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부활 제6주일(다해) 요한 14,23ㄴ-29; ’19/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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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2-05-09 ㅣ No.5027

부활 제6주일(다해) 요한 14,23-29; ’19/05/22

 

 

 

 

 

 

 

 

가끔은 그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좋고, 사랑해서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기에 함께할 뿐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현실을 드러내는 이야기인 듯합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정작 좋아서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만 많아 보이는 것이 현실이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없으면 아쉽고, 있으면 귀찮은 존재아마도 현실 세계는 내가 좋고 싫고에 따라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주어졌고 맺어졌기 때문에 함께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내 앞에, 내 엄연한 현실에 존재하고 나와의 관계를 형성하고 영향을 주고받게 되는 이유는, 어쩌면 내가 풀어나가야 할 나의 가장 취약한 점을 메꾸고 채우도록 숙제처럼 나에게 제시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이렇게 묵상해 봅니다.

내가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삽니다. 나 혼자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좋아하는가? 아니면 혼자 살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주고받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자면 삶이 아주 피곤하고 힘들 것입니다. 그리고 자주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겪게 되는 갖가지 사건들 앞에서, 거듭 긴장과 갈등 속에서 괴로워하며 삶이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내가 만나고 싶고 좋아서 함께하고 싶어진다면 내 삶은 기쁘지 않겠습니까?

 

우선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은 기본적으로 나에게 잘해 주고 나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진정 사심 없이 나에게 삶의 길을 제시해 주고 열어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아니 내 마음을 채워 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그런 마음으로 사람들을 찾다 보면 다른 사람들이 내 마음을 오히려 내 욕심으로 취급하고 나를 피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을 찾듯이 다른 사람들도 자기에게 잘해 주는 사람을 찾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위해 희생해주기를 바란다면, 세상은 오히려 각박해지기만 할 것입니다. 좋은 사람을 찾고자 하는 마음과 뜻은 고귀할지언정, 그 현실이 다른 이에게 희생과 부담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나를 위해 희생해줄 사람을 찾기보다는, 내가 남에게 희생하는 편이 내겐 더 쉬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남에게 잘해 준다고 그 사람도 나에게 잘 해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심 없이 남에게 잘해 주면 적어도 나는 남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고, 만일 그 사람이 나의 좋은 점을 반기게 된다면 우리는 서로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 12)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스스로 자신을 바치셨기에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희생하라고 요구하며, 또 그렇게 희생하면 감사하기는커녕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렇게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치부하고 맙니다. 그래서 점점 더 힘들어지기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면 알수록 자기가 더 예수님의 말씀을 살려고 하기보다, 그 말씀을 더욱 더 남에게 지키도록 요구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기쁘고 행복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없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힘을 주고 희망을 안겨주는 말씀이 아니라, 거꾸로 우리에게 죄책감과 좌절을 안겨 줘 힘겹게 살게 만들 위험마저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겸손 되이 실현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영혼의 양식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말씀을 이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또 다른 죄악만 생겨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요한 14, 23) 사심 없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성당에 나오는 사람은 기쁨을 얻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본인이나 남에게 부담과 분란만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당에 나오는 이유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내 삶의 위안과 희망을 발견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23)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24) 우리는 나 너 할 것 없이 누구를 예수님의 말씀에 빗대어 판단하고 평가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키고 그렇게 지켜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얻어야 합니다. 겉으로 어떤 직책을 얻고 남이 보기에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남의 눈치를 보아가며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면, 얼마나 불안하고 힘겹습니까!

 

그 어느 누구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고, 자기가 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 중에 되새기고 힘을 얻어서, 자신의 일상에서 실현하는 사람은 주님과 주님의 아버지와 함께 하는 영광 속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27)

 

아울러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도 성찰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기뻐하고 행복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평안하고 뿌듯한 마음으로. 우리가 뿌듯하고 평안한 가운데 보람되이 기쁘고 행복한 순간은 언제이겠습니까?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배우자가 배우자로서 해야 할 일을 다 했을 때, 아버지가 자녀에게 해야 할 일을 다 했을 때, 자녀가 부모에게 해야 할 일을 다 했을 때, 우리는 뿌듯하고 보람있고 기쁘며 행복합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하느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모시고 섬기며, 자녀로서 주님을 믿고 따르며 주님의 말씀을 실현할 때, 우리는 뿌듯하고 보람 있고 기쁘며 행복합니다. 비록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한 노력으로 다 채우지 못하고 이루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성령께서 오셔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아끼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고 성령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를 죄와 악이 펼치는 오만과 착각과 갖가지 장애와 위협에서 구하실 것입니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26)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의 가슴에 심어주셔서 우리가 꿈꾸게 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이룰 수 있도록 함께해주시고 힘을 불어넣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주님 사랑의 뜻을 이루게 되어, 우리는 주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과 누리던 그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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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 6주일 꽃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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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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