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7일 (수)
(백)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본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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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전국 교구 교구장 부활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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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goodnews] 쪽지 캡슐

2022-04-15 ㅣ No.2519

2022년 전국 교구 교구장 부활메시지

 

서울대교구

광주대교구

대구대교구

대전교구

마산교구

부산교구

수원교구

안동교구

원주교구

의정부교구

인천교구

전주교구

제주교구

청주교구

춘천교구

군종교구

 

 

 

[서울대교구]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요한 11,43)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 부활의 은총과 생명이 온 세상에 함께하기를 빕니다. 특별히 우리와 한 형제인 북한의 형제들, 또한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는 분들이 하루빨리 평화를 되찾아 부활의 기쁨을 누리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자연의 생명이 움터 나오는 봄과 함께 부활 대축일을 맞이했습니다. 그동안 코로나19로 움츠렸던 우리의 삶이 바야흐로 새로운 생명의 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제 팬데믹이 정점을 지나 진정의 국면으로 들어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팬데믹으로 움츠려 들었던 우리도 이제 그만 각자의 ‘동굴’에서 나오라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생명으로 불러내십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통해 라자로의 소생을 다시 보면, 이 사건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우리의 부활에 대한 예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자신의 부활에 대한 약속이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1코린 15,13)
  지난 2년 반 동안 코로나19 감염병으로 인해 우리 모두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기 어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 자체가 금지됐던 기간에는 미사도 직접 참례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이 어려운 시간 동안 평화방송 미사나 인터넷 방송 미사가 그나마 많은 위로를 주는 통로의 역할을 고맙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각자의 ‘동굴’에 ‘안전하게’ 또 더러는 ‘안일하게’ 방송 미사에 안주하고 싶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하고 불러내시는 듯합니다. 신앙은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이고, 방송으로는 미사의 성사성을 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방송으로 미사를 시청하는 것은 실제로 미사 참례하는 것은 아니기에 완전한 미사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만, 다만 몸이 불편하셔서 부득이 성당에 오실 수 없는 분들에게는 여전히 고마운 도구로서 ‘말씀을 묵상하는 기회’로 역할을 계속할 것입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죽었던 이를 칭칭 감싸고 있던 천’을 풀어 주어 우리를 자유롭게 걸어가게 해주십니다. 코로나를 겪으며 알게 모르게 더 고착되어 있고 우리를 감싸고 있는 ‘이기심’이라는 천, 이웃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꺼리는 ‘두려움’의 천, 편안함에 길들여진 ‘안일함’의 천들을 벗어버리고, 하느님 안에서 참 생명의 자유로움으로 나아오라는 초대입니다.

  새봄, 새싹이 돋는 놀라운 생명의 봄에 우리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으로 초대해 주시는 부르심을 들으며, 자연의 위대함 속에 숨어있는 하느님 선물을 보게 됩니다. 봄의 생명력은 예수님의 부활이 주시는 생명의 선물입니다. 이 생명의 부활절에 저는 세 가지 작은 묵상점에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자연의 위대한 생명력과 회복력 안에 담겨있는 생명의 신비에 감탄하고 감동할 수 있는 따뜻한 감수성을 다시 회복해 나갑시다. 뺨을 스치는 봄바람에도 까르르 웃을 수 있었던 그 약동하는 생명의 감수성은 어디로 사라져버리고 무덤덤과 무표정, 무관심이 우리를 감싸고 있게 내버려 두지 맙시다. 소외된 이웃들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할 수 있는 마음의 따뜻함을 회복하고 그 사랑을 실천해 나갑시다.
  이 생명의 봄, 부활한 생명의 계절을 통과하며, 참 생명이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묵상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의 삶이 팍팍해졌을지라도,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의 생명이 어디로 가는지 하는 궁극의 목적을 잃은 채 의미 없는 분주함에 우리의 삶 전체가 매몰되지는 맙시다. 이 봄의 생명력이 일깨우는, 예수님 부활의 선물인 생명, 그 근원이자 우리가 결국 돌아갈 궁극 목적지인 하느님을 다시금 만나는 시간이 되어 봅시다.
  우리가 받은 생명을 감사하며 기쁘게 하느님께 사랑의 열매를 바쳐드리기로 결심해 봅시다. 한때 유행했던 표현으로 ‘까르페 디엠’(carpe diem, ‘오늘을 잡아라’, ‘현재를 즐겨라’)이라는 라틴어 표현이 있습니다. 참으로 ‘현재를 즐기는 모습’은 그저 ‘젊음을 엔조이’하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실은 ‘하느님께 깊이 감사할 수 있을 때, 현재를 진정으로 즐기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연의 생명력 안에 지금 우리에게도 선물해 주시는 참 생명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하루하루에 감사하며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힘찬 발걸음을 시작합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죄인인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당신의 피를 흘려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씻어주시고, 마침내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새 생명을 다시 주십니다. 이 봄의 생동하는 생명력 안에 담긴 하느님 생명의 선물을 감사하며, 우리 각자의 힘든 삶 안에도 속 깊이 담겨있는 생명의 선물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곧 새로운 정부가 출범합니다. 새롭게 출범하는 정부에게 당부를 드립니다. 2년 이상의 코로나 사태로 어려우신 분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을 잘 챙겨주는 정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정치적 이념을 떠나 다양한 세대, 다양한 지역,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시고, 우리가 모두 서로 소통하며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들어 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큰 고통을 받고 있는 형제자매들이 하루빨리 전쟁이 끝나 일상의 삶을 회복하기를 평화의 성모님께 전구해주시기를 특별히 부탁드립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온 세상에 가득하기를, 여러분의 가정에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 평양교구장 서리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광주대교구]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죄와 죽음을 이겨내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죽음이라는 암흑을 뚫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제자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만물에게 새로운 생명의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정점이며, 우리에게 삶의 가장 완벽한 희망을 제시해 주는 새로운 존재 양식입니다. 새로운 존재 양식이란, 우리의 물질주의적이고 이기적인 행동 방식이 예수님의 이웃에 대한 사랑과 자비, 용서의 방식으로 바뀌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은 바로 오늘 우리의 삶 안에서 시작되어야 하기에 우리의 일상 안에서 찾아오는 십자가와 수난을 신앙인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 안에서 희망을 찾고 만들어가는 은총을 부활하신 주님께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의 삶 안에서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의 현실은 벌써 3년째 접어들고 있는 코로나19의 긴 터널을 아직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모든 형제들」에서 언급하셨듯이, 우리는 이미 교통과 통신에서 지구촌이라고 불릴 만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온 세계가 모두 힘을 모아 이 감염병을 이겨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서로가 너무나 밀착된 우리의 삶이 육안으로도 볼 수 없는 바이러스의 전파력을 이겨내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서로에 대한 관심과 함께 서로에 대한 배려 깊은 거리두기도 깊이 성찰하고 실천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국제적으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수많은 사상자와 난민이 생겨났고, 전 세계적인 전쟁으로 번질 위험까지 내포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미국과 서방세계의 팽팽한 힘겨루기 속에서 그사이에 끼어있는 우크라이나는, 이번 러시아의 침공으로 천 명이 넘는 사망자와 수백만에 이르는 난민이 고통을 받고 있고, 강대국과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그 생존권조차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림으로써 전 세계적으로 곡물 가격이 상승하고 기근이 더 심해지는 영향을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더 나아가서 러시아와 서방의 협상이 잘 이루어져서 전쟁을 멈추고, 모두가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는 평화의 여정이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요즘 겪고 있는 현실이 때로는 절망스럽고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 속에서도 주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에게 큰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라고 사도 바오로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진정한 죽음이 있어야 부활할 수 있고,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사건을 통해 이집트 노예생활로부터의 해방인 파스카를 경험했듯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은 새로운 생명이며 동시에 자유요 해방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눈앞에 펼쳐진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비록 현재의 어려움이 무겁고 비극적이라고 해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잘 이겨내시고 부활로 승리하셨듯이, 우리도 모든 어려움들을 잘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키워내야 할 것입니다. 지친 세상에 기쁨과 희망을 주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자, 우리 광주대교구는 3개년 특별전교의 해를 지내며,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가 모두 함께 참여하는 하느님 백성의 대화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이 세상에 우리가 외쳐야 하는 기쁨과 평화는 어떤 것인지 성찰하고, 또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우리가 먼저 주님의 말씀을 살아가기 위한 쇄신의 노력도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앞으로 교구에서, 그리고 각 지구와 본당에서도 계속될 우리의 이런 노력이 세상을 향해서는 빛과 소금이 되고, 우리 스스로에게는 밝은 미래를 약속해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지금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 반포 5주년(2021년 3월 19일)을 맞이하여 「사랑의 기쁨 가정의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우리가 성가정을 본받으며, 가족 단위의 교육적 가치를 재발견하도록 초대하시면서 “가정의 가치란 희망의 지평을 열며 늘 관계를 새롭게 하는 사랑에 토대를 두라고 요구합니다. 가정이 기도의 집이 될 때, 가족애가 진지하고 깊고 순수할 때, 용서가 불화를 지배할 때, 삶의 일상적인 쓰라림이 상호 간의 따뜻한 애정과 하느님의 뜻을 진지하게 따름으로써 가라앉게 될 때, 가정 안에서 진정한 친교를 경험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런 방식으로 가정은 기쁨으로 자신을 내어줄 줄 아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에 비로소 마음을 엽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자신을 닦고, 가정을 돌보며, 우리 교회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를 만들어갈 때, 우리나라와 온 세상의 평화도 우리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초대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시작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해주시고, 모든 가정에 은총과 평화를 가득히 내려주시길 기도합니다. 부활 축하드립니다!

2022년 4월17일 주님 부활 대축일
천주교 광주대교구
교구장 김 희 중 히지노 대주교

 

 

 

[대구교구]

부활(復活)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루카 24,5-6)



 1.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마침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는 누구나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니 부활 사건은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인간에게 운명처럼 뿌리내린 죄와 죽음의 세력은 꺾이고 하느님 자녀로서의 새로운 삶이 주어졌습니다. 이러한 신앙을 바탕으로 우리는 희망을 품고 기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2.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는 이 세상은 여전히 밝지만은 않습니다. 세상은 질병과 전쟁,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는 문화, 온갖 갈등으로 인한 분열, 환경 문제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먼저, 3년째 지속되는 코로나19의 상황은 막바지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 기세가 맹렬합니다. 그로 인해 나빠진 경제 상황으로 자영업자들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또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무자비한 전쟁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이 죽거나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미얀마의 민주화 투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그 밖의 많은 분쟁 지역에서도 전쟁과 테러는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난민들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많은 갈등과 분열을 야기합니다. 세계적인 감염병 대유행으로 인한 마스크와 일회용품 사용의 폭증은 환경보호를 위한 우리의 노력을 무력하게 합니다. “공동의 집”인 우리 지구는 환경오염과 온난화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세상은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여 축하를 나누고 있지만, 현실은 마치 죽음의 세력이 승리한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3. 이러한 현 상황 속에서 우리는 부활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부활의 기쁨을 어떻게 전하며, 부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죽음의 세력이 아직도 기세를 떨치는 세상 한가운데서 부활을 맞이한 우리 신앙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올해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낙심하지 말고 계속 좋은 일을 합시다. 포기하지 않으면 제때에 수확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합시다.”(갈라 6,9-10)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들려주시며, 상황이 어렵더라도 희망을 잃지 말고 인내의 은총을 얻기 위해 기도하자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시대에 구원의 씨앗을 심으면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위대한 희망으로 지상의 희망에 생기를 줍니다. 산산이 부서진 꿈들에 대한 씁쓸한 낙담, 눈앞에 놓인 도전들에 대한 깊은 걱정, 턱없이 부족한 자원에 대한 좌절은 우리가 이기주의에 갇히고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에 숨어 버리려는 유혹을 받게 할 수 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사순시기 담화문」) 교황께서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우리 삶의 악을 뿌리 뽑으며, 적극적인 애덕으로 선행을 해 나가자고 독려하셨습니다.

4. 우리도 희망을 가집시다.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제때에 수확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언 땅을 뚫고 새싹이 움트듯, 두꺼운 껍데기를 깨고 병아리가 태어나듯, 애벌레가 고치 속에서 오랜 시간을 견뎌 내어 나비가 되어 날아가듯 이 어두운 현실을 이겨 내고 부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최근에 대선을 통해 새로운 정부의 시작을 맞았습니다. 과학적이고 철저한 방역으로 감염병을 이겨 내고 국민통합과 경제발전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코로나19로 인해 움츠렸던 신앙생활을 다시 회복해 나갑시다. 성당에 모이기 힘들다는 이유로 집에서 혼자 또는 가족끼리 비대면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편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를 핑계 삼아 영적 나태함을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과의 만남’이며, 교회는 ‘하느님 백성의 모임’입니다. 감염병의 위험은 이러한 만남을 방해했지만, 이제 다시 일상을 회복하면서 우리는 교회에 모여 하느님을 만나야 하고, 하느님 백성인 형제들과 만나야 할 것입니다.

5.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교구 공동체는 ‘복음의 기쁨을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라는 장기 사목 계획 아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올해는 ‘하느님 말씀을 따라’라는 주제의 두 번째 해로서, 하느님 말씀에 힘입어 하느님 말씀 안에서 힘과 희망을 얻어 기쁘게 살아가고자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안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말씀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갈 때, 어두운 세상 안에 살면서도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품고 하느님 자녀로서의 삶을 기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 교회는 2021년부터 2023년까지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친교, 참여, 사명’이라는 주제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시노드)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의 대유행과 분쟁, 기후 변화, 차별, 폭력, 박해 같은 불평등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세계적 위기 속에서 우리는 ‘함께 가는 여정’을 걸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시노드를 열어 하느님 말씀과 형제자매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지금은 교회와 세계 모두에게 결단의 시기입니다. 우리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고, 한 몸의 여러 지체를 이루며 각자 고유한 가치와 역할을 가집니다.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경청하며,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6. 다시 한 번 주님의 부활을 축하드리며, 여러분의 매순간이 부활의 삶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부활(復活)’이란 말 그대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이전과 같은 삶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삶입니다. 과거의 악습에 물든 ‘죽은 삶’이 아니라, 희망으로 가득 찬 ‘새로운 삶’입니다. 아울러 우리의 삶을 보고 세상이 희망을 갖게 합시다. 세상이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죽음의 문화를 극복하여, 다시 삶으로 나아가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와 저희 교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성 이윤일 요한과 한국의 모든 성인과 복자들이여, 저희와 저희 교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2022년 4월 17일 주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조환길(타대오) 대주교

 

 

 

[대전교구]

2022년 주님 부활 대축일 교구장 메시지

 

 

  + 오소서 성령님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님 부활의 기쁨과 은총을 교구의 모든 형제·자매님들과 함께 나눕니다. 
저는 이번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먼저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하여 발생한 많은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이 사태에 큰 우려를 갖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께 의탁하고 봉헌하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함께 기도하기를 청하셨습니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죄로 인해 갈라졌던 하느님과 인간을 다시 결합시키는 화해와 평화의 사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2코린 5,21)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아들을 희생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는 지극히 거룩한 이타심을 보여주셨지만, 아직 이 세상에는 개인과 집단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의 이기주의가 힘을 발휘하면서, 때로는 죄 없는 많은 형제들이 희생되고 있습니다. 

부활 대축일 밤 미사 독서에는 구원의 역사를 요약하는 7개의 구약성경 구절이 있는데, 그 첫째가 세상과 인간 창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고, 그래서 하느님의 대리자로 이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셨다는 이 성경 말씀은 우리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잘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인간의 모습은 이웃 형제에 대하여 그리고 자연 생태계에 대해서도 ‘하느님을 닮은 착한 목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닮은 사람이 하느님처럼 사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받는 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면서 받은 하느님 닮은 씨앗이 꽃을 활짝 피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믿는 이들은 모든 형제들을 하느님을 닮은 거룩하고 소중한 사람으로 대하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올바른 신자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세례를 받았든 받지 않았든, 건강하든 아픈 사람이든, 사회적인 직위가 높든 낮든 아무 차별 없이 사랑받고 존중받는 형제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창조하신 모든 인간을 위하여 당신 아들을 십자가 위 희생제물로 삼으셨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이 뜻을 실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부활의 생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태초부터 하느님께서 계획하셨고 모든 사람이 원했던 신비가 하느님의 아들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로 성취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일 년 전례 가운데 파스카 성삼일 전례를 가장 성대하게 거행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부활의 이 은총을 항상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주님 안에서 어떤 사람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 은총을 늘 새롭게 기억해야 합니다. 믿는 이들이 이 은총을 매일 가장 확실하게 기억하게 해 주는 것은 말씀과 성사입니다.
말씀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자비로운 역사를 뚜렷이 보여주면서 오늘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목소리입니다. 말씀을 읽고 필사하며 함께 공부하면서 나누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고, 많은 신자들이 함께 하고 있어서 감사합니다. 말씀에 대한 사랑이 우리 안에서 더욱 깊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성사는 주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은총을 누리도록 주님 친히 제정해주신 것이고, 그 가운데 우리의 일상생활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고해성사와 성체성사 곧 미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그 용서의 은총을 사도들에게 고해성사로 남겨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시어 우리 가운데 살아계시는 주님께서는 성체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건네주십니다. 사제들이 이러한 고해성사와 성체성사 거행에 온 힘을 기울여 수행하면서 거룩한 기쁨을 맛보고, 신자들은 성사에 자주 참여하여 진실로 주님다운 주님을 만나는 공동체가 되기를 빕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에게 지극한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주님께서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가 6,36)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처럼 살라고 주시는 거룩한 명령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다고 믿어주십니다.
우리는 가진 것을 이웃에게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지극한 자비를 입고도 깨닫지 못한다면, 이웃 형제들을 사랑하는 자비로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늘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사람이고, 주님의 지극한 자비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늘나라의 상속자입니다. 이 복음을 마음에 항상 간직하고, 이웃 형제들에게 주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자비롭게 살아갑시다.
교구의 모든 형제·자매 여러분에게 주님 부활을 축하하고 함께 기뻐하는 인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완전한 친교로 인간을 구원하시고 이끌어주시는 하느님, 저희에게 강복하소서.
교회의 어머니이시며 교구의 주보이신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님, 저희를 보호하시고 이끌어주소서.
한국 교회의 순교 성인과 복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2022년 4월 17일 주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대전교구장 주교 
김종수 아우구스티노

 

 

 

[마산교구]

부활 신앙의 생활화

 

 

  사랑하고 존경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고 영광스럽게 부활(復活)하신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 각자와 가정, 그리고 여러분의 공동체에 충만하시길 빕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들과 추종자들에게 말할 수 없는 큰 절망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산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충격이었고, 허리케인(hurricane)이나 쓰나미(tsunami)가 휩쓸고 간 뒤의 아수라장(阿修羅場)과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예수님께 걸었던 모든 기대와 희망이 갑자기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을 확인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자들은 모두 놀라며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주님께 대한 믿음을 키워가면서,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절망에서 벗어나 새로운 희망의 삶을 살았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사람들에게 힘차게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원한 생명의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교회도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이 확실하게 드러나면서 유다 지도자들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인식과 함께, 초대 교회의 부활 신앙은 불길처럼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새판 짜기와 같이 인류 역사의 흐름이 크게 변해갔습니다.

첫째, 안식일(安息日)이 주일(主日)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만 해도 사람들은 구약의 관습대로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부활 이후에는 일요일을 주일, 즉 주님이 승리하여 부활하신 날로 정하여 공식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렇게하여 우리는 안식일 대신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게 되었고, 주일의 미사성제는 모든 전례의 기초를 이루고 있습니다.

둘째, 십자가 경배(敬拜)입니다.
십자가는 그 당시 사형 도구로 사용되어, 고통과 죽음을 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로 십자가는 경배의 대상으로 바뀌면서, 구원과 생명을 주는 것으로 그 의미가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곳곳에 여러 가지 형태의 십자가를 모시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외적으로 드러내는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셋째, 역사(歷史)의 시대적 구분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구약(舊約)과 신약(新約), 기원전(紀元前)과 기원후(紀元後)는 예수님을 기준으로 정해졌습니다. 예수님 탄생 이전의 약속을 구약이라 하고, 그 이후의 약속을 신약이라고 합니다. 또 기원전은 B.C, 즉 before Christ라고 하며, 기원후인 A.D.는 anno Domini라 한다.

넷째, 그리스도교 사상(思想)입니다.
예수님 부활 후부터는 예술과 문화, 정치와 교육, 경제와 법률 등 모든 분야의 바탕에는 그리스도교 사상이 깔려있습니다. 또 인생관과 가치관, 윤리 도덕의 기준도 대체로 그리스도교 사상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그리스도교 사상이 인류의 정신세계를 주도해 나가고 있습니다.

다섯째, 죽음 후의 영생에 대한 확신(確信)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한 이유는 죽음의 의미와 그 이후의 삶에 대하여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부활도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옮아가는 과정(過程)임을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에게 가장 큰 사건이었고, 동시에 성탄과 함께 두 개의 축을 이루며 그리스도교 신앙의 신비(神祕)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우리는 죽음을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죽지 않으면 새로운 생명에로의 부활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는 것이 영원히 사는 것이며, 결국 승리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살고 너는 죽어야 하는 세속적인 논리’보다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신앙적인 논리’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가 갈라 2,20에서 말한 것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내 안에 사시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바오로는 박해자였지만, 주님을 만나고서는 과거의 삶을 회개(悔改)하고 새롭게 살아갔습니다.

신자 여러분!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 구원 사업의 절정(絶頂)이었고, 동시에 우리 모두에게는 신앙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실망과 좌절에서 벗어나 부활의 선포자가 되었듯이, 또 바오로가 박해자에서 복음 전파의 사도가 된 것처럼 우리도 부활 신앙을 생활화하여 더욱 성숙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한 번 더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여 여러분 모두에게 축하드리면서, 부활하여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의 은총을 많이 받으시길 빕니다.

2022년 4월 17일
주님 부활 대축일
총대리 최봉원 야고보 신부

 

 

 

[부산교구]

2022년 주님 부활 대축일에 여러분께 축하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사랑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그리고 성직자, 수도자 여러분.

2022년 ‘주님 부활 대축일’이 우리에게 큰 은총으로 다가왔습니다. 아직도 그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고 우리 모두를 힘들게 하는 <코로나-19> 대유행과 더불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어수선한 세계정세 등으로 우리의 삶이 제한을 받고 움츠려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 놀라운 은총의 축제인 주님 부활 대축일은 다 같이 기뻐하고 축하하고,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이 가득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아울러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코로나-19> 대유행으로 힘들어하시는 모든 분들께 큰 위로를 드리며, 안타깝게도 코로나로 인해 세상을 떠나신 영혼들의 영원한 안식을 기도합니다.
이런 여러 어려운 상황 속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성무에 충실하고 역할을 해주신 신부님들과 수도자 여러분의 정성과 노력에 큰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교형 자매여러분께서는 교무금, 주일헌금, 미사예물, 감사헌금과 특별헌금 등을 정성껏 내어주시며 여러모로 교구와 본당 운영에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물적 도움으로 교구와 본당은 어려움 중에서도 순탄하게 운영되고 있습니다. 특히 2021년 주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 실시된 <백신 나눔 모금>과 성체 성혈 대축일 2차 헌금 총액은 641,838,534원이었습니다. 봉헌된 전액을 교황님께 보내드렸고, 교황님께서는 감사의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2021년 6월 27일자로 제가 지면으로 여러분께 감 사인사를 드렸습니다.
<코로나 기금 모금>에도 많이 협조해 주신 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코로나-19> 대유행의 종식을 모두들 기다리고 희망하고 있지만 쉽게 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확진자 수는 많이 늘어났고, 중증환자와 사망자 수도 적지 않지만, 그래도 ‘위드 코로나, 엔데믹’ 등을 외치면서 보다 정상적인 삶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큰 위협을 받아왔습니다. 미사 참례뿐 아니라 소모임도 제한을 받아 레지오 회합을 포함한 모든 활동들이 중지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어느 정도 완화되어,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미사 참례도 가능하고 소모임도 허용되고 있습니다. 어려움 중에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신 여러분들께 큰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여러 이유로 미사 참례 등을 포함한 신앙생활에 잠시나마 쉬고 계시는 여러분들도 신앙의 끈을 놓지 마시고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와 희생과 자선으로 신앙인의 자세를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이 고난의 시간이 종식되어 신앙생활이 자유롭게 될 때 다시 신앙의 공동체로 돌아오시어 주님과 함께하는 기쁨과 행복의 삶에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그날의 기쁨을 하루빨리 나눌 수 있기를 마음 모아 간절히 기도드립시다.
여러분의 사랑과 정성이 넘치는 모든 손길에 주님께서 풍성한 은총으로 보답해주시기를 간구하며,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축복을 전해드립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계십니다.”
(콜로 3,1)
2022년 주님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부산교구장
손 삼 석 요셉 주교

 

 

 

[수원교구]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요한 20,9)

 

 

  † 소통과 참여로 쇄신하는 수원교구!그리스도 안에서 일치!

사랑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1.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주님께서 돌아가신 지 사흘째 되던 날, 어둠이 걷히고 동이 틀 무렵 주님을 그리워하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음을 목격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슬픔과 절망 속에서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13).”라고 전합니다. 마리아의 목소리에서 슬픔과 절망이 베어나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19, 전쟁과 분쟁, 자연재해 등으로 어둠과 죽음의 그늘 밑에서 힘겨워하고 있는 우리 목소리와 닮았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다가오셔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마리아야!(요한 20,16)” 마리아에게 위로가 되었던 이 부르심은 슬픔과 절망 속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힘이 됩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라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인 우리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키시는 자비와 사랑이 가득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선택
주님 부활은 그분의 자비가 얼마나 크신지 알려주는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그 자비에 힘입어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희망으로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부활 사건을 통해 우리가 당신의 자비를 입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비로운 아버지의 사랑을 전하도록 파견하십니다. 특히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 의지할 곳 없이 버려진 사람을 향하게 합니다. 이번 사순 시기 동안 “사랑으로 가진 바를 나누자!”라는 실천 운동은 우리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그들과 함께 사랑을 나누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주님 부활의 기쁜 소식은 생명이 죽음보다 강하며,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결국 승리한다는 희망의 복음으로 우리를 무장시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루카 10,29-37)처럼 버림받고 상처 입은 이들에게 다가가 이웃이 되어주는 주님 부활의 증인으로 나아갑시다.

3. 공동의 집인 지구
인류 공동의 집인 지구는 끊임없는 개발과 성장에 대한 맹신, 무분별한 소비주의와 개인주의로 고통을 겪으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면한 기후 위기는 인류에게 닥칠 종말 예고가 결코 허구가 아님을 경고하고 있습니다(『찬미 받으소서』 161항 참조). 교회는 ‘찬미 받으소서 7년 여정’에 따라 ‘생태적 회개’를 실천하는 방안을 찾고 제시합니다. 교구, 본당, 가정 모든 공동체에서는 이 여정에 함께 하며, 검소하고 절제된 삶을 통해 어머니인 지구의 생태환경 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에 동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재생에너지를 기반으로 ‘2030년 교구 에너지 자립’과 ‘2040년 탄소중립사회로의 전환’이란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함께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모세를 통해 새로운 세상으로 이끄셨던 하느님의 파스카 신비,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신 하느님의 파스카 신비는 우리 시대의 생태적 회개를 통해 종말에서 지속 가능한 사회로 인도할 것입니다.

4.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
주님 부활의 기쁨을 경축하는 오늘, 온 교회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평화를 경축하며 노래합니다.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시어 그들 가운데에 서시며 말씀하셨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그리고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주시고,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21)” 그러나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내란과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으며 죽음 앞에서 애절하게 울부짖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국가 지도자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벌어진 우크라이나 전쟁은 온 인류에게 큰 슬픔과 고통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살육과 잔혹 행위가 반복되는 무분별한 학살’이라고 하시며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 모두 노력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3월 20일 삼종기도 후 말씀 참조). 또한 국제사회의 지도자들에게 전쟁 종식과 평화를 위한 노력에 전적으로 투신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우리도 힘과 마음을 모아 평화를 위해 노력하며 전쟁으로 상처 입고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우리 모두를 위한 평화이면서 우리 모두가 함께 지켜나가야 할 평화입니다(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설교집』 84,5 참조).

5. 온 누리에 평화가 깃들길 바라며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했습니다(요한 20,9 참조).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위해, 인간의 무분별한 오용과 파괴로 인해 고통을 받는 어머니인 지구를 위해, 전쟁으로 죽음에 내몰린 이들을 위해 빛과 희망을 선사하며 평화를 주시기 위해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님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복음화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자비를 실천하고, 공동의 집인 지구를 지키기 위한 생태환경을 회복하는 데에 함께 참여하며,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이들과 연대합시다. 그러면 우리 마음 안에 그리고 인류 공동체 안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온 누리에 흘러넘칠 것입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이 길에 우리 모두 온 힘을 모아 일치하며 정진합시다.

수원교구의 주보이신 평화의 모후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2022년 4월 17일
주님 부활 대축일에
수원교구장 이 용 훈 마티아 주교

 

 

 

[안동교구]

무덤의 “돌을 치워라.”(요한 11,39)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습니다. 그 무덤은 예수님께서 묻히신 무덤이었습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요한 20,1)고 말하는 복음의 표현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계시지 않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전하고자 합니다. 다른 복음에서 천사를 통해서 예수님이 무덤에 계시지 않고 "되살아나셨다."(마태 28,6; 루카 24,6)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무덤을 막는 돌은 다시 살기, 곧 부활을 거부하는 주검의 상징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어떤 이는 “무덤을 막은 돌은 삶을 방해하는 장애의 상징”(안셀름 그린)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과거의 짐일 수도 있고 숱한 생채기들일 수도 있어서 우리가 다시 일어나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게 방해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돌처럼 가슴을 짓누르는 어떤 특정인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것들은 마침내 우리를 조이고 막아서서 우리 모습 그대로 놔두질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생명을 살지 못하게 하고 죽이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누가 무덤을 막는 돌을 치우겠습니까? 복음은 주님의 천사가 무덤을 막았던 돌을 치우기도 하고 (마태 28,2), 예수님의 명령으로 사람들이 무덤의 돌을 치우기도 한다고 전합니다.(요한 11,41) 이때 무덤은 죽음을 상징하고, 무덤의 돌을 치우는 일은 죽어가는 생명을 다시 살리는 일이 됩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 세상에 파견되시어 우리 구세주로서 하신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생명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죽어가는 모든 생명을 살리고 구원하시는 일이 바로 우리 구세주 예수님의 첫 번째 일이 되었습니다. 그 일의 정점에는 예수님의 부활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친히 무덤을 막았던 돌을 치우시고 당신의 아드님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키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신 부활의 맏이가 되심으로써 우리도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요한 10,10) 복된 부활의 복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라 부활할 것입니다. 확실히 부활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은 끊어지지 않는 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같은 밧줄을 타고 등반하는 등반팀과 같습니다. 인도자인 그리스도께서 먼저 정상에 오르셨습니다. 남은 우리가 정상에 오르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인도자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먼저 정상에 오른 인도자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시고 지켜주십니다. 인도자가 목적지에 도착했다면, 뒤따르는 등반팀도 이미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부활도 그러합니다.”(「바로오늘」 기스베르트 그레샤케, 허찬욱 옮김)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것같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다시 살게 하십니다. 라자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시던 그 능력으로 다시는 깨어날 수 없어 보이던 절망과 죽음의 깊은 잠에서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라자로를 무덤에서 다시 살리실 때 하신 그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덤에서 “돌을 치워라.”(요한 11,39)

생명을 살지 못하게 가로막는 돌을 치워야 합니다. 불신과 의심의 돌을 치워야 합니다. 낙심과 절망의 돌을 치워야 합니다. 이기심과 탐욕의 돌을 치워야 합니다. 세상을 메마르게 하고 사회를 병들게 하는 온갖 죽임의 돌을 치워야 합니다. 생태적인 삶을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돌을 치워야 합니다. 부활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하고 방해하는 모든 돌을 치워야 합니다.

‘부활이란 죽음에 항거하는 일상의 투쟁’(한스 큉)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의 세력은 부활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노력을 결코 꺾지 못할 것입니다. 알렐루야!

2022. 4. 17. 주님 부활 대축일
천주교 안동교구장 권혁주 요한크리소스토모 주교

 

 

 

[원주교구]

2022년 부활메시지

 

 

  † 찬미예수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허망한 꿈이라고 하지만,
말도 안 되는 꿈이라고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주 신비로운 꿈이 있습니다. 
영원한 삶입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육신과 영혼이 영광스럽게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릴 것입니다. 그 때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으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060)

그리스도인들은 그 꿈이 이루어질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보았습니다. 
치욕스러운 십자가가 찬란한 구원의 십자가로 변하는 그 순간
무덤을 열고 부활하신 주님이 이곳 저곳에서 발현하시는 그 장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1코린 15,20-22)

자연은 변신을 보여줍니다.
애벌레가 나비로 변신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부활로 변신하듯 우리들의 몸도, 영혼도 변신합니다. 
“썩어 없어질 것을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나 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나 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봄입니다. 
겨울을 이겨냈습니다.
힘겨웠던 코로나-19도 그 정점에서 사그라집니다. 
시작한 것은 끝도 있기 마련입니다. 
희망은 시련과 인내에서 피어나는 꽃입니다. 
부활의 희망은 십자가의 고통에서 피어나는 꽃입니다.
부활의 희망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힘입니다. 

주님의 부활의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022년 부활 대축일에
천주교 원주교구 교구장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

 

 

 

[의정부교구]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21)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죽음의 어둠에 절망하던 제자들에게 눈부신 희망을 선물해주신 예수님을 찬미하며 사랑하는 의정부교구 형제자매들에게 주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 인간이 지닌 부족함과 죄악 그리고 아픔을 씻어주셨습니다. 이번 부활을 맞이하면서 주님께 우리 사회와 국가 그리고 전 세계에 참된 평화를 가져다주시기를 다시금 청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모든 이가 하나로 일치하여 주님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기를 청하며
지난달, 우리나라에서는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있었습니다. 유력한 두 후보가 비등한 표를 얻는 가운데 근소한 차이로 당선인이 결정되었습니다. 선거 결과에 대한 아쉬움과 아픔을 가진 분들도 있겠지만, 이제 우리는 새 대통령이 될 당선인이 국민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사심 없이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나아가는 데 매진할 수 있도록 기도드려야겠습니다.
세상은 점점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지난 2년간 겪은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위기가 언제 또다시 닥칠지 모르는 현실입니다. 또한 미국과 중국의 패권 다툼이 가열되면서 세계는 빠르게 신냉전 체제로 이행하고 있으며, 남북관계 역시 경색되어 가고 있는 한반도 상황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이기에 새로 취임할 대통령과 여야 정치인들이 때로는 희생하고, 때로는 마음을 비워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고 직면한 위기를 극복해 국민을 위한 참된 봉사자들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울러 이 세상에 평화와 생명을 주시기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의 대축일에 전쟁의 고통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를 기억하며 간절히 기도드려주시기를 청합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일어난 전쟁은 두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비인간적이고 끔찍한 살육에 희생된 민간인과 군인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는 참상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난 사순 제5주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벌 받을 이 전쟁에서 계속 폭격을 받는 우크라이나의 인도주의적 비극을 생각해달라.” 하시며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지치지 말고 기도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달라.”고 촉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상처를 묵상하며
이러한 갈등과 분열이 생생한 현실을 마주하는 가운데 맞이하는 주님 부활 대축일에 예수님의 옆구리에 난 상처로 여러분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군사의 창에 찔리신 주님의 상처(요한 19,34 참조)는 인간의 미움과 폭력 그리고 무한한 욕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상처에는 우리 인간의 미움과 분노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 안에 있었던 수많은 전쟁과 분쟁들, 그리고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동족상잔의 전쟁을 비롯해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 또한 그 상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을 찌른 상처에는 오늘도 세상 사람들이 평범한 일상에서 만들어내는 미움과 증오, 다툼과 분열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상처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길을 걷도록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의 길은 어떤 길일까요? 그 길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바치신 “모두 하나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라는 기도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가 되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짊어지고 일상을 살아야 합니다. 다른 이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고, 나의 미움과 욕심을 버리며, 거기서 생기는 아픔과 고통을 받아안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하나 되는 은총을 구하며 예수님의 부활을 사는 새로운 신앙의 길을 걸어가도록 합시다.

부활을 맞아 신앙을 새롭게 살아갑시다
지난 2년 동안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숨을 죽이며 불안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웃들과, 심지어는 친지들과의 만남도 조심스러워 뒤로 한 채 지냈습니다. 특히 삶의 보람과 버팀목이 되었던, 교회를 오가며 미사에 참여하고 기도드리는 신앙생활마저 제한되는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2년이라는 시간을 조심하며 염려 속에 살아온 탓에 예전의 활력이 사라지고 각자의 신앙도 약해진 듯합니다.
앞으로 코로나 팬데믹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불확실하지만, 세계 많은 나라는 풍토병에 준하는 조치를 취하며 바이러스와 공생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전 같은 위협적인 상황이 약화 되는 조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정부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완화하고 있고, 조만간에는 이러한 제한도 해제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따라서 금년도 주님 부활 대축일을 기점으로 본당공동체와 모든 신자가 해야 할 일은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되어야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금년도 교구 사목 목표로 삼은 “신앙과 공동체의 회복”에 우리 모두 함께 나섭시다. 환경과 상황으로 인해 어쩔 수 없었던 시간을 잊고 용기를 냅시다. 미사 참석의 제한으로 성당에 자유롭게 오지 못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이제는 주님의 성전에서 부활의 기쁨을 노래하며,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생명의 양식으로 주시는 주님의 거룩한 미사 안에서 행복을 찾도록 합시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와 가정에 함께하시길 기도드립니다.

2022년 주님 부활 대축일
천주교 의정부교구장 이기헌 베드로 주교

 

 

 

[인천교구]

2022년 교구장 부활 메시지

 

 

  

  예수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예수님 부활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와 가정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요, 정수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 15,14)라고 말씀하시며, 부활이 얼마나 우리 신앙의 중심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는 죽음이 마지막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생명을 알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로마 6,4) 되었음을 믿고 고백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삶,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줍니다.
  그러기에 부활을 믿는 우리 신앙인은 늘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삶을 믿기에, 기쁨에 가득 차서 세상을 향해 자신 있게 신앙을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이 기쁨과 희망과 사랑으로 가득 차,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하며 신앙을 증거 했던 일을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부활의 증인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증인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를 넘어서서 사랑으로 희망과 기쁨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음을 느낍니다. 성경에 언급되는 ‘돌무덤’이라는 표현처럼, 세상의 많은 것들이 우리를 가두고 있음을 느낍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죽음의 문화[낙태, 생명 경시], 천박한 자본주의 문화[배금주의], 자기중심주의와 이기심의 문화, 분열과 단절의 문화, 우월주의적 사고방식 등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이렇듯 우리를 뒤덮고 있는 많은 사회문화적 현상들은 우리를 어둠 속에 머물게 하고 절망과 포기의 삶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사회야말로 돌무덤입니다.

  최근에 지속되었던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몇몇 권력층들의 과욕은 많은 이들을 희생시켰고 비극을 야기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삶의 터전과 가족을 잃고 평화도 잃었습니다. 이런 비극에도 불구하고 돌무덤, 어둠에 갇혀 있는 이들은 이런 결과에 대한 책임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자국)만을 위해 저지른 일들을, 마치 세상 모든 이들의 공공선을 위해 불가피한 일이라 치부할 뿐입니다. 이처럼 스스로 ‘돌무덤’에 갇혀 있는 것은 비극적인 일입니다. 그 안에만 머물러 있으면 마음이 돌처럼 굳어져서 자기중심에 빠지게 되고 세상을 어둠의 눈으로 바라보게 될 뿐이며, 그런 마음이 초래할 비극은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돌무덤’을 부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리 나와라.”(요한 11,43)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의 돌을 부수고 나오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얽매고 뒤덮은 무덤의 돌을 부수고 부활의 삶으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를 얽매는 모든 것에서 벗어납시다. 그리고 부활의 은총 안에서 세상에 희망과 기쁨을 전파하도록 합시다.
  이 사회 안에서 우리가 부활의 증인으로 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

  지난 몇 년간 우리 사회 안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현상은 적대와 분열입니다. 서로 생각이 다르다고 서로에게 벽을 세우고 만남과 대화를 거부합니다. 이런 사회의 모습 속에서 부활의 증인인 우리는 포용과 화합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코로나의 장기화로 지친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코로나에 걸린 이들에게 따뜻한 말과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코로나에 걸린 이들을 소외시키거나 미워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또한 코로나의 장기화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워하는 이들, 그리고 소외되고 있는 많은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단절되었던 사람과의 관계성 회복도 생각해야 합니다. 만나지 못하다 보니 만남을 통해 싹트는 사람 사이의 정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단절보다는 만남과 대화를 위해 노력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가 늘 봉헌하는 평화를 위한 기도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곳, 전쟁의 위협 속에 있는 전 세계에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주신 환경을 위해 노력하는 모든 활동도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는 미래를 살아갈 세대에 희망을 주는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이 밖에도 부활의 증인으로 세상에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다는 굳건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우리를 얽매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 주님의 부활과 함께 새롭고 희망찬 세상을 위한 부활의 증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천주교 인천 교구장
정 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

 

 

 

[전주교구]

사랑의 발걸음을 내디딥시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어둠의 온갖 세력을 물리치시고 마침내 승리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기쁨과 은총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게 내리기를 빕니다.
기쁨이 샘솟는 오늘,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체험한 사람들을 묵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그들은 바로 ‘몇몇 여인들’이었습니다(마르 16,1 참조). 그들은 일찍이 예수님의 말씀을 즐겨 들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줄곧 따라다니며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상황이 돌변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셨습니다. 그리고 애도할 겨를도 없이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이때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사랑하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깊은 슬픔과 절망에 빠졌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오히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불타올랐습니다. 무엇도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로마 8,25)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보려는 일념으로, 예수님의 몸에 향료를 발라 드리려는 생각으로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때는 “주간 첫날 매우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마르 16,2)이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대부분 태연하게 잠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끔찍한 죽음에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견딜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그들의 발걸음을 이른 아침부터 무덤으로 재촉한 것입니다.
무덤으로 가는 그들에게는 물론 걱정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덤 입구를 막은 “매우 큰 돌”(마르 16,4)을 치우는 일입니다. 그 돌을 굴려내지 않는 한 예수님께 마지막 예를 드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장애물이 버티고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또 그것을 치우는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음에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장애물도 주님을 향한 그들의 사랑을 꺾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오로지 예수님께 향료를 발라 드릴 것만을 생각하며 길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무덤으로 향하는 여인들의 모습에는 사실상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하느님의 백성이 처음부터 줄곧 걸었던 삶의 여정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길을 떠났습니다(창세 12,1 참조). 하지만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히브 11,8). 자신의 여정이 어떻게 될지, 그러니까 실패할지 성공할지 알지도 못했습니다.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그도 혼란스럽고 의심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길을 계속 떠난 것은 하느님을 확고하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손수 길을 마련해주시리라고 믿었고, 그래서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 4,18)길을 떠났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만을 의지하며 장애물에 대한 걱정을 떨쳐내고 발걸음을 계속한 여인들도 놀라운 결과에 이릅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엄청난 사건을 접합니다. 먼저, 무덤에 도착하니 큰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습니다. 장애물이 치워진 것입니다. 이제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무덤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실제로 무덤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훨씬 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흰옷을 입은 젊은이가 전대미문의 소식을 전해줍니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 그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마르 16,6).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부활 소식을 듣고 그들은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렸습니다”(마르 16,8). 하느님께서 손수 이루신 이 놀라운 일에 큰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지 못했습니다. 그분을 직접 뵙기 위해 그들은 길을 계속 떠나야 했습니다. 곧 그들은 제자들에게 부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다시 일어서야 했습니다. 그래야 부활하신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마르 16,7)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그러한 여정 끝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계속되는 사랑의 발걸음으로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다음 여러 방식으로 당신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온전히 계시하시기 위해 각 사람들에게 가장 알맞은 방식으로 발현하셨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그분을 뵙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은 여인들처럼 온갖 난관에도 불구하고 낙심하지 않고 그분을 향해 길을 계속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향해 가까이 다가오십니다. 이 예수님을 향해 사랑의 발걸음을 내디딜 때 비로소 우리는 그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 장애물이 있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좌절하거나 포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바꾸실 수 없는 상황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곧 주님께서 용서하실 수 없는 죄는 없고, 물리치실 수 없는 악은 없으며, 제거하실 수 없는 장애물도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는 것을 분명하게 믿으며,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분을 향해 우리도 길을 떠납시다.
그런데 주님을 향해 길을 떠나는 것은 단지 개인의 내밀한 차원에만 국한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에는 사회적인 차원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하늘이나 거룩한 성전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류와 함께 계시며, 특히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마태 25,40)과 동일시하십니다.
그러니 “그 누구보다도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 자주 멸시당하고 무시당하는 이들, 우리에게 ‘보답할 수 없는 이들’(루카 14,14)에게 다가가야 합니다”(복음의 기쁨, 48항). 그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입시다. 관심과 연대로 그들의 상처들을 돌보아주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줍시다. 이러한 사랑의 발걸음이 진정 부활의 삶이고, 우리 사회를 새롭게 변화시킬 것이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방법입니다. 성모님께서 우리가 내딛는 사랑의 발걸음을 지켜주시길 빕니다.

2022년 부활절
전주교구장 김선태 사도 요한 주교

 

 

 

[제주교구]

부활의 신비 - 하느님 생명의 대화

 

 

  

  찬미예수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영광스런 부활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의 가정에 풍성히 내리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는 전례력으로 사순시기를 보냈고 다함께 알렐루야를 노래하면서, 기꺼이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신 하느님 생명의 대화에 동참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란, 믿는 사람들의 부활 신앙에서 보면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방해하는 죄의 어두운 세력에 맞서는 인간의 고군분투로 현재까지도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암흑의 세력에 저항하는 인간의 투쟁은 태초부터 시작되었으며,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마태 2, 13-30, 36-42) 마지막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죄의 어둠은 많은 인간들을 절망으로 몰아넣고, 죽음이라는 파멸에 이르게 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 죄의 사슬을 끊어내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오늘 주님 부활은 죽음에 대한 승리이며, 죄에 대한 승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역사를 죽음이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손수 역사의 고삐를 쥐고 인간의 구원을 직접 섭리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죽음이 우리의 끝이 아니라 생명이신 하느님이 우리의 목표인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얼핏 죽음이 모든 권세를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고통과 슬픔, 분노와 한탄, 절망과 나약함 등 모든 것이 하느님 생명의 능력으로 모두 선하게 됩니다. 이제 더이상 죽음이 세상을 지배하지 못하고, 주님 부활의 빛으로 모든 것이 되살아났습니다. 참으로 사랑도 진리도 정의도 모두 하느님의 생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경 속에서 부활의 말씀들을 들여다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건네는 생명의 대화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희망과 위로를 전해 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아 울고 있던 마리아에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골방에 숨어 지내던 제자들에게 먼저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미처 깨우치지 못했던 생명의 말씀들로 우리 마음을 뜨겁게 불타오르게 만드십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겪는 온갖 근심과 걱정, 두려움을 함께 나누고 싶어 하시고, 우리의 바람과 생각을 먼저 귀기울여 듣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우리를 절망에서 끌어 올리시고, 생명으로 초대하십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먼저 말씀을 건네심으로써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화를 통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언제나 그들 가운데 살아 계신다는 것과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훗날 제자들의 굳건한 신앙은 차츰 말씀을 건네는 예수님께 자주 응답함으로써, 곧 대화를 통하여 하나씩 터득하게 된 것입니다. 특별히 올해, 우리 교구는 「말씀과 성체, 형제와의 대화의 여정」을 걸으면서 자주 주님과 소통하는 생명의 대화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한 대화들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진정한 부활의 생명으로 끊임없이 이끌어 주시리라 확신합니다.

「하느님 백성」 모두가 알고 계신 것처럼, 2월 말경부터 시작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2년째 수렁에 빠진 미얀마 군부 쿠데타의 현실은 너무나 비인간적이고도 고통스러운 우리 이웃들의 엄청난 상처이자 아픔입니다. 지난 세기에나 있을법한 전쟁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이웃 안에서 버젓이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고 공공연히 3차 세계대전을 입에 올립니다. 과거 전쟁의 비극을 온전히 깨닫지 못한 채 각종 파괴와 살상, 엄청난 폭력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정말 충격적이고 안타까운 시간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만 3년째 계속되는 코로나 상황 역시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답답함으로 우리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주님 부활의 소식은 참된 생명을 향한 부활의 대화를 새롭게 선포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은, 누군가에게 대항하여 혹은 어떤 것에 반대하여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위해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 앞서 부활 신앙으로, 오늘날 우리를 둘러싼 모든 갈등과 상처들 역시 하느님 생명의 방향으로 바로잡아갈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작게는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나만의 문제에서 가정의 문제, 제주지역의 문제, 우리나라의 문제, 이웃 나라의 문제에까지 예수님께서 초대하신 희망의 말씀에 구체적으로 응답하며 성령께 답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언제나 주님과의 대화의 삶에 진지하게 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내 안에서 살아계신 주님의 섭리가 드러나고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흘러넘치게 되면, 이 사랑의 힘은 세상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부활의 인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

2022년 부활절에
천주교 제주교구 감목
문 창 우 비오 주교

 

 

 

[청주교구]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

 

 

  

  1.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을 축하드리며 부활의 기쁨과 희망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 부활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풀 수 없고 넘을 수 없는 궁극의 문제는 죽음입니다. 사람은 죽음으로 모든 희망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여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치워져 있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을 보고 무척 당황했다고 했습니다(부활 밤 미사 복음, 루카 24,4 참조). 성경의 원문은 여인들의 이 놀라움과 당혹감을 “출구가 없다”(‘문이 없음’, 아포리아)고 표현했습니다. 여인들은 죽음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지 못하는데, 자신들 앞에 벌어진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현실에 말문이 막혀버렸습니다. 죽음 이후에 관해서는 문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었습니다. 한 발짝도 더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머리로는 생각할 수 없는 새로운 문,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시면 불가능한 새로운 길입니다. 이것이 예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충만하고 완전한 구원의 실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희망은 본질적으로 우리를 위해 수난하시고 죽으시고 마침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서 옵니다. 이것이 해마다 온 교회의 신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구원의 공동체로서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그분의 부활을 경축하고 감사드리는 이유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사람의 운명은 죽음으로 끝나고 무덤에서 멈추었지만, 이런 어둠과 절망의 역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종결되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합체된 모든 신자는 썩지 않고 부패하지 않는 주님의 생명으로 변화될 희망을 안고 자신의 부활을 기다리며 이 세상을 순례하게 되었습니다(1코린 15,52-54 참조).

3. 세례는 우리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전과 부활 이후의 세상이 완전히 다른 것처럼, 세례 받기 전과 세례 받은 후의 우리 인생도 완전히 다릅니다. 초대교회는 부활절을 기념하는 가장 중요한 예식 가운데 하나로서 믿는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부활절은 일 년에 한 번 가장 귀한 세례의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교회는 해마다 부활절을 지내며 세례성사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부활 신앙과 세례성사는 서로 떼어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세례 성사를 통해 세례를 받는 모든 이가 예수님의 죽음에 일치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다가 함께 부활한다는 믿음 때문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227항; 로마 6,3-4 참조). 이처럼 우리는 세례 성사를 통하여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갑니다. 우리는 세례 때 물에 세 번 잠김으로써 미리 죽음을 맛보지만 이는 죄에 대해서 우리 자신이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물에서 다시 나올 때 우리는 성령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존재로 다시 태어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239항, 1262항 참조). 초대교회는 세례 받은 사람에게 부활을 상징하는 흰 옷을 입히고 아기처럼 우유와 꿀을 먹였습니다. 오늘도 해마다 부활성야 미사에 참여하는 모든 신자들은 그들이 이전에 받은 세례 때의 서약을 갱신합니다. 마귀와 그 행실을 모두 끊어버리고 하느님을 온전히 섬기며 살겠다는 세례 때의 서약을 다시 새롭게 함으로써 예수님과 함께 죽고 묻혀 그분의 부활에 참여하리라는 희망과 믿음을 다시 확인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254항 참조). 이처럼 세례를 받은 모든 신자는 부활에 대한 희망과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4. 그러면 세례 받은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부활 신앙은 먼 미래에 있을 부활, 나의 죽음 이후에 있는 부활을 생각하고 그날만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 신앙은 지금 이 순간부터 바로 이 자리에서 새로운 존재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매일매일 거듭 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세례를 받고 하느님 아버지의 영원한 집을 향해 순례의 길을 걷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부활 낮 미사 제2독서, 콜로 3,1-3). 우리도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저 위에 있는 것”(3,1)을 추구해야 합니다. 일시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에 얽매이지 말고,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들을 바라보며 실천해야 합니다. 세례로 시작된 우리의 삶이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는 사랑과 희생의 삶이 될 때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 부활에 대한 희망도 더욱 커져갈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살피고 성찰하면서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겸손하게 주님의 길을 따라 살도록 노력합시다.
가진 것이 없는 이와 불쌍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고 그들을 찾아가 돌봄으로써 가난하고 미소한 형제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합시다(마태 25,31-46 참조).
특별히 전쟁의 종식과 평화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으로 수많은 난민들과 희생자들이 생겨나고, 무고한 어린이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께 인류 가족의 미래를 맡겨드리고 전쟁과 폭력이 종식되어 고통이 멈춰지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한 마음으로 기도해 주십시오. 또한 크나큰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는 일에 동참하여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5.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지난 성 요셉 대축일에 저희 교구 사제 김 종강 시몬 신부님이 저희 교구 제 4대 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셨습니다. 새로운 교구장님과 함께,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희망으로, 형제애로 가득한 공동체를 이루어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평화를 지역 사회에 널리 전하는 활력 넘치는 교구 공동체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기도합니다. 다시 한 번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2022년 4월 17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장봉훈 가브리엘 주교

 

 

 

[춘천교구]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요한 20,19-20)

 

 

 

  잃어버린 평화와 우리의 상처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춘천교구 하느님 백성 모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축복을 전합니다. 무엇보다 동해안 지역의 산불로 고통받고 있는 모든 분에게 주님의 따뜻한 위로를 함께 전합니다. 아울러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고향을 떠나 슬픔에 잠겨 고통받는 우크라이나의 국민들에게도 주님 부활의 은총으로 하루빨리 평화가 오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부유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의 격차가 그 어느 때보다 커져 가고 세대와 지역 간의 갈등의 골도 깊어지고 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막기 위해 정부가 제시한 사적 모임 인원 제한과 백신 접종 유무에 따른 성당 수용 인원 제한 등으로 우리 삶의 자리는 위축되었습니다. 또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겪게 된 이 일들로 우리는 원하지 않은 고립과 무의식적인 소외감에 젖어 들기도 했고, 우리의 마음과 영혼은 깊은 상처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팬데믹이 종식될 때까지 누구 할 것 없이 겪어야만 하는 상황이기에, 이럴 때일수록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사회적 약속과 규범을 지켜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예의와 겸양을 갖추고 살아가는 이타적인 삶은 각 가정에서부터 배워 습득되는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며 성가정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부활의 은총은 갈라져 있는 모든 이들, 상처를 주고받은 모든 이들에게 내려집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 다락방에 모여 앉은 제자들의 공동체가 그것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 한가운데에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 신앙은 고상한 철학적 사고로 이해되는 논리적 산물이 아니라, 삶 안에서 체험되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어려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정체 모를 모함과 험담, 무시와 소외를 겪은 모든 분이 용기 내시길 기도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상처받고 소외된 모든 이들에게 커다란 위안으로 다가갈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던 예수님의 상처는 부활의 은총이 상처 입은 이들의 것임을 전하고 있으니까요.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예수님 십자가의 길은 용서의 길이었습니다. 이 용서의 길 끝에 주님께서는 부활하셨고, 평화는 그 안에서 선포되었습니다. 부활 시기를 보내며 용서를 통한 평화를 체험해 보시길 권합니다. 용서는 막연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활동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로 드러나는 선명한 메시지이며, 복음을 통한 영감으로 끊임없는 기도 안에서 이루어 나아가야 하는 구체적인 영적 여정입니다. 이 거룩한 여정에 하느님 백성 모두가 동참하여 진정한 용서의 결실인 평화를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말씀과 성찬의 식탁에서 하느님과 한 가족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춘천교구 하느님 백성이 함께하는 「말씀살기」와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를 위한 「찬미받으소서 7년 여정」으로 부활의 기쁨과 평화를 온 세상에 선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춘천교구의 하느님 백성 모두에게 주님 부활의 은총과 축복을 빌며...

† 춘천 주교 김주영 시몬

 

 

 

[군종교구]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마태 28,7)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기쁜 부활을 맞이하여 전후방 각지에서 국토방위를 위하여 애쓰고 계신 모든 장병들, 그리고 군종교구 평신도, 수도자, 사제들에게 예수님 부활의 축하 인사를 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시어 이 세상에 오셨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어 사흘 만에 되살아나셨고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부활을 통해 인간의 한계인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8)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이 나타난 지 어느새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과연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이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코로나의 공포가 극에 다다를 때인 2020년 3월 27일 텅 빈 성 베드로 광장에서 ‘인류를 위한 특별기도와 축복식’을 거행하셨습니다. 이때 교황님께서는 세상과 교회를 마치 풍랑 속에 흔들리는 복음 속 제자들의 배로 묘사하셨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배 안에 머무르고 계시던 예수님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으며 주님께 도움을 청하였고, 이에 주님께서는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라고 호수에게 명령하시어 풍랑을 가라앉히셨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지금의 우리도 혼돈과 두려움, 의구심이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면서, 우리 역시 주님께서 우리 곁에 살아계신다는 말씀 선포에 더 귀 기울여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그 말씀 선포에 귀 기울이는 자세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의 사랑을 떠올리고 기억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자 여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었다.”(루카 24,8)

예수님의 공생활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행적을 곁에서 듣고 보아온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뒷바라지하며 함께했던 여인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은 커다란 실망과 좌절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정말로 놀라운 일이 예수님께서 묻히신 돌무덤에서 시작됩니다. 안식일 다음 날 새벽 예수님의 무덤에 향유를 준비해 갔던 여인들은 이미 열려 있는 무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 당황해하는 그녀들에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그분께서 …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은 …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에 그 여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었습니다.(참조:루카 24,6-8)
결국 이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 말씀과 행적으로 보여주신 하느님 나라를 다시금 기억해 내는 과정을 통해 부활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에게서도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처음에 이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빵을 들어 올리시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주시는 모습을 보고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시기 전 제자들에게 해주셨던 익숙한 모습이었음을 떠올리며 주님의 부활을 깨닫게 됩니다. (참조: 루카 24,30-31) 즉, 예수님께서는 이미 부활하시어 제자들 곁에 살아 계시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던 이들이 예수님과의 ‘기억’을 통해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우리 각자에게도 예수님과 함께한 행복했던 순간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감격 속에 세례를받던 순간, 첫영성체를 하던 기쁨의 순간, 혼배성사를 받던 순간, 또는 입대하여 처음으로 성당에 와서 미사에 참례하고 위로받던 날 등등, 그리고 일상 속에서 사랑하던 이들과 함께했던 행복한 순간들, 감사했던 순간들까지도….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러한 신앙의 소중한 순간들을 끊임없이 떠올리며 세상과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기억을 통해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지금 여기에서 체험하는 것입니다.
사실 미사성제를 통해 우리가 봉헌하고 있는 성체성사도 바로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행위(아남네시스: Anamnesis)로 이뤄집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어린양의 피로 징벌을 피하고 이집트를 탈출한 것을 기념하여 과거의 구원을 현재화하고 그것에 참여하였습니다. 신약의 백성인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시어 당신 희생으로 세우신 새로운 파스카를 기념함으로써 주님의 식탁에 함께하고 그 구원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장병, 군 가족, 수도자, 사제 여러분!

돌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은 그곳에서 천사를 만나 예수님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고 주님께서 살아계심을 알게 됩니다. 이제 그녀들에게 돌무덤은 죽음의 장소가 아닌 부활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의 기쁨을 다른 이들에게 전합니다. 우리 역시 세상의 여러 어려움들로 인해 절망하거나,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노래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 인생 안에 주님께서는 이미 살아계시고 함께하고 계심을 느끼게 되고 세상과 삶에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부활을 목격한 증인이 되어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의 부활을 세상에 선포해야 합니다.
비록 코로나19 팬데믹을 비롯하여 우리를 힘들게 하는 많은 고민거리들이 여전하지만 결국에는 이 모든 것도 다 지나갈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베풀어 주셨던 사랑을 기억하기 위해 미사에 자주 참여합시다. 또한 그 감사의 마음으로 성체조배, 성시간에도 함께합시다. 더불어 주변에 어려운 이웃과 동료들에게 손 내밀어 주며, 복음 선포 사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신앙인의 삶을 살도록 노력합시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시편 1,2-3)

다시 한번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드리며, 주님부활의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 개인과 가정에 그리고 부대에 충만히 내리시기를 기도합니다.

2022년 부활절에
천주교 군종교구장 서상범 티토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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