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10주일(나해) 마르 3,20-35; ’24/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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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4-05-24 ㅣ No.5781

연중 제10주일(나해) 마르 3,20-35; ’24/06/09

 

언젠가 한 번 교황님께서 우리나라를 방문하셨을 때, 젊은이들과의 대화에서,

여러분에게, 누가 왜 그렇게 사느냐?’

하고 묻거든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라고 답하라고, 가르쳐주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교회와 사회에서 희생봉사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안 한다고 피하고, 그나마 하던 것도 그만두고, 돈 벌러 나가고, 다 떠나기 일쑤인데, 왜 우리가 희생봉사합니까?

우리는 신부나 수녀, 또는 다른 그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희생봉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희생봉사를 한다고, 누가 칭찬해 주는 것도 아니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어디 정계나 사회 단체에 출마를 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희생봉사를 하는 이유는,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에, 보답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누가 칭찬해 주지 않아도,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희생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희생봉사하는 그 자체로 우리는 기쁩니다. 나를 내어줄 수 있다는 기쁨과 내가 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자존감을 가지게 되어 기쁩니다. 더군다나 우리의 희생봉사로 도움을 받는 이들이 기뻐할 때, 우리는 같이 기뻐하게 되고, 내가 잘 되는 것보다 더 보람을 느끼게 되고, 내 삶의 의미와 존재가치를 느끼게 됩니다. 주 예수님을 믿고, 또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4.6.18)라고 하신 약속을 알고, 그 말씀에 희망을 두기에 사랑의 희생봉사를 하면서 기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마르 3,20)라고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식사를 못 하실 정도로, 어떻게든 잃어버린 양을 하나라도 더 구하시려고, 그야말로 동분서주하시는 듯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이렇게 바쁘게 일하시는 예수님을 도와주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예수님께 많은 사람이 쫓아가니까 질투와 시샘이 나서 그런지, 오히려 예수를 비방합니다.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22) 그 비방이 어느 정도 심했는가 하면, 예수의 어머니와 사촌형제들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리를 듣고 집으로 데려가려고 찾아올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하신 예수님의 모습, 정말 우리 인간적인 마음에서 바라볼 때, 정말 안쓰럽고 외로워 보입니다.

우리 같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겠습니까?

좋은 의도를 가지고 선한 일을 하는데, 옆에서 사람들은 도와주기는커녕, 갖은 비난과 모함을 해댈 때. 실망하고 지치지 않았겠습니까?

어쩌면, 다 포기하고, 떠나고만 싶은 마음이 가득할지 모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심정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성경 기자는 오늘 이런 기사를 전합니다. 예수님 둘레에 군중이 앉아 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32)하고 전합니다.

 

그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33) 하고 반문하시고, 둘러앉은 사람들을 돌아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34-35)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와 가족조차 믿지 않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당신이 가셔야 할 그 길을 어떻게 꿋꿋이 걸어가실 수 있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주님의 그 말씀, '하느님의 뜻'(35)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어둠의 세력이 어떻게든 실망하도록 하고 좌절하고 포기하도록 하는 음모와 유혹을 이겨내십니다.

 

그리고 한편 아버지의 뜻이 인류에게 외면당하고 무시당하고 저버림을 당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 땅에 오게 되셨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아시기에, 그 상황을 이겨나가십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길은, 관습이나 문화 등의 기존 사회의 사람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뜻이라고 되뇌며, 그렇게 당당하게 말씀하십니다. "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35)

 

우리는 교회나 사회에서 개인적으로 당하는 어려움이나, 활동하면서 겪게 되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이며 관습적이고 문화적인 여러 가지 어려움 앞에서도, 주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힘으로 굴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성령께 의탁하여,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주님과 형제들 앞에 굳건히 서서, 주님과 함께 주님의 뜻을 따르고, 이루도록 합시다.

 

사도 성 바오로는 오늘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경의 전통을 이어받아,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키십니다.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말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우리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주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일으키시어 여러분과 더불어 당신 앞에 세워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2코린 4,13-14)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주님께 향한 희망은, 진정 우리를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활동하도록 이끕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은총이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 나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15)

 

성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신앙을 바탕으로한 활동을 하면서 겪게 되는 환난 앞에서, 주님께 희망을 두고, 굳건해지도록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16-17)

 

우리가 그렇게 환난과 박해를 당해도 주위의 눈치를 보거나 이해관계를 생각해서 주저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꾸준히 그리고 과감히 활동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현세의 물질적인 보상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선언합니다. 성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에서는 얻을 수도, 도달할 수도 없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늘나라에 희망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역설합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18)

 

사도 성 바오로는 우리도 마지막 날,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에 들어가기라는 희망을 품고, 활동할 수 있음을 믿음으로 거듭 고백합니다.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2코린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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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0주일 꽃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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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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