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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3주간 화요일] 하느님의 빵 (요한6,30-35)

146215 김종업 [rlawhddjq] 스크랩 2021-04-20

 

2021년 4월 20일 화요일

[부활 제3주간 화요일] 하느님의 빵 (요한6,30-35)

   “나는 생명의 빵”

 

1독서<주 예수님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사도7,518,1)

그 무렵 스테파노가 백성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말하였다.

51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여러분도 여러분의 조상들과 똑같습니다.

52 예언자들 가운데 여러분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은 의로우신 분께서 오시리라고 예고한 이들을 죽였습니다그런데 이제 여러분은 그 의로우신 분을 배신하고 죽였습니다.

53 여러분은 천사들의 지시에 따라 율법을 받고도 그것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54 그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화가 치밀어 스테파노에게 이를 갈았다.

55 그러나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그가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니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56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57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그리고 일제히 스테파노에게 달려들어,

58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다그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었다.

59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60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스테파노는 이 말을 하고 잠들었다.

8,1 사울은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하고 있었다.

 

화답송 시편 31(30),3ㄷㄹ-4.6과 7과 8.17과 21ㄱㄴ(◎ 6ㄱ 참조)

◎ 주님제 목숨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알렐루야.

○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당신은 저의 바위저의 성채이시니당신 이름 위하여 저를 이끌어 주소서

○ 제 목숨 당신 손에 맡기오니주님진실하신 하느님저를 구원하소서.

오로지 주님만 믿나이다당신 자애로 저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비추시고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당신 앞 피신처에 그들을 감추시어사람들의 음모에서 구해 내소서

 

복음<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요한6,30-35)

그때에 군중이 예수님께 30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31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33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34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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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 제3주간 화요일 제1독서 (사도7,51~8,1ㄱ)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51)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55)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다그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었다." (58)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51)

사도행전 7장 2절에서 50절까지 스테파노 부제는 예수님 복음의 정통성과 유대인의 오류를 이스라엘 역사를 가지고 논증했다율법과 (예루살렘)성전을 절대시하는 유대인 그들 스스로가 율법을 어기며 성전을 우상시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 스테파노 부제(보조자)의 변론의 결론에 해당하는 본문에서는 보다 직접적으로 지금 현재 스테파노 부제의 말을 듣고 있는 산헤드린 최고 회의 의원들의 죄악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최고 의원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에 대한 그의 직접적인 책망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성령을 거역하고 있다는 것이고(51), 둘째는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슬려 행한다는 것이며(52), 셋째는 하느님께서 주신 율법을 거슬려 행한다는 것이다(53).

 

스테파노 부제는 그들을 향해 '목이 뻣뻣한 사람들아'라고 부른다이것에 해당하는 단어 '스클레로트라켈로이'(sklerotracheloi)의 원형 '스클레로트라켈로스'(sklerotrachelos)는 '목이 뻣뻣한(곧은)'이란 의미이며비유적으로 '완고하고 고집이 센'(stubborn and obstinate)이라는 뜻이다.

즉 '교만하다'는 의미보다는 '자기 욕심과 고집으로 가득차서 하느님의 말씀에 전혀 순종하려 들지 않는다'는 의미가 더 강하다.

 

하느님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고 책망하신 적이 있다(탈출33,5).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라는 말도 표현만 다를 뿐, '목이 뻣뻣한 사람들아'라는 의미와 유사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에 대하여 가장 명예롭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할례'였다그래서 그들은 이방인들을 일컬을 때,'할례받지 않은 자'라고 칭하면서 업신여겼다(창세34,14; 판관14,3; 1사무17,26; 1역대10,4).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외적으로는 할례를 받았서도내적으로는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레위26,41; 신명10,16; 예레4,4; 9,26). 즉 그들의 마음은 항상 죄의 정욕으로 가득차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 둔감하였고 들으려조차 하지 않았다.

특히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다'는 표현이 그 사실을 잘 말해준다이러한 경향은 이스라엘 조상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도 동일하였다(마태23,37; 요한5,59).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사야 63장 10절 '그러나 그들은 그분의 거룩한 영을 거역하고 괴롭혔다그래서 그분께서는 그들의 적이 되시어 몸소 그들과 싸우셨다라는 구약의 표현을 상기시키지만이보다 훨씬 더 강한 표현이다.

 

'거역하고'에 해당하는 '안티핍테테'(antipiptete)가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현재형으로 쓰였을 뿐 아니라 '줄곧'으로 번역된 '아에이'(aei)는 '영원' (eternity)을 뜻하는 '아이온'(aion)과 관계된 단어로서 '끊임없이', '영원히', '변함없이'라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이것은 성령에 대항하여 하느님의 뜻을 저버린 유대인들의 변함없는 완악한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55)

여기서 '하느님의 영광'이 무엇일까 먼저 빛이신 하느님(1요한1,5)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빛의 광채를 나타낸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사도행전 22장 11절에도 동일하게 '영광'을 나타내는 '독사'(doxa)라는 단어가 쓰였으며 ''(광채)으로 번역되었다.

바오로는 이 광채로 인하여 앞을 볼 수 없었다그러나 스테파노 부제는 그것을 눈으로 보았다고(에이덴; eiden)한 것으로 보아 본절의 '독사'(doxa)는 시력을 해칠 만큼의 강한 '빛의 광채'는 아니었을 것이다아마 이것은 하느님의 임재를 나타내 주는 표시(sign)였을 것이다.

 

타불산에서 제자들이 변모된 예수님께로부터 나오는 '영광즉 '독사'(doxa)가 시력에 손상이 없이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 스테파노 부제가 본 것은 이와 유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말하자면온 우주의 지배자이신 하느님과 그와 동일한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는 위엄(majesty)와 영광(glory)으로 이해할 수 있다(1베드4,11; 마태24,30).

 

그리고 '오른쪽에'로 번역된 '덱시온'(dexion)의 원형 '덱시오스' (dexios)는 말 그대로 '오른편'(right)를 뜻한다그런데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오른편은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자리이다(시편110,1).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위엄과 영광으로 충만하신 하느님과 그 위엄과 영광을 동일하게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유대인들로부터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죄로 죽임당한 예수님께서는 (마태26,65.66) 결코 신성 모독자가 아니라 진정 하느님의 아들로서 지금은 그의 예언 그대로(마태26,64) 하느님으로부터 영예로운 대접을 받으면서 영적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계신다는 사실까지 보여준다.

 

다음에 '서 계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드러내면서 믿음으로 순교의 자리에 서 있는 스테파노 부제를 격려하고 환영한다는 의미가 있으며스테파노 부제가 믿음의 순교자라는 사실을 하느님 앞에서 증언해 주는 증인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그러니까 '앉아 있다'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그만큼 관심을 가지고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테파노 부제(보조자집사)는 결코 혼자 쓸쓸히 죽어가는 것이 아니고하느님과 동일한 영광을 누리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믿음을 인정하고 증인으로 보고 계시는 가운데 순교하고 있는 것이다스테파노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누린 삶의 승리자였다.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다그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었다' (58)

일제히 달려든 유대인들은 스테파노 부제를 질질 끌고 예루살렘 성(밖으로 나갔다그들이 성 밖으로 나간 것은 죄인을 처형할 때 '진 밖에서행해야 한다는 율법의 규정(레위24,14)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죄인을 처형시킬 때 죄인의 부정(不貞)으로부터 예루살렘 성()의 거룩함을 보호하기 위해서 성(밖에서 쳐죽였다예수도 예루살렘 성(밖 골고타 언덕에서 처형당했다(루카23,33).

 

'돌을 던졌다'에 해당하는 '엘리토볼룬'(elithobolun)은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형이다이것은 스테파노를 돌로 치는 시간이 상당히 지속되었음을 암시한다즉 그들은 한 두번 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그들의 격정과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스테파노에게 연신 돌을 던졌던 것이다.

 

악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의 추악한 모습이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듯하다그들이 스테파노를 돌로 쳐죽인 것은 그들이 스테파노 부제의 발언을 신성 모독죄로 간주했기 때문이다유대 율법에서는 주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한 자나 다른 신을 섬긴 자 (신명13,9.10), 신접자나 박수 등의 무당들(레위20,27)에 대해 돌로 쳐죽이는 형벌을 명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유대인들이 스테파노 부제를 돌로 쳤다는 것은 그에게 사형을 집행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그들에게 사형 집행권이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그 당시 유대는 로마 통치하에 있었으므로 유대 최고 의회에서는 사형 언도 권한은 있어도 집행 권한은 없었다(요한18,31). 그렇다면 그들은 무슨 권한으로 스테파노를 처형했는가

 

첫째 그들의 행동이 로마 관리에게 쉽게 알려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은 스테파노 부제를 즉결 처형한 것이다유대 총독 빌라도는 예루살렘이 아닌 카이사리아에 살고 있었으므로예루살렘에서 스테파노 부제를 죽이는 일과 같은 사건이 터져도 쉽게 알 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설령 빌라도 총독이 알았다 하더라도 그 당시 그는 정치적 입지가 매우 불안했으므로유대 최고 의회를 구성하고 있는 유대 사회의 지도자급인 대사제를 비롯한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눈감아 줄 이유가 충분하였다고 볼 수 있다(요한19,12).

 

이러한 가능성이 상황적으로 볼 때 충분했지만그들이 스테파노 부제를 돌로 쳐 죽인 가장 큰 이유는 그들 자신의 부정과 오류를 정곡으로 찌르는 스테파노 부제의 말 (51~53)과 신성 모독적이라고 여겨지는 발언(56)에 이성을 잃고 격정과 분노로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증인들이 스테파노 부제를 돌로 쳐죽일 때 거추장스러운 겉옷을 벗어 둔 것은 어깨의 활동을 자유롭게 하려는 목적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쉬나(Mishinah)의 기록에 따르면죄인을 죽일 때 첫번째 증인이 죄인의 뒷머리를 잡고 숙이게 한 다음 돌로 쳐 넘어지게 하면두번째 증인이 돌을 들어 죄인의 가슴을 쳤으며그런 후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돌을 들어 집단적으로 던짐으로써 죽게 하는 잔인한 방법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한편여기에서 처음 언급하고 있는 사울이라는 이름은 바오로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되기 이전에 지니고 있던 이름이다사도행전 전반부의 핵심 인물이 베드로라면후반부의 핵심인물은 바오로인데바오로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

 

증인들이 그들의 겉옷을 벗어 사울의 발 앞에 둔 것은 권위있는 율법학자 가말리엘 문하 출신의 유력한 사울을 증인으로 확보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이때 사울은 스테파노 부제의 처형을 마땅히 여기면서도(사도8,1), 그의 당당한 순교 장면을 지켜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사도행전의 저자가 그리스도교인에 대하여 이처럼 반감을 가지고 있던 사울을 특별히 언급한 것은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 사건에 직접적인 핍박자로 연관되었던 자가 후에 위대한 복음 전파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서 복음의 위대성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부활 제3주간 화요일

죄의 부끄러움을 아는 자만이 용서의 귀중함을 안다

예수님의 말씀을 내 말()으로 듣지않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으면 생명자유입니다.

 

(요한6,30-36)

30 군중이 예수님께 다시 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표징은 사람의 눈으로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뜻으로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앞 29절에서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하셨는데 표징을 계속 요구하며 보고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만도 오천명이 넘는 이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표징을 보았습니다그런데도 또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못 알아듣고 오로지 자신들의 뜻을 위한 말씀으로 계속 듣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그 표징에 약합니다그러나 현세에서는 더 이상 표징이 없습니다. ‘여기있다 저기있다’ 하더라도 미혹당하지 맙시다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루가2,12) 너희는 한 갓난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바로 그분을 알아 보는 표이다하고 말하였다.

구유짐승들의 먹이통에 누우신 아기곧 예수님께서 구원의 양식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표징입니다.


(히브11,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


31(모세가)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보이는 모세를 통한 만나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주신 참된 하늘의 생명의 빵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33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34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예수님은 하늘의 생명의 빵을 말씀하셨는데사람들은 그 하늘의 빵으로 육에 생명을 위한 빵으로 달라고 하는 겁니다계속 말씀을 못 알아듣고 자신들을 위한 말씀으로 받습니다.


3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36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 34절에서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 그 빵을 늘 주십시오~했던 그 청함이 믿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성당을 다니면서 하늘의 생명을 위한 신앙이 아닌 육의 생명을 위한 모든 종교 행위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주셔야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필요한 것간청 해야지요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그 필요한 모든 것이 우리의 생명입니다곧 하늘의 생명의 표징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결코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다.’ 하셨는데정말 예수님을 믿으면 병에 걸리지 않고돈도 많이 벌고좋은 대학 가고출세도 하나요 아니죠 오히려 더 힘들지요그 세상의 것과 상관없는세상의 것에서 자유로워진다는 말씀입니다예수님으로말씀으로 영이 목마르지 않는 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의지하고 믿고 있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내려놓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 당신으로 배부르고목마르지 않게 할 거야하심입니다그럼 자유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그 자유를 얻었습니다.

(요한4,13-15.18-19.28-29.) 13 예수께서는 '이 우물물(육의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14 내가 주는 물(하늘의 생명의 물말씀)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하셨다. 15 이 말씀을 듣고 그 여자는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십시오그러면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하고 청하였다.

=사마리아 여자 역시 오늘 본문의 그들처럼 하늘의 생명의 물을 육을 위한 물로 받습니다. (우리 모두의 현실적 모습을 보라고 알려주심 입니다.)

그때 갑자기 예수님께서 남편을 데려 오라고 하십니다여자기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18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사실은 네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 대로 말하였다하고 말씀하셨다. 19 그랬더니 그 여자는 '과연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빛이신 예수님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이 드러나자자신의 그 부끄러움을 씻어줄 그분의 물곧 부끄럽지 않게 하는 생명의 물을 깨닫습니다.

건강을 잃어본 사람만이 생명의 소중함을 알듯이 죄의 부끄러움을 아는 자만이 용서의 귀중함을 압니다. 그래서 여자가 자신의 물이 부끄러움을 씻어줄 용서의 가치능력이 없음을 깨닫고~

28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에 돌아 가 사람들에게 29 '나의 지난 일을 다 알아 맞힌 사람이 있습니다같이 가서 봅시다그분이 그리스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하고 알렸다.

예수님의 물을 전하러 갑니다이웃 사랑입니다예수님의 말씀생명의 빵,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하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육의 만족을 주는 엠마오로 돌아가려 합니다그래서 늘자주 기억(기도)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그 자신의 물을 버리고예수님의 물(말씀)로 결코 목마르지않고 부끄러워 하지 않게 되었음을~

 

저희를 위한 자비의 샘이신 예수님의 성심에서 흘러나오는 피와 물이시여 당신께 의탁하나이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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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 제3주간 화요일 복음(요한6,30~35) 

"내가 생명의 빵이다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 (35)

 

'내가 ~이다'에 해당하는 '에고 에이미'(ego eimi; I am)은 요한 복음에서 자주 등장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이다이러한 문구의 자기 선언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누구인지 사람들에게 계시하기 위하여 쓰인 것이다.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나타내신다이 빵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와 구별되는 매우 특별한 것이다.

 

지금 유대인들은 전날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먹었던 육체적인 굶주림을 만족시킬 만한 '빵과 물고기'를 요구하고 있는데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빵으로 제시한다.

그들이 찾는 물질적인 빵은 일시적으로 생명을 유지시켜 주기는 하지만영원한 생명을 주지는 못한다반면에 '생명의 빵'이라고 스스로 선언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생명의 빵'에 해당하는 '호 아르토스 테스 조에스'(ho artos tes zoes; the bread of life)라는 표현에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생명이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요한1,4; 10,10).

이제 여기서 사람이 하느님께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유일한 비결이 나오는데그것은 예수님께 오는 것즉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과 '나를 믿는 사람'은 같은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누구든지 생명의 빵을 먹어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으려면 예수님께로 와야 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죄와 율법의 짐에 짓눌린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다 나에게 오라'(마태11,28)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예수님께 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누구인지 알기 위해 단순히 호기심 때문에 모이는 것과는 다르다.

'나에게 오는 사람'에 해당하는 '호 에르코메노스 프로스 에메' (ho archomenos pros eme; he who comes to me)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위해서 오는 사람을 가리킨다.

 

'에르코메노스'(erchomenos)는 '에르코마이'(erchomai)의 현재 분사이다희랍어에서 현재 시제는 대개의 경우 동작의 반복이나 계속을 나타낸다.

또한 '오다'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초대하시고 부르시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복음을 들은 사람들복음을 접할 기회를 가진 이들은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생각해야 하며이제 선택과 결단은 그 자신의 몫이 되는 것이다.

주님의 초대에 응하는 사람들에게는 위대한 약속이 주어졌는데,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라는 문장의 서두에 나오는 '우 메'(ou me)는 부정(否定)을 강화하여 '결코~아니'(never), '확실히~아니'(certainly not) 라는 뜻이 된다또한 '배고프지'로 번역된 '페이나세'(peinase; will go hungry)는 '페이나오'(peinao)의 부정(不定과거 가정법으로서, '우 메'(ou me)와 함께 미래의 사건을 가장 결정적으로 부정하는 역할을 한다.

 

'페이나오'(peinao)는 '주리다'(be hungry)는 뜻인데육신적 굶주림 뿐 아니라 강한 욕망을 나타낼 때 쓰이기도 한다.

당신에게로 오는 자는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은 구원의 때에 관한 예언(이사49,10)의 성취와 관련되는데이 예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 온전히 성취된다는 것이다.

 

한편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도 동사가 미래 시제로 쓰인 것 이외에는 문장 구조가 앞의 것과 같다.

즉 여기서도 '우 메'(ou me)라는 이중 부정을 사용해서 목마르게 되는 일이 결코 생기지 않을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특별히 '결코'로 번역된 '포포테' (popote; never; at any time)는 '아무 때든지', '한번도등을 뜻하며이것은 '영원히'라는 뜻 이상으로 '한순간도 빠짐없이'라는 매우 강한 뜻을 지닌다.

 

또한 '목마르지'에 해당하는 '딥세세이'(dipsesei; will be thirsty)는 '딥사오'(dipsao)의 미래시제이며이것은 육체적으로 갈증을 느끼는 것은 물론, '애타게 바라다'는 뜻으로도 쓰였다(마태5,6). 예수님을 믿을 때에야 비로소 사람이 참된 만족을 얻게 됨을 알게 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없는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누릴지라도참된 만족을 누리지 못한 채결국에는 허무와 절망불행과 좌절불안과 두려움에 싸여 살아가게 된다.

 

반면에 예수님께로 오는 사람은 설령 눈에 보이는 소유가 없을지라도 참된 만족과 기쁨이 그안에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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