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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글방/ 썩지 않는 양식과 하느님의 일 (요한6: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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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4-19 ㅣ No.146190

 

(공동번역성서) 2021. 4. 19. 부활 제3주간 월요일 도란도란글방

 

썩지 않는 양식과 하느님의 일

 

(요한6:22~31) 

22 이튿날, 호수 건너편에 남아 있던 군중은, 그곳에 배가 한 척밖에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를 타고 가지 않으시고 제자들만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3 그런데 티베리아스에서 배 몇 척이, 주님께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 빵을 나누어 먹이신 곳에 가까이 와 닿았다. 24 군중은 거기에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그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25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28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30 그들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31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은 죄인들이 진정한 만족과 배부름과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빵은 인간들의 노력이나 하느님의 도움을 받은 인간들의 행위로 얻어낼 수 있는 이 세상의 빵이 아닌 생명의 빵,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는 장입니다.

오늘 본문도 역시 행복에 도달하려고 애를 쓰는 인간들의 세속적 행위나, 인간들이 이 땅에서 자기들의 행복을 위해 쌓는 세상의 힘이 왜 그들에게 생명에 이르는 양식이 될 수 없는지에 관한 예수님의 강화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요한10:10, 28) 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분명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느님의 선택에 의해서 은혜로만 주어집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성경이 필요합니까?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단순히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성경이 주어진 것이라면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원을 받는 것이라는 몇 마디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창세기부터 요한묵시록까지의 그 긴 기록이 필요합니까?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느님에게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택하셔서 예수를 믿게 하셔야 우리는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다. 구원은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의 일입니다. 따라서 구원은 그냥 택한 자들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들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한 설득의 책도 아니고 단순히 인간의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놓은 책도 아닙니다.

성경은 시간의 시작인 한 처음’ 부터 시작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인 최후의 종말에서 끝이 납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이 역사라는 시간과 천지라는 공간을 잠시 사용하셔서 당신께서 계획하시고 목적하시는 어떤 일을 완성해 내실 것임을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알리고 있는 책입니다.

요한묵시록에서 하느님의 최종목적은 새 하늘과 새 땅, 다른 말로 다시는 타락하거나 배반 할 수 없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인간의 구원은 그 원대한 하느님의 계획 중의 일부일 뿐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 이루어지기 위해 구원받은 인간이 필요한 것이지 인간의 구원이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하느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셔서 하느님의 일이 완성되는 데에 도구로 쓰시기 위함까지를 그 범위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도구로 하느님의 일에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하느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기에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믿음이라는 것을 주셔서 당신과 당신의 계획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 하느님의 목적과 계획이 무엇이며, 그 일을 이루시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시며, 그 분이 계획하신 일이 이루어지기 위해 인간들이 어떤 지경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가 기록된 책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고 피부에 와 닿는 문제가 우리의 구원이고 그 구원의 방법에 관한 문제이기에 우리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구원의 방법으로 제시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만 집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가 확인이 된 성도들은 거기서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성경이 거기서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인간의 구원에서 끝을 맺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들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완성이 되는 하느님 나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구원은 하느님 나라 완성의 시작 지점일 뿐 그 자 체가 완성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느님의 일에 초청이 된 자들로서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무엇을 추구하며 어떠한 종류의 열심을 부려야 하는 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정리를 하자면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시간을 창조하신 후 역사와 우주를 경륜해 가시는 최종목적은 죄인들의 구원이 아니라 죄인들의 구원으로 말미암게 되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요한6:26-27) 2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26절을 보면 주님께서 당신을 찾아와 왕을 삼으려 하는 자들에게 일갈(一喝)을 하십니다. 그들이 빵을 먹고 배가 부른 연고로 주님을 찾은 것이지 진정한 하늘의 복을 찾아 주님께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26절에 나오는 배부르게 하는 빵과 27절의 썩는 양식이 같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너무나 쉽게 우리를 배부르게 하는 빵과 썩는 양식을 우리를 배부르게 하는 세상의 힘이라고 단정을 짓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힘을 쌓는 일을 하지 말고 썩지 않는 양식인 하느님 일에 열심을 부려야 한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물론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며 그 힘만을 위해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정답은 아닙니다.

정말 썩는 양식이 돈이나 명예 등의 세상의 부귀영화, 즉 세상의 힘만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우린 지금 당장 우리의 생업을 놓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분명 썩는 양식을 위해 일을 하지 말라고 하셨으니까요. 혹 이렇게 말할 사람도 있을 것 같아요.

아니 주님은 지금 썩는 양식을 위한 세상일을 아예 하지 말라는게 아니라 너무 그런 세상 것에만 관심을 두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을 하시는 거 아닙니까?’ 아니요. 주님은 분명 27절 서두에서 에르가제스떼 메라고 강한 부정의 불변사를 쓰시면서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을 강력하게 금지하고 계십니다.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은 절대 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 이제 세상 일 다 놓고 어디 산 속에 모여서 하느님의 일만 하면서 살까요?

 또 한 가지, 만일 썩는 양식이 이 세상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라면 주님은 오병이어로 썩는 양식을 만들어서 먹이신 것이 됩니다. 당신도 썩는 양식을 위해 일을 하셔서 그 썩는 양식으로 당신을 쫓는 이들을 먹이셨으면서 당신을 쫓아온 이들에게는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게 말이 됩니까? 그건 성경의 진의를 잘 파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금지하시는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이 과연 무엇일까요? 26절과 27절을 잘 보면 썩는 양식은 그들이 오병이어의 기적 현장에서 먹은 빵과 관련이 있는 것이고 그 빵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주님을 찾아온 행위를 가리켜 썩는 양식을 위해 하는 일 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배를 불린다는 것의 의미는 단순히 먹을 것으로 배를 채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만족을 위해 주님을 쫓는 자들이 바로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이들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중요한 메시지를 발견합니다. 그들은 눈에 불을 켜고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주님을 찾아 온 것이 왜 나빠요? 그 일이 바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일 아닙니까? 그러나 주님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을 찾아 온 이들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들이 여전히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을 하고 있는 이들이라는 것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을 믿고 쫓겠다고 신앙 행위를 하고 있는 한 무리에게 너희는 지금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오늘날 성당 안에서 예수이름을 부르며 혼신의 힘을 다해 종교행위를 하고 있는 이들 중에도 썩는 양식을 위해 일을 하는 불쌍한 이들이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한 모든 신앙 행위는 전부 썩는 양식을 위한 일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한 헌금, 나 자신을 위한 기도, 나 자신을 위한 선교, 나 자신을 위한 봉사이 모든 것들이 다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나 자신의 구원도 포함이 된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 종교 행위들도 썩는 양식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잘 이해하여야 합니다. 나의 구원을 위한 종교 행위 또한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일 수 있다니 그럼 무엇을 해야 썩지 않는 양식을 위해 일을 하게 되는 것인가?’ 그래서 서두에 하느님의 최종목적은 우리의 구원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27절을 다시 보면 조금 모순되는 듯한 표현이 나옵니다. 주님은 분명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하셔놓고 그 양식은 당신께서 주신다고 하십니다.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하셔놓고 그 양식은 당신께서 주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의 개념과 양식의 개념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 과 많이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안 드세요? 먼저 주님께서 그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주시겠다고 하신 그 어구부터 해결을 하자고요. 주님께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당신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것은 당신이 그 양식을 가지고 계시다는 말이지요? 그 양식이 이 전장에서 한 번 나왔었는데 봅시다.

 

(요한4:34) 34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여기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양식이 나오지요? 그 양식이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며 그 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주님의 양식입니다. 보세요. 예수님은 나의 뜻을 행하고 나의 목적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아닌, 자신이 부인되고 자신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하느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을 양식으로 삼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부르게 한 바로 그 양식을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영생 하도록 있는 예수님의 양식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나의 욕심과 정욕을 채우며 나의 비전을 성취하는 삶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그 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입니다.

 우리를 배 불릴 수 있는 양식은 나의 구원, 나의 소원 성취, 나의 만사형통, 내 질병의 치유, 나의 행복, 나의 기쁨이 아닌 것입니다. 하느님의 소원 성취, 하느님의 만사형통, 하느님의 행복, 하느님의 기쁨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하며 그러한 양식이 진짜 우리의 배를 부르게 하고, 만족하게 하고, 행복하게 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먹어야 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인 것입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한 일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 양식을 얻어내기 위해 열심을 부려야 하는 어떤 일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하느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 당신을 찾아온 자들의 행위를 썩는 양식을 위한 일이라고 하셨잖아요? 따라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한 일은 자기의 배를 부르게 하는 세상 것들을 추구하는 삶이 아닌 주님께서 주시는 양식,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하느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찾는 행위를 말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성당에 앉아있는 사람들 중에 여전히 자신의 문제 해결, 자신의 소원 성취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그러고도 그들은 모두 저마다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자신의 소원 성취를 위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만족을 위해 헌금 하고, 봉사하고, 선교하고 하면서도 자신들은 썩지 않는 영생을 위한 양식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요, 헌금과 선교와 봉사가 썩는 양식이 될 수도 있다니까요

정말 썩지 않는 양식인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받은 하느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는 삶이며 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일이 완성이 될까를 고민하며 자신의 선택과 행동양식들을 하느님의 기쁨에 맞추어 살려고 노력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창조주이시고 자신은 피조물이라는 올바른 자각 아래 자신의 모든 인생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일하는 것으로 허비하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하느님의 일을 이루기 위한 삶으로의 대 전환이 일어난 사람들을 가리켜 구원 얻은 성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신이 구원을 얻은 것으로 마지막을 삼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성도들에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한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구원이라는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구원은 그 자체가 전부가 아니며 그 자체로 마지막이 아닌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은 그 자체가 시작이며 출발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한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해 구원을 주셨다는 것은 우리는 구원을 얻은 그 순간부터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려 알아야 하고 하느님의 일이 완성이 되기 위해 라는 존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중심의 인생관이 하느님중심의 인생관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중심의 세계 속에 서 하느님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많은 손해를 감수하는 삶이어야 하고, 많은 밟힘을 감수해야 하는 삶이며, 많은 억지 속에서도 상대방을 감싸 안고, 품어주고, 용납해 주어야 하는 삶이기에 그 삶을 고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의 만족과 나의 행복을 위해서는 나에게 손해를 입힌 자들에게 동일한 무게의 복수를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행하고 하느님의 일이 완성이 되는 것을 그의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사는 사람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뜻에 맞추어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참아주고, 용납해주고, 섬겨주고, 용서해 주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삶은 세상 적으로 볼 때 고난의 삶이며 고통의 삶 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삶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이며 하느님의 일이, 하느님의 목적이 완성이 되어져 가는 삶이기에 꿋꿋이 이겨내며 사는 것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한 성도의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모두에게서 온전히 완성이 되어 발휘되게 되는 그날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완성의 날인 것입니다. 그러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한 일에 관한 것, 성도의 삶 전체에 관한 내용이 잘 설명이 되어 있는 책이 성경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들에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 하는 자들아, 이겨라, 끌까지 이겨라하고 응원을 함께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에 관해서만 기록을 하고 있는 책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들이 어떻게 그 구원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 제화 시키게 되는지 까지 기록이 되어 있는 책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우리가 이 땅에서 세상의 힘을 누리며 얼마나 행복하고 기쁘게 살 수 있는지에 관해 기록된 책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는 도구로서 이 땅에서 당해야 할 환난과 고통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해 놓은 책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이겨라’  성도는 그렇게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일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1베드2:9) 9 그러나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하느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구원하신 이유가 정확히 나오지요? 우리 성도들은 구원을 얻은 후에 자기 구원에만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선전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도의 구원은 하느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기 위한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느님의 하느님다우심, 하느님의 성품 등을 우리의 삶과 입으로 선전하는 자로 이 땅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삶이 온전히 살아지는 나라,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온전히 발산해 내게 되는 그 나라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입니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의 순종으로 이 세상에서 증거 되는 일이 바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며 그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가리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한 일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더 이상 생존을 위해 사는 이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생명을 위해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생존에 관한 문제는 항상 나의 만족과 나의 자랑과 나의 행복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추구하는 삶은 자신의 삶 속에서 나의 자랑과 나의 행복을 기각(棄却)하고 하느님의 만족과 하느님의 자랑과 하느님의 기쁨과 하느님의 행복에 관심을 두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광야 인생길에서 바로 그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간 싸운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쫓아 살아야 진짜 사는 것이라는 진리를 배우는 싸움이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테파노가 자신의 설교에서 광야의 이스라엘을 가리켜 광야 교회라 부르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 말은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교회, 즉 하느님의 백성들이 살아야 할 삶을 모형으로 살았던 것이라는 걸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이 세상의 빵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으로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자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자꾸 세상의 빵을 달라고 하느님께 조르면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증인의 삶을 어떻게 살아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광야 40일을 보내시며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지요? 그것은 이스라엘이 광야 40년 동안에 실패했던 하느님의 시험을 그대로 다시 받으시는 장면인 것입니다. ‘돌로 빵을 만들어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사탄에게 절만하면 세상의 영광을 다 주겠다.’ 사탄이 생존의 문제로 시험을 걸고 들어 옵니다. 그 때 주님은 대답하십니다. ‘사람은 생존의 문제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문제로 사는 것이다.’ 사람이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쫓아 살 때 진짜 사는 것이다.라고 명쾌하게 대답을 해 주십니다. 사탄은 그렇게 늘 생존의 문제로 시험을 걸고 들어 옵니다. 그 때 우리는 생명의 문제로 답을 해서 사탄의 시험을 무색케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이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열심히 도와 드리면 하느님은 우리에게 생존에 필요한 것들로 보상을 해 주신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교의 본질과는 전혀 관계없는 생존의 문제로 그리스도교를 무속신앙화 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들의 오류가 정확하게 지적이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대답을 들은 사람들이 주님께 바로 묻습니다.

 

(요한6:28) 28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여기서 은 복수로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한 일을 자기들이 해 내어 하느님께 이 세상의 것들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종교 행위들로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어떤 좋은 것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을 마치 거래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하루에 기도를 세 시간씩 하라던가, 십일조를 빼 먹지 말고 하라던가, 매년 꼬박꼬박 선교를 가라던가, 열심히 구제에 힘쓰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엉뚱한 답을 주셨습니다.

 

(요한6:29)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여기서의 은 단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해야 하는 하느님의 일은 예수를 잘 믿는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하느님의 일, 예수를 잘 믿는 일은 무엇일까요? 믿음을 받은 자로서 믿음을 발휘하며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느님의 일입니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변변치 못 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당당하고 기쁘게 행복하게 살아내는 것, 하느님의 일입니다. 많이 가지고, 많이 배우고, 높은 지위에 앉은 사람이 그것이 진짜 힘이 아니란 것을 알고 겸손하게 다른 이들을 섬기는 것, 하느님의 일입니다.

즉 보이는 것을 의지하여 교만을 떨고, 자랑을 하거나 그 것을 가지지 못했다고 해서 부끄러워하고 기가 죽어지내는 이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을 발휘하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하느님의 일이 아닌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는 것이 주어졌을 때 그 현상을 보고 광분하여 그 현상을 일으켜 준 대상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바로 불 신자들의 특징인 것입니다. 본문 30절을 보면 예수님은 믿음을 요구하시는데 믿음 없는 자들이 또 눈에 보이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를 합니다.

 

(요한6:30) 30 그들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하니까 이 우매한 자들이 당신을 믿도록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 자신들에게 기적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존경받는 예언자가 되었으니 당신도 그런 기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를 합니다.

 

(요한6:31) 31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오병이어로 이만 여명이 광야에서 배불리 먹은 기적 속에서 주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또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이게 바로 믿음 없음의 증거인 것입니다. 뭔가를 자꾸 보고 싶어 하고 자기의 인생 속에서 기적들을 자꾸 경험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의 그 요구가 절대 만족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적을 보고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그 기적이 사라지면 신앙도 함께 사라집니다. 소원 성취를 위해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자기의 눈에 소원 성취라는 결과물이 보여 지지 않으면 이내 믿음을 버립니다. 그 건 올바른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음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이 정말 믿음을 줄 수 있다면 왜 그런 엄청난 기적을 눈으로 보고 체험을 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다 죽었겠습니까? 믿음은 표징으로 생겨나거나 성숙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은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받은 자들은 믿음을 발휘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요한6:44)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이렇게 믿음은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님께로 인도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 아무리 엄청난 기적이 눈앞에서 일어나도 하느님께서 이끌지 않은 자들은 예수를 믿을 수 없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이끌어 믿음을 준 사람들은 기적 같은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보지 않아도 믿어지고 보지 않아도 하느님의 함께 하심으로 행복한데 뭐 하러 다른 것을 봅니까? 그러니까 성도의 삶이나 불신자들의 삶 속에서 공히 기적은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느님께서 이 땅에 기적을 보이시겠습니까? 그런데 속지 마세요. 믿음은 하느님의 소관입니다. 보여주면 믿겠다고, 보여주면 더 열심을 내겠다고 사기 치지 마세요. 절대 그런 일은 없습니다.

 

 (요한6:38~39) 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보세요.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고 계시지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4장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양식이라는 것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지금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음을 받고 살아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 하느님과 예수님의 일하심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여주면 믿겠다는둥 기적을 체험하면 나의 믿음이 더욱 강해 질 거라는 둥의 너스레는 집어치우시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하느님의 일하심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느님의 일하심으로 예수를 믿게 된 자들은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그리고 하느님을 담은 그릇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쫓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성품을 드러내며 이 땅에서 믿음을 발휘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썩는 양식이 무엇인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 무엇인지 하느님의 일이 무엇인지 잘 아시겠지요?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나 우리의 행복이나 우리의 만족이나 우리의 기쁨 만을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 의 영광을 위해 하느님의 뜻을 행하며 하느님의 일의 완성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은 그리 녹녹치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삶은 의미와 명분이 있는 고난의 삶이기에 우리는 충분히 이겨내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기 위해 당하는 고난과 환난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일이며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 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믿음을 발휘하는 길이며 그 일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명분이 어디 있으며 그것보다 더 큰 인생의 의미가 어디 있겠습니까? 잘 참으시고 잘 견디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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