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11주일(나해) 마르 4,26-34; ’'24/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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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4-06-08 ㅣ No.5788

연중 제11주일(나해) 마르 4,26-34; ’'24/06/16

 

 

사람들은 가끔 정의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정의는 사람들이 말하는 정의와는 조금 달라 보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라나온 문화와 환경 속에서 나름대로 윤리적인 기준을 마련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모두 한 문화환경 속에서 자라나지 않고, 서로 다른 지역에서 태어나,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환경 속에서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서로 다른 문화환경 속에 처한 각기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윤리적인 잣대가 아니라, 사랑이고, 그 사랑은 바로 용서하시는 자비입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용서를 통해, 사람들에게 다시 재생의 기회를 주십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 인간 안에 하느님의 선성을 심어주셨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용서를 통해, 인간의 죄악으로 손상된 선성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고, 완성시켜 주려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죄인을 용서해 주면, 감사할 줄 모르고 더욱더 큰 죄를 지을 것이라고 우려합니다. 그렇지만 주 하느님께서는 죄인을 용서해 주면, 주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회개에 이르는 새 인간의 길로 접어든다고 기대하십니다. 마치 사랑의 씨가 용서받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자라나고, 오늘 용서받은 마음이 겨자씨처럼 자라나서 새로워지고, 내일 용서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커다란 아량과 자비를 베풀게 되기를 기다리십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자비를 통한 회복을 현실 세계 안에 체계적으로 설정한 것이 희년이라는 제도입니다. 희년은 본래 50주년 주기로 되어 있습니다. 희년은 6일 동안 일하고 7일째 쉬는 안식일처럼, 6년 일하고 한 해 쉬는 안식년이라는 7년 주기를 7번 거치고 난 다음 해, 50년째의 해에 오는 용서와 회복의 시기입니다. 희년에는 모든 종들을 풀어주고, 모든 빚을 무효화하며, 사람들의 모든 원망과 아쉬움을 다 씻고 없애서, 처음으로 다시 되돌이키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희년의 제도는 성경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처럼,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빚문서 중에는 희년이 되어도 되돌려주지 않는다.’라는 조항이 부칙으로 명시화된 빚마저 있었다고 합니다.

 

교회에서는 이런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천지개벽이라 할 수 있는, 일체의 재산과 소유의 원위치까지는 하지 못하더라도, 마음과 영과 정신의 빚문서 즉, 원망과 미움, 그리고 긴장과 갈등을 다 지우고 해소하여, 용서하며 화해하여, 평화롭게 함께 살아가도록 희년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희년의 주기가 성경에 따르면 50년이라서, 명 짧은 사람은 평생 한 번 볼까말까하는 관계로, 25년 주기로 줄여서 시행하고 있습니다.

 

내년 2025년이, 우리 교회의 희년입니다.

여러분, 만일 내년에 이 성경의 희년이 실제화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의 삶은 어떻게 변화되겠습니까?

그동안 여러분을 묶고 운명처럼 지금 이 자리에 서게 했던, 모든 역사의 과오와 어둠을 지우고 해소되어, 일체의 굴레와 제한과 한계에서 벗어나서 새롭게 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희년이 되면,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살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에게, 온전한 영적인 자유와 무제한의 사랑과 흰색의 도화지 같은 미래가 펼쳐진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어쩌면 이 희년은 여러분의 인생 속에, 여러분의 마음속에 묻어둔 꿈과 비전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꿈과 비전과 희망이 무엇입니까?’

어떤 분은 먹고 살기 바빠서 꿈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잊어버린 지도 오래되었다고 말하실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꿈과 비전과 희망이 무엇이었습니까?’라는 질문이 적절하겠습니까?

하지만 내년도 희년이 선포된다면, 여러분이 지금까지 간직해 온, 그러면서도 차마 현실적인 한계로 인하여, 가슴속 깊이 묻어 둘 수 밖에 없었던 그 희망과 비전과 꿈을 어떻게 실현해 보이시겠습니까?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희년은 누군가가 선포하여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 예수님의 사랑으로 모든 죄와 악으로부터 해방된 우리가, 주 예수님의 하해와 같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순간, 선택하고 결단하고 실현함으로써 시작되는 사항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에 대해, 어느 하나 확실하게 이룰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때까지, 누구 하나 알아주거나 칭찬해 주지 않아도, 당장 눈앞에 확실한 결과와 효과가 드러나지 않아도, 그냥 그렇게 그 꿈과 희망을 이루기 위해 묵묵히, 그리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왔고, 오늘도 내일도 그렇게 나아갈 뿐입니다. 언젠가는 이루어지길 기대하고, 또 내 대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음 세대에는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을 간직한 채! 그리고 그때 오늘의 내 노력이 조금이나마 기여했기를 바라면서…….

 

어쩌면 주님께서 오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마르 4,26-29)

 

그러면서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도 같은 답을 던집니다.

네가 바라는 것이 진정 이루어질 수 있는 꿈이더냐?’

 

그런데 어쩌면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꾸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2코린 5,6-7) 우리는 남들과 같이 이 사회에서 살지만, 우리가 바라는 것은 남들과 같은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면서 꾸준히 나아갑니다(로마 8,24-25 참조).

 

또 누군가 우리에게 네 그 보잘것없는 정도의 노력으로, 여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도 못했던, 그 꿈과 비전과 희망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느냐?’라고 묻는 질문에, 주님의 이 말씀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 4,30-32)

 

우리가 꾸는 꿈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신 것이라면, 우리는 그 꿈을 이룰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은 당신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필리 2,13) 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여러분이 꿈꾸는 미래가, 여러분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소명과 여러분의 업무과 같은 방향이라면, 여러분에겐 즐겁기도 하고 보람차서, 여러분의 열정을 쏟아부을 만한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꿈이 조금씩 이루어져 나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설렘이 여러분의 가슴 속에 피어오르고, 여러분은 새로운 희망과 꿈을 이어 짓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그 꿈이 설사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꿈의 성취에 대한 기대 때문에, 그 꿈을 이루는 길을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꿈과 비전과 희망이 가정의 화목과 단란, 재결합과 일치, 우리 사회의 안녕과 복지화, 우리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통한 국토통일, 세계 각 곳의 전쟁 종식과 평화, 그리고 우리 인류의 새 하늘과 새 땅인 주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건설 완성에 온전히 포함되고 연결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심어주신 고귀한 꿈과 희망이, 우리를 도구로 하여 우리를 통해, 이 땅에 꼭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노력합시다.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에제 17,24)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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