 때에는, 고운 곡식가루를 바쳐야 하는데, 거기에 기름을 따르고 유향을 얹어,

 

기름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성령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사도10:38) 38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유향은 하느님 앞에 제물로 드려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에페5:2)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이렇게 소제의 제물인 빵은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제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 바로 소금입니다.

 

(레위2:13~14) 13 너희가 곡식 제물로 바치는 모든 예물에는 *소금을 쳐야 한다. 너희가 바치는 곡식 제물에 너희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소금을 빼놓아서는 안 된다. 너희의 모든 예물과 함께 소금도 바쳐야 한다. 14 너희가 주님에게 맏물 제물을 바치려면, 이삭을 불에 볶아 굵게 빻은 햇곡식을 너희의 맏물 제물로 바쳐야 한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 소제에 꼭 들어가야 하는 소금을 가리켜 계약의 소금이라고 부르십니다. 여기뿐만 아니라 하느님은 당신의 언약을 소금 계약, 혹은 계약의 소금이라는 말로 자주 묘사를 하십니다.

 

(민수18:19) 19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님에게 들어 올려 바치는 거룩한 예물들은 모두, 영원한 규정에 따라, 내가 너와 너의 아들들, 그리고 너와 함께 있는 너의 딸들에게 준다. 이는 너와 너의 후손들을 위하여 주님 앞에서 맺은 영원한 소금 계약이다.”

 

(역대하13:5) 5 너희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소금 계약으로, 다윗과 그 자손들에게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권을 영원히 주신 것을 알지 않느냐?

 

왜 하느님은 소제에 들어가는 소금을 가리켜 언약의 소금이라 부르실까요? 이 구절들을 잘 보면 소금 계약이라는 말과 함께 공통적으로 쓰인 단어가 나오지요? 바로 영원(오람)이라는 단어입니다. 소금의 대표적인 특징이 부패를 방지하는 것이고 소금 자체는 영원히 썩지 않는 물질입니다.

그래서 고대 히브리인들은 소금을 영원과 완전함의 상징으로 이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바로 그 소금을 들어서 당신의 언약이 필연적으로 성취될 것이며 반드시 완전하게 완성이 될 것임을 확증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께 드려지는 점도 흠도 없는 제물들을 하느님의 백성들에게도 먹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그 것을 먹는 백성들을 점도 흠도 없는 당신의 백성으로 재창조하시겠다는 언약을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소금은 회복이라는 의미도 함의(含意)하고 있습니다.

 

(열왕하2:19~21) 19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어르신께서 보시다시피 이 성읍은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이 나빠서 이 땅이 생산력을 잃어버렸습니다.” 20 이 말에 엘리사는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가져오시오.” 하고 일렀다. 그들이 소금을 가져오자, 21 엘리사는 물이 나오는 곳에 가서 거기에 소금을 뿌리며 말하였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 물을 되살렸으니, 이제 다시는 이 물 때문에 죽거나 생산력을 잃는 일이 없을 것이다.’”

 

엘리사가 물이 좋지 않아 사람들이 그 물 때문에 죽거나 아이를 유산하게 되는 여리고의 물을 소금을 뿌려 좋은 물로 회복시키는 장면입니다. 죽음의 물이 생명의 물로 바뀌는데 소금이 뿌려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소금은 회복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소금은 어떤 것을 거룩하게 하고 성결하게 만드는 것의 상징으로도 쓰였습니다.

 

(출애30:34~35) 34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향료들, 곧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을 장만하여, 이 향료들과 순수한 유향을 섞는데, 각각 같은 분량으로 하여라. 35 너는 향 제조사가 하듯이, 이것들을 잘 섞고 소금을 쳐서 깨끗하고 거룩한 것을 만들어라.

 

이렇게 소금은 어떤 것을 좋은 것으로 회복시키고 거룩하게 구별시킨다는 의미도 함의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드려질 제물에 소금이 뿌려졌다는 것의 두 번째 의미는 부패하고 부족한 제물이 부패함과는 전혀 관계없고 완전한 점도 흠도 없는 제물로 하느님께 드려지기 위해서는 하느님에 의해 소금이 뿌려져야 함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소금이 뿌려진 빵을 이해할 때 두 가지 관점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소금이 뿌려진 빵은 그 자체로는 부패와 무관하고 영원히 변치 않는 점도 흠도 없는 온전한 제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함과 동시에 아직 불완전한 부패의 산물인 세상의 빵에 예수라는 소금이 뿌려짐으로 그 빵이 부패와 무관하고 온전한 제물이 되어 하느님께 바쳐 질 수 있는 새로운 것으로 재탄생하게 되는 이중적 상징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금은 곧 예수 그리스도요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빵이므로 그 소금이 쳐진 소제물의 빵을 하느님의 택한 백성들을 상징하는 아론과 그의 후손들, 즉 제사장들이 먹는 것입니다.

 

(레위6:14~18) 14 이 예물은 번철 위에서 기름을 섞어 만드는데, 잘 반죽하여 구운 것을 여러 조각으로 부수어, 그것을 곡식 제물로 가져와 주님을 위한 향기로 바친다. 15 아론의 아들들 가운데에서 그의 뒤를 이어 기름부음 받은 사제가 이 예물을 만든다. 이는 영원한 규정이다. 이 제물은 주님에게 온전히 살라 연기로 바친다. 16 사제의 모든 곡식 제물은 온전히 바쳐야 한다. 누구도 그것을 먹어서는 안 된다.” 17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18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속죄 제물에 관한 법은 다음과 같다. 속죄 제물은 번제물을 잡는 곳, 곧 주님 앞에서 잡는다. 이 제물은 가장 거룩한 것이다.

 

(레위2:10) 10 남은 곡식 제물은 아론과 그 아들들의 것이 된다. 이는 주님에게 바친 화제물에서 온 것이므로 가장 거룩한 것이다.

 

이렇게 흠 없는 제물로 하느님께 드려지는 생명의 빵은 참 하느님의 백성들인 교회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져 교회 가 그 빵을 먹고 흠 없는, 하느님이 열납 하실 만한 새로운 생명으로 재탄생하게 되는 현실을 상징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빵은 16절의 말씀처럼 꼭 회막(會幕) 뜰에서만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회막(會幕)은 하느님이 임재하시는 하느님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은혜로 하느님 나라에 초청된 자들만이 먹 을 수 있는 빵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요약하여 정리를 해 보면,

구약에 그려진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누룩과 꿀, 다시 말해 세상의 죄와 세상의 달콤함이 빠진 완전한 하늘의 것으로, 그리고 기름과 유향이 부어짐으로 성령이 부어진 향기로운 제물로, 그리고 소금이 부어짐으로 부패와는 전혀 상관없는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제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며,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빵이 하느님께 열납이 되고, 그 온전한 제물인 생명의 빵이 하느님의 백성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져 그들도 흠 없는 소금 이 쳐진 제물이 되어 하느님께 열납이 되어 질 것이라는 그 하느님의 언약이 소금이 쳐진 소제 물인 생명의 빵 속에 담겨있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 언약을 소금 언약이라고 부르심으로 그 언약은 반드시 지켜질 것이고 영원히 변개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성도는 레위지파의 제사장들이 소금이 쳐진 소제의 빵을 먹은 것처럼 생명의 빵인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역시 소금이 쳐진 순결하고 완전한 제물이 된 것입니다.

 

(마태5:13)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우리는 영원히 변치 않는 하느님의 소금 언약 안에 들어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의 영적 신분은 누구도 흔들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뿌려진 그 소금은 회복의 소금이며 부패와 썩어짐을 방지하는 소금이며 다른 것을 거룩하고 성결하게 구별하는 역할을 하는 소금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역할을 하는 세상의 소금으로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것은 세상은 지금 온통 썩어 버린 곳이라는 말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온통 썩어짐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세상에 보내시며 너희는 세상의 부패를 막고, 너희들의 사랑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회복시키며, 아직 하느님 앞에 돌아오지 않은 하느님 백성들이 거룩하고 성결하게 하느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그러한 소금의 삶을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소금은 절대 짠 맛을 잃지 않습니다. 소금의 짠 맛은 영원합니다. 그런데 왜 오늘날의 소금들은 이렇게 싱겁습니까? 소금이 싱거워지는 단 하나의 이유는 그 소금에 다른 싱거운 것들이 많이 들어갔을 때입니다. 다른 말로 소금 안에 세상의 누룩과 꿀들이 섞여서 이렇게 싱거운 자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하나하나 쳐내고 성도의 짠 맛을 다시 찾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소금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세상이 함께 섞여 있어 짠 맛을 잃고 싱거워 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 우리를 싱겁게 해 버린 세상의 싱거움 들을 털어내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소금이 짠 맛을 찾게 되면 하느님과 이웃 간의 사랑이 회복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짠 맛을 되찾은 소금들이 모여 사는 곳을 우리는 천국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들로 잘 지어져 가세요. 그게 소금의 본분입니다. 소금은 세상과 반대편에서 세상 을 정화시키고 세상을 썩어짐에서 회복시켜야 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소금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세상의 힘을 달라고 외치고 있다면 그와 같은 코미디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마르9:50) 50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소금이 세상에 녹아 소금이 되지 못하고 그저 자기의 유익만을 챙기다 보면 롯의 아내처럼, 소돔과 고모라처럼 소금 기둥과 소금의 땅으로 영원히 버려지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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