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대교구 선교순례단(인준단체) 5월 9일 성지 순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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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서울대교구가두선교순례단 [stirene] 2026-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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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가두선교순례단은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조한건 프란치스코 신부님과 함께
구산 · 마재 성가정 · 양근 · 천진암 성지를 순례하였다.
<구산 성지>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 팔당 부근 한강변에 위치한, 거북이 형상을 닮았다는 구산(龜山) 마을은
먼저 103위 한국 순교 성인 중 한 분인 김성우 안토니오(金星禹, 1795-1841년)를 비롯해
박해 시대에 많은 순교자가 탄생한 유서 깊은 사적지라는 데서 그 교회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곳이다.
특히 구산 마을은 김성우 성인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오며 순교자들의 묘소를 가족 묘지에 이장 · 보존해온 곳으로,
우리나라에서 박해 시대의 자취가 가장 원형대로 남아 있는 곳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고 있다.
더군다나 200여 년 동안 교회를 지키며 신앙생활을 확고하게 지켜온 교우촌으로 도시화로 인한 급변속에서도
한마음으로 신앙 안의 일치를 잃어버리지 않고자 노력해 왔다.
6.25 전쟁 당시 구산 마을은 원로 신부들의 피신처로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낮에는 곳곳에 무성하게 자란 사람 키보다 더 큰 갈대숲 사이에서 숨죽이고 엎드려 있다가
저녁에 살금살금 나와 지친 몸을 쉬었다고 한다.
1836년 모방 신부가 설립한 구산 공소를 모태로,
1979년 신장 성당에서 분리 · 승격해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의 생가터에 설립된 구산 성당은
2016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 말까지 옛 성당의 원형을 보존한 상태로 220m 가량 떨어진 새 부지로 성당을 통째로 옮기는 대역사를 이루어냈다.
경기도 하남시 향토유적 제4호 지정된 구산 성지는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과 순교자 8명이 출생 · 순교한 후 묻힌 곳이다.
독특한 외형의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 상’은
구산 성지 초대 사제인 고(故) 길홍균 이냐시오(1931-1988년) 신부가 꿈에서 본 성모님의 모습을 토대로
고 김세중 프란치스코(전 서울대학교 미대 학장) 화백이 조각해, 지난 1983년 축성된 것이다.
성모 마리아 상 앞에서 단체 사진 한 컷
‘안당문’(安當은 안토니오의 중국어 음역)이라 적힌 자그마한 기와 대문이 보이고,
그 안으로 순교자 묘역과 성당이 보인다.
순교자 묘역에는 김성우 성인과 2015년경 가족 묘지에서 모셔온 순교자,
구산 출신 순교자 등 9위의 무덤이 진묘와 의묘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양반의 자제로 태어나 유복한 살림과 존경받는 가문에서 남부러울 것 없었던 김성우가 신앙의 험로를 걷기 시작한 것은 1830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경주 김씨 계림군파(鷄林君派)의 15대 손인 김영춘의 맏아들로 정조 19년(1795년)
구산에서 태어난 그는 두 동생(김만집 아우구스티노, 김문집 베드로 – 덕심 윤심)과 함께 세례를 받고
친척(김주집 스테파노 등)과 이웃들을 입교시켜 이 지역을 교우촌으로 만들었다.
한동안 유방제 신부를 모시고 회장직을 수행하며 온 마을에 복음을 전한 그는
1836년 모방(Maubant) 나(羅) 신부가 입국하자 자기 집에 모방 신부를 모시고
우리말과 조선의 풍습을 가르쳤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됐다가 간신히 풀려났던 그는
1840년 1월경 다시 가족들과 함께 붙잡혀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포도청에서 형조로 이송되어 갖은 고문을 당한 그는 배교를 강요하는 재판관에게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입니다.”라며
결코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요지부동의 굳은 신앙에 결국 그는 이듬해 4월 29일 47세의 나이로 순교했고,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가
마침내 1984년 5월 6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 되었다.
성당 왼쪽으로 청동 빛의 고색창연한 십자가의 길 14처상
성지와 관련된 순교자들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세운 기둥들이 묵주기도 길 사이로 높이 솟아 있다.
작년 방문 시 찍었던 사진들 추가 합니다.
성당 내 모든 의자들에 의미를 부여~
묵주기도의 신비와 기도문 새겨 있으며, 토마스의 손을 형상화 의자도 있다.
구산성지는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의 묘소를 비롯하여 김덕심(만집, 아우구스티노)등
아홉 분의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는
유서 깊은 교회 사적지입니다.
<마재 성가정 성지>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4형제가 태어난 곳
북한강과 남한강이 마주 서로 만나는 양수리에서 팔당댐 방향으로 3킬로미터쯤 가다 보면 왼쪽으로 그 입구가 나타난다.
정약현 · 약전 · 약종 · 약용 등 여기서 태어난 4형제 중 셋째인 약종은 천주 신앙을 위해 피를 흘린 순교자로,
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정약현의 부인이 이벽 선조의 누이이고,
정씨 형제의 누이가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의 부인이다.
그리고 약현의 사위가 황사영이라는 것을 알면 정씨 형제가 얼마나 천주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그보다 앞서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오른
그의 아들 정하상 바오로와 딸 정정혜 엘리사벳도 바로 이곳 마재에서 태어났다.
복자와 성인품에 오른 정씨 부자(父子)가 한국 교회사에 남긴 업적은 실로 위대하다.
1779년 주어사 강학회에 참여하는 등 초기 교회 창설에 큰 역할을 한 정약종은
한문을 모르는 신자들을 위해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主敎要旨)”를 펴냈고,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의 초대 회장으로서 당시 사제와 교우들을 위해 많은 활동을 펼쳤다.
정하상은 아홉 차례나 북경을 드나들며 성직자 영입 운동을 벌였고, 그가 로마 교황에게 보낸 청원서는
조선교구 설정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정하상은 또 한국교회 최초의 호교론서인 “상재상서(上宰相書)”를
통해 천주교가 유교 전통에 어긋나지 않으며, 사회윤리를 바르게 하는 미덕을 포함하고 있음을 박력 있는 명문장으로 웅변했다.
다산 정약용은 그의 형 정약종처럼 순교하지는 않았으나 천수(天壽)를 다하면서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心書)” 등 수많은 명저를 남겼다.
그는 본래 세례자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갖고 10여 년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제사 문제로 번진 신해박해 때(1791년)만 해도 그는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을묘년(1795년) 포도청 장살 사건이 당쟁으로 발전, 좌천되면서 반대파의 원성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명소(自明疏)를 올린다. 즉 천주교를 떠났다는 것을 글로써 명백히 밝힌 것이다.
이어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배교함으로써 죽음을 면하고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실학을 집대성한 5백여 권의 주옥같은 저서는 바로 이 무렵 17여 년간의 유배 생활 동안 써진 것이다.
이때 그는 스스로 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불러 초대 교회 창립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
회장으로 크게 활약한 형 정약종과 매부 이승훈이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순교한 데 대한 부끄러움을 표시했다.
그는 당시의 참담한 심정과 외로움을 “만천유고(蔓川遺稿)”에서 “한평생을 살다 보니
어쩌다가 죄수가 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을까, 그 옛날 어질던 스승과 선배 그리고 절친했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나.” 하고 노래했다.
기나긴 유배 생활 중에 잃었던 신심을 되찾아갔다. 1811년에는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한
교회 재건 운동에 간접적으로나마 참여할 정도였다.
그가 완전히 교회로 돌아온 것은 유배에서 풀려난 지 2-3년 뒤로 볼 수 있다.
그의 생활은 은둔과 묵상, 고행과 기도로 일관했을 뿐만 아니라 회갑을 맞으면서 미리 작성해 둔
자신의 묘비명 가운데는 참회와 성찰의 문구가 역력히 들어 있다. 유배 생활을 끝내고
다시 이곳 마재로 돌아온 그는 보속하는 뜻에서 기도와 고행의 삶을 살다가
1836년 중국인 여항덕(余恒德, 유방제 신부로도 알려짐) 파치피코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마재에서는 또한 천진암 앵자봉 능선을 멀리 바라다볼 수 있다. 그리고 천주교회의 큰 초석이 된
권철신 암브로시오 5형제의 집터가 있는 양근(陽根)과도 지척이고, 마재 앞 한강을 건너면 이벽 선조의 집이 있다.
이런 이유로 한국교회 창설 선조들은 마재에서 멀지 않은 천진암 주어사에서 천주학을 공부하는
강학회를 열어 교회의 기틀을 다졌다. 이처럼 마재는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이자 신앙의 태동 지라 할 수 있다.
성 정하상(丁夏祥) 바오로(1795-1839년)
성 정하상 바오로(Paulus)는 남인 양반의 후예로 경기도 양근 지방 마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씨 가문에서 최초로 신앙을 받아들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이며,
1801년에 그의 맏아들 정철상 카롤루스와 함께 순교하였고, 어머니 유 체칠리아는 1839년 11월 순교하였다.
아버지가 순교할 때에 그는 겨우 일곱 살로 그의 모친과 누이 정 엘리사벳(Elisabeth)과 함께 풀려났다.
<양근성지>
양근(楊根)이란 지명은 고구려 시대에 근거를 두고 있다. ‘양근’이란 버드나무뿌리란 뜻으로
예로부터 남한강 변에는 폭우와 홍수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버드나무가 많았었다.
버드나무는 초기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의 나무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자
당대의 로마 황제들은 그리스도교인들을 잡아들여 처형했다. 황제들은 그리스도교를 믿는 이들을 잡아 죽이면
그 수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교의 씨앗이 되어 뿌리만 내리면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는 버드나무처럼 계속 퍼져나갔고, 순교자들로 인해 그리스도교 신앙은 더욱 튼튼해졌다.
양근 성지는 신유박해 이전 천주교의 도입기에 천진암 주어사 강학을 주도한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과
그의 동생이자 한국 천주교 창립 주역의 한 명인 이암(移庵)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태어난 곳이다.
이승훈(李承薰)은 1784년 북경의 북당(北堂)에서 그라몽(Grammont) 신부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신자이다. 그는 고국에 돌아와 서울 수표교 근처 이벽(李檗)의 집에서 한국 천주교의 창립
선조들인 이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런 후 이승훈은 양근으로 내려와 권철신과 훗날
충청도와 전라도의 사도가 된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과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양근 성지는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곳이고,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가 시행된 곳이다. 그리고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이존창과 유항검을 통해 천주교 신앙이 양근에서 충청도와 전라도로 전파된 곳이다.
이런 의미에서 양근 성지는 한국 교회의 요람지라 할 수 있다.
양근 성지는 1801년 전주에서 순교한 이순이(李順伊, 루갈다)와 유중철(柳重哲, 요한) 동정부부와
쌍벽을 이루는 조숙(趙塾, 베드로)과 권천례(權千禮, 데레사) 동정 부부가 태어나고 신앙을 증거 한 곳이다.
조 베드로는 훗날 성직자 영입 운동을 벌인 정하상 바오로 성인을 가르친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의 종손자(從孫子)이고,
권 데레사는 권일신의 딸이다. 조 베드로와 권 데레사 동정 부부는 한국 교회의 성직자 영입 운동에 적극 참여하다가
잡혀서 순교하였다. 이들은 결혼생활 15년 동안 오누이처럼 지내면서 동정을 지켰고
마침내 동정 순교 부부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1837년 1월에 샤스탕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여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자 모방 신부는 곧 양근으로 가서 머물며
4주일 동안 조선말을 공부한 다음 그 읍내 신자들을 보살폈다. 그리고 모방 신부는 샤스탕 신부를
양근으로 불러 그곳에서 함께 부활 축일을 보냈다.
양근 성지는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기 위해 두 번이나 북경에 밀사로 다녀온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의
동생 윤유오(尹有五, 야고보), 4촌 여동생 윤점혜(尹占惠, 아가타),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노)이
참수형(斬首刑)으로 순교한 곳이다.
양근 성지와 가까운 곳에 있는 용문사는 권일신이 1785년 봄 명례방(명동) 김범우(金範禹, 토마스)의 집에서 집회를 하다
형조 관리에게 발각된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 이후 양근 사람 조동섬과 함께 8일간 침묵 피정을 한 곳이다.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1736-1801년)
권일신의 형. 조선 개국공신이며 주자학자인 권근의 15대손으로 집안 대대로 거유가 많이 배출되었다.
학문이 높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고 제자들이 많았다. 이벽 선조가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대상자를 찾다가 가장 먼저 선택한 집안이 권철신의 가문이었으며, 그는 5형제 중 장남이었다.
-중략-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은 이벽은 천주교 전파를 위해 학덕이 높은 학자를 입교시킬 의도로,
1784년 음력 9월 양근의 권철신 형제에게 입교를 권하게 되었으며, 이때 셋째인 권일신은 즉시 입교하였고
맏아들 권철신도 주저하다가 결국 암브로시오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하였는데,
그는 매사에 조심성 있고 신중한 사람이라 교리를 깊이 연구한 후에야 비로소 입교할 결심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암(移庵)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751-1792년)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광암 이벽, 이승훈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 창립의 삼대 공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당시 삼남의 선비들에게 존경을 받던 양근 땅 감호(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의 명문가인
권 씨 가문 5형제 중 셋째였다.
-중략-
1784년 9월 수표교 근처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을 때 권일신은 이미 복음 전파에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는 동양의 사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을 수호자로 모시기로 하고 그 이름을 세례명으로 정하였다.
-중략-
권일신은 여러 차례 고문을 받았으나 형리들 앞에서 "하늘과 땅과 사람을 창조하신 위대하신 천주를 섬기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무엇을 준다 해도 그분을 배반할 수 없고, 그분께 대한 제 의무를 다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당하겠습니다."라고 자신의 신앙을 웅변하였다.
<천진암 성지>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앵자봉 기슭에는 조그만 암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어느 때인가 없어져
주춧돌만 남았던 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암자가 바로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천진암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하고 돌아온 1784년 봄으로 잡는다.
하지만 그보다 5년이 앞선 1779년 겨울 바로 이곳 천진암에서는 이미 자랑스러운 교회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천진암 주어사에서는 당대의 석학 녹암(鹿菴) 권철신이 주재하는 강학회가 있었다. 권철신 · 일신 형제와
정약전 · 약종 · 약용 형제, 이승훈 등 10여 명의 석학은 광암(曠菴) 이벽의 참여와 함께 서학에 대한 학문적 지식을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강학회가 끝날 무렵 이벽이 지은 “천주공경가”(天主恭敬歌)와
정약종이 지은 “십계명가”(十誡命歌)는 이러한 강학회의 결실을 잘 드러내 준다.
천진암 강학회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공동체가 함께 하느님을 흠숭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강학회 참가자들은
강학회를 통해 하느님의 존재를 깨닫고 즉시 천주교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바로 파공(罷工), 기도, 묵상, 소재(小齋) 등을 실천했던 것이다.
파공은 십계명 중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계명을 지키는 행위다. 그러나 아직 일주일, 요일이라는 개념도,
양력도 알지 못했던 신앙 선조들은 서학서를 통해 “7일 가운데 하루는 하느님 공경에 온전히 바쳐야 한다”라는
내용을 읽고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에는 모든 일을 쉬고 묵상에 전념했고, 소재, 곧 금육을 지켰다.
또 매일 아침·저녁으로 엎드려 기도를 바쳤다.
샤를르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이곳에서 열린 10여 일의 강학회를 두고
“그들은 정직하고 진리를 알고자 열망하는 사람들인지라, 천주교의 도리에는 아름답고 이치에 맞는
위대한 무엇이 있음을 이내 어렴풋이 느꼈다”면서 “완전한 지식을 얻기에는 설명이 부족했으나,
그들이 읽은 것만으로 그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그들의 정신을 비추기에 넉넉했다”고 묘사했다.
천진암은 한국 천주교회의 발상지로서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사실은 오랫동안 잊혀 왔다. 지난 1960년에 와서야 이곳 지명들이 문헌에 근거해 밝혀졌고,
마을 노인들의 증언과 답사를 통해 한국 천주교의 요람으로서 천진암의 가치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1980년 노기남 대주교의 이름으로 제막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비가 세워졌다.
1979년에 경기도 포천에서 이벽의 유해가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이어 1981년에는 화성군 반월면에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유해가,
인천 만수동에서 이승훈의 유해가, 대감마을 뒷편의 효자봉 자락에서 권철신, 권일신의 유해가
각각 천진암으로 이장되었으며,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을 기념한 1981년에 정약종, 이승훈, 권철신 · 일신 형제의 묘가
이벽의 묘 옆으로 나란히 모셔져 창설 선조 묘역을 이루게 된 것이다.
천진암 성지를 순례할 때 꼭 들러야 할 곳이 있다. 성지 입구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조금 올라가면
수원교구에서 위탁 운영하는 경기도 청소년야영장이 있다. 입구를 지나 계속 올라가면 실내체육관 옆으로
정하상과 유진길 성인 묘역과 창립 선조 가족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1981년 12월에 경기도 광주 배알미리(현 하남시)에서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유해가
간신히 수습되어 이곳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정씨 가문에서 최초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정약종의 아들로 양근 지방 마재에서 태어난
성 정하상 바오로(丁夏祥, 1795-1839년)는 양반 신분을 감추고 어떤 역관의 집에 하인으로 들어가 살다가
북경에 가서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고 성직자 영입 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북경까지 9회, 변문까지는 11회나 왕래하며 뜻을 같이한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劉進吉, 1791-1839년)와 함께
로마의 교황에게 탄원서를 보내고 북경 주교에게도 서신을 보냄으로써 마침내 조선교회가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되고 동시에 조선 독립교구가 설정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대감마을과 주어사
양평 읍내에서 한강을 넘어 광주 곤지암으로 가다 보면 세월 초등학교를 지나 대감마을(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곳에서 좀더 남쪽으로 가다 보면 오른쪽 골짜기에 주어말 동네가 있고
그 뒤로 주어사( 여주군 산북면 하품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 높은 산자락이 바로 앵자봉이며, 그 너머에는 유명한 천진암(天眞菴)이 자리 잡고 있다.
대감마을은 실학자로 유명한 이익(李瀷)의 제자 권철신(암브로시오)과 아우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이 살던 곳이다.
광암(曠菴) 이벽(李檗) 세례자 요한(1754-1786년)
이벽 선조는 1754년 경기도 포천군에서, 경주 이씨 이부만 공을 아버지로 청주 한 씨를 어머니로,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셨고, 한때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검단산 아래 윗두미에서 살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원로 대학자 성호 이익 선생께서 어린 이벽을 보고,
'이 아이는 앞으로 반드시 아주 큰 그릇이 되리라'라고 하였다.
선조께서는 다섯 살 때에 이미 철이 났고, 일곱 살 때는 경서를 읽었으며, 열아홉 살 때, 권상복의 문집을 편찬하면서
'天學考'를 지어 실었고, '상천도(上天道)'라는 글을 지어, 부근에 있는 奉先寺 춘파대에 기증하였다.
스물다섯 살 때, 성호 이익 선생의 학풍을 이으려는 선비들 중 정약전, 이승훈, 권상문 등과 함께
학문을 연구하고 토론하였는데, 이때 이미 이벽 선조께서는 천학 도리를 아주 깊이 깨닫고, 믿고 있었다.
특히, 천학에 관한 서적들은 현고조부 이경상 공이 소현세자를 모시고 중국에 8년간 있다가 귀국할 때,
아담 샬 신부에게서 천주교 도리를 듣고, 중국인 천주교 신자 5명을 환관으로 데리고 왔었는데,
그때 가지고 왔던 천주교 책이 집안에 전하여 오던 것이었다.
만천(晩泉) 이승훈(李承薰) 베드로(1756-1801년)
이승훈 성현은 1756년 서울 반석방(성밖 서소문 밖 의주로 2가와 합동 사이)에서 당시 대 문장가였던
평창 이 씨 이동욱 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성현께서는 학문을 사랑하던 정조 시대에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 시파의 선비로서, 일찍이 1779년에 열렸던 천진암 강학회를 통하여 광암 이벽 선조에게서
당시 천학이라 부르던 천주교의 진리를 배우게 되었다. 북경 천주교회와 연락을 도모하던 이벽 선조의 명을 받은
이승훈 성현께서는, 동지사로 북경에 가게 된 아버지 이동욱 공을 따라 1783년 늦가을 북경 천주당에 가서
세례를 받고 이듬해 이른 봄에 귀국함으로써 국내에서 선교사 없이 한국인들에 의해서 갓 태어난
조선천주교회 발전에 큰 계기를 마련하였다.
선암(選菴)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1760-1801년)
정약종 성현은 조선 왕조 후기에 속하는 시대인 1760년에 서울에 인접한 경기도 광주군
마재(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 마재)에서 진주목사였던 정재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839년에 순교한 유조이 체칠리아 성녀는 그의 두 번째 부인이고, 1801년에 순교한 정철상 가롤로와
1839년에 순교한 정하상 바오로 성인, 정정혜 엘리사벳 성녀는 그의 아들과 딸이다.
정 아우구스티노가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2년 뒤인
1786년에 형에게서 교리를 배우면서였다. 이후 천주교 교리를 깊이 이해하게 된 정 아우구스티노는
세례를 받고 교리 연구와 가족들을 가르치는 데 전심하였다. 그러다가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경기도 광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의 형제들은 이 무렵부터 조금씩 교회를 멀리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교리를 실천하는 데에 정성을 다하였다.
그는 갑술옥 사건(1694) 이후로 관직에서 물러나 정계를 떠나기 시작한 양반 계층인 남인의 계보 속에서 성장하였다.
남인파의 실권은 정약종 성현과 형제들로 하여금 학구 생활에 전념할 수 있게 하였고,
결과적으로, 이 가정은 당대로 저명한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성현의 형인 정약전 선생 (1758-1816)과 동생인
정약용 선생(1762-1836)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 학자들이었다.
특히 정약용 선생은 학문 연구 생활 중에 천주교 교리를 배웠고, 입교하여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며,
한국 지성사에 있어서 손꼽히는 인물로서 다방면으로 자신의 많은 저서들을 통해서 새로운 사상을 내놓아
오늘날까지도 학계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십자가의 길
단지 “기도를 바친다”기보다, 신앙 선조들과 함께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깊은 영적 친교와 경건함을 체험하게 해주신
조한건 신부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출처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굿뉴스, 각 성지 홈페이지 등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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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두선교순례단,성지순례,구산성지,마재성지,양근성지,천진암성지,5월9일순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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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교구 산청성당 구역장.반장 15명 나가사키 2박3일 (2026.5.15-17)모습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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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오완수
2026-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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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5.15-18(3박4일), 나가사키 성지순례는 인천교구 해안성당 구역,반장 과 전국에서 모인 형제.자매들과 인천공항에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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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오완수
2026-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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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교구 선교순례단(인준단체) 5월 9일 성지 순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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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서울대교구가두선교순례단
2026-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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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 7/3, 9/17 출발 필리핀성지순례 성인축일기념 특별모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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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안충용
2026-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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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교구 선교순례단(인준단체) 6월 13일(토) 성지 순례자 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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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서울대교구가두선교순례단
2026-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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