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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0일 (토)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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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부활 제6주간 화요일

155251 조재형 [umbrella] 스크랩 2022-05-23

1980년대의 기억들입니다. 한국천주교회는 대규모 야외행사를 기획했습니다.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행사가 여의도에서 있었습니다. 박해와 시련을 견뎌낸 한국천주교회 최초의 대규모 야외행사였습니다. 당시 저는 고등학교 3학년으로 행사에 참여했습니다. 전날 비가 조금 내렸지만 행사 당일에는 햇살이 가득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구름 뒤에 십자가의 모습이 보였고, 그것을 찍은 사진이 있었습니다. 1984년에는 103위 성인의 시성식이 여의도에서 있었습니다.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시성식 미사를 집전하였습니다. 변방의 한국교회가 세상에 알려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신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서울 신학교에서 미사를 집전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이 성인품에 오르는 영광의 시간이었습니다. 1989년에는 44차 세계 성체대회가 한국에서 개최되었습니다. 한국천주교회는 국제적인 큰 행사를 주관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신학교 5학년이었습니다. 성체대회에 참가한 외국 순례자들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1980년대에 대규모 야외행사도 있었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광야에서 외치는 진리의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습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도록 길을 만들었습니다. 불의와 폭력에 쫓긴 사람들은 교회를 피난처로 삼았습니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은 학생들을 잡으러 온 경찰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 학생들을 잡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잡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 뒤에 사제들을 잡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수도자들을 잡아가야 할 것입니다.” 경찰들은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였고, 학생들은 모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가톨릭 청년 성서 모임이 있었고, 성서 40주간이 있었고, 성서 100주간도 있었습니다. 레지오, 꾸르실료, 엠이, 구역모임은 신앙인들이 함께하는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단과학원의 강의처럼 예비자 교리에도 진리를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본당은 분가하였고, 신축 성당이 새워졌습니다. 제가 있던 본당도 지금은 7개로 분가되었습니다.

 

40년의 시간이 흘러 지금은 2022년입니다. 교회는 2021년 교회의 통계를 발표하였습니다. 65세 이상의 신자가 20%가 넘는 고령화 교회가 되었습니다. 주일미사 참례자는 전체 신자의 8%가 되었습니다. 물질과 자본이라는 마귀는 2000년 전에 예수님을 유혹했던 것처럼 여전히 교회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권위주의는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그 위선을 탓하였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호산나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것처럼 우리들의 신앙도 약해지고 있습니다. 팬데믹의 바람 앞에 쉽게 넘어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더 이상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지 못한다면, 교회가 더 이상 불의와 폭력에 희생되는 약자들의 피난처가 되어주지 못한다면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오기 마련입니다. 겨울이 가면 또 봄은 오기 마련입니다.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새순이 나왔듯이 교회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이야기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의 성령입니다. 진리의 성령께 의탁하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이 밝혀질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세상의 그릇된 기준은 무엇입니까 부정한 여인을 돌로 치려했던 단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는 이들이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정한 여인의 죄를 묻지 않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의로움을 독점하려고 하는 권위주의입니다. 의로움은 권위주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의로움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봉사에서 드러납니다. 십자가를 지는 희생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한 빌라도의 심판은 불의한 심판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를 보기 전에 내 분에 있는 큰 들보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지만 감옥에 머물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모든 것을 버린 바오로 사도의 행위를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목숨을 버리려했던 간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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