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주님 수난 성금요일 이사 52,13-53,12; 히브 4,14-16; 5,7-9; 요한 18,1-19.42; ’22/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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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2-04-09 ㅣ No.4991

주님 수난 성금요일 이사 52,13-53,12; 히브 4,14-16; 5,7-9; 요한 18,1-19.42; ’22/04/15

 

이번 사순시기에는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이젠 다소 만성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일상이 되어버린 긴장과 아쉬움 속에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게 되었습니다.

 

2019년 설날, 무심코 인터넷에서 떠도는 이웃 나라의 독감 이야기를 동영상으로 보았습니다. 거기에 한 간호사가 나와서는 절대 외출 금지, 절대 외식 금지를 외쳤습니다. 그때는 정말 다른 나라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채 한 달도 못되어 우리나라에도 이 전염병이 덮쳤습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쓰러져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게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었구나!’ 하는 느낌이 싸하고 들었습니다. 이 상황을 우리 나라에서 실제로 접하면서 이천 년 전 예수님의 강생과 하느님 나라 선포 및 기적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상 희생제사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제사를 우리가 잘 알고 또 믿고 있었지만, 머릿속에서만 이해가 되었지, 가슴으로 깊이 느끼지 못한 채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성찰이 다가왔습니다. 십자가의 길 제1처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형선고 이야기가 그저 이 천 년전의 남의 나라 이야기같았던 것이, 코로나 19 상황과 맞물려 마음속에 더 깊이 다가옵니다.

 

신문 방송에서 연일 중계에 중계를 거듭했지만, 처음에는 그저 그런가 보다 싶었고, 내가 직접 걸리지 않으니까 그렇게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걸리지 않으니까 그렇게 또 심각하게 다가오진 않았습니다. 그런다가 신자들 중에 성모병원에 봉사 나갔다가 자가격리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이게 저 혼자 안 걸리면 되는 이야기가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나 너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정말 운명공동체로구나 하는 깨달음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 죗갑을 짊어지신 것처럼, 환우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제2처에 나오듯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누군가가 나 대신 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깊어지면서, 괜실히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죄를 지은 것은 나인데 정작 예수님이, 환우들이 대신 십자가를 지고 수난하고 있구나 하는 마음으로 힘겨웠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감염 속도가 빨라지고 그 범위가 파급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자, 정말 사상 초유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사순절 시작인 재의 수요일의 재의 예식을 해야 할 준비를 다 마친 찰나에서 미사 중단 지침을 받았습니다. 순교의 시절에도 교우촌 등지를 중심으로 남몰래 숨어서 미사를 봉헌했고, 독재의 칼날이 시퍼런 상황에서도 꿎꿋이 미사를 봉헌했건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로 인하여 미사가 중단되었습니다. 인류가 자랑해오던 거대한 문명이 하루 아침에 무력화되고, 사람들이 쓰러져 갔습니다. 교회도 함께 쓰러졌습니다. 우리의 신앙 문화가 중단되고 쓰러진 것입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산다던 우리가, 3처에 나오듯이 예수님께서 기력이 떨어져 넘어지신 것처럼,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확진자들이 음압 병동에 수용되어 생사를 넘나들며 외롭고 힘겨운 투병의 시기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과거에는 누가 전염병에 걸려서 입원했다는 사실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마치 술안주처럼 떠들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접촉자들과 발병 대기자들이 자가격리에 들어가면서, 그 정도와 폭이 유감스럽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수난하는 아들 예수님을 바라보는, 4처에 나오는 성모님의 마음처럼, 많은 이들을 대신하여 병마와 투쟁하는 환우들을 바라보는 우리 교회의 가슴이 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저기서 많은 협조자들과 동료들이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질병관리 담당자들과 공무원, 사회봉사자들, 의료진들, 가족 친지들이 마치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을 도운, 5처에 나오는 시몬처럼 확산되는 병마의 전염 속도와 범위를 줄이려고 사투를 벌이며, 가능하면 한 사람도 누락되지 않고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전세계 수많은 의료진과 봉사자들이 매일, 매순간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었습니다. 6처에 나오는 성녀 베로니카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시는 예수님의 땀방울을 닦아드렸듯이, 환우들의 병세가 깊어지면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하며, 환우들에게서 차도가 보이면 내 일처럼 안도하며, 이십사 시간 환우들 곁에서 쉬지도 못한 채, 치료 중 감염되어 목숨을 바치기까지 했습니다.

 

한 때는 사제들과 수도자들과 직원들만 미사를 봉헌하면서, 또 성당좌석에 1m 내지 2m 이상의 간격으로 스티커를 붙이고, 좌석 정원의 10% 또는 20%에 맞춰 방송미사를 촬영하고, 신자들이 오면 쓸 비첩촉 발열체크 체온계와 손세정제와 여벌 마스크를 준비하며, 바이러스가 종식될 그 날을 기다렸건만, 병마는 이마저 비웃듯이 기승을 부리며 무산시켜 버리기를 거듭했습니다. 7처에 나오는 두 번째 넘어지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도 길어져만 가는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확산은 우리를 슬슬 지치게 만들었습니다.

 

노인들이 젊은이들에게 산소마스크를 양보하며 희생하기도 하고, 코로나19 감염확산방지를 위한 각종 기부가 늘어나며, 민간차원의 마스크와 손세정제 만들기 등의 사회 안팎의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류사회를 위협하는 바이러스는 잠잠해질 줄 몰랐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던, 8처에 나오는 예루살렘의 부인들처럼 무능력하게 이렇다 할 도움도 되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 전 세계 지도상으로 병마의 점령지가 늘어만 가고 있는 순간에, 믿는 이로서 기도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나약해져, 점점 나 하나만이라도 걸리지 말아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질병관리담당과 의료진, 봉사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병마는 우리가 전혀 예기치 못한 곳을 통해 마치 빈틈을 노리고 공격해 오듯 파고 들어와 그 기세를 수그려뜨리지 않고 퍼지며 위협을 가해왔습니디. 9처에 나오는 에수님께서 세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이제나저제나 하며 수그러지기를 기도하고 기대했건만, 델타와 오미크론 등의 각종 변이들이 생성되면서, 우리의 노력과 희생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만 같아 허탈하기도 했습니다. 진정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하는 시기인가 봅니다.

 

환우들뿐만 아니라, 감염방지를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와 자발적 자가격리 등의 활동축소로 관계망이 위축되어 너나 할 것 없이 먹고살기가 힘겨워졌습니다. 10처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옷 벗김을 당하시고 눈에 보이지 않는 권능과 사랑은 드러나지 않고, 허약한 육신만이 드러나 초라해 보입니다. 우리 사회도 민낯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류사회를 위협하는 감염과 친우들의 투병은 비단 전염병이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에 파급효과를 가져오며 사람들의 생을, 문화와 질서를 위협해왔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듯이, 각계각층의 많은 관계자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상대적으로 제외되고 소외되는 이들이 생겨나는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외국인 노동자들, 가난한 이들, 불법체류자들, 그나마 최소한으로, 최저치로 정한 기준과 자격에도 미달하는 이들, 그 누구도 헤아리거나 돌보지 못하는 이들이, 우리의 무관심과 이해관계 속에서 또 다른 희생자가 되어, 11처에 나오듯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주님의 뒤를 잇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탐욕에 빠져 불평불만과 시기 질투를 일삼던 우리의 죄악으로, 12처에 나오는 십자가상에서 에수님께서 돌아가시듯이, 우리의 무분별한 자연 관리로 인하여, 전염병이 창궐하여, 전 세계에서 바이러스와 그 영향력 속에서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위험으로 말미암아, 많은 분이 아버지 하느님께 돌아가셨고 오늘도 돌아가시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주님께 되돌아가는 이들을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생전에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주님 품 안에서 성인들과 함께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매일 매일 세계전쟁으로 사망한 이들의 수를 넘어서는 수많은 사람이 병마로 쓰러져 갔습니다. 13처에 나오는 십자가상에서 내려오신 예수님의 주검을 바라보며 허망해하듯이, 주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엄위하심과 전능하심을 믿고, 그 하느님께서 빚어 만들어 주신 우리 인간의 존엄성과 고귀함을 외치던 우리가,, 이렇게 하찮고 어처구니없게 쓰레기 더미처럼,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로 생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죽어도 안타까운데, 집단으로 사체가 뒹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인간의 가치관이, 윤리가 무너지는 허망함을 느낍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로따로 귀하게 만드시고 사랑하시는 주님께, 저희를 하루 빨리 구하러 다시 오시기를 감히 청해봅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사순시기가 끝나고, 성삼일이 시작되었건만, 우리는 바이러스의 어둠 속에서 온전히 헤어나지 못하고 아직도 갇혀 있습니다. 14처에 나오듯이 무덤에 갇히시는 에수님을 묵상하면서, 어떤 때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겨서, 어떤 때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잘못 판단해서, 어떤 때는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이루기 위해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인 줄 뻔히 알면서도, 악과 손잡고, 나를 죄악의 노예로 만들고,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에 죄악을 더해가는 우리 자신을 바라봅니다. 진리와 사랑과 기쁨과 평화가 조롱이라도 당하듯이, 무덤 속으로 쓸려나가고 있습니다.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 우리가 헤쳐나갈 수 없다고 여기는 재난과 어려움 속에서, 낙담하고 지치고 쓰러지는 저희를 자비로이 굽어보소서. 이 아픔과 어려움에 빠져 신음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죽임을 당하시고도 끝나지 않으시고, 15처에 나오듯이 부활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러 다시 오실 주님, 주님 밖에는 저희를 구해주실 분이 없나이다. 주 하느님의 자비에 의지하여 청하오니, 부족하고 나약한 저희를 버려두지 마시고, 통제할 수 없는 어둠의 세력에서 건져주시고 구하소서. 아멘.

 

목마르다.”(요한 19,28)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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