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2주간 수요일 ’22/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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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2-01-13 ㅣ No.4905

연중 제2주간 수요일 ’22/01/19

 

중고등학교 시절에 읽던 루이제 린저의 왜 사느냐고 묻거든이란 책 제목이 생각나면서, 이런 질문을 던져 봅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하여 삽니까?

우리는 무엇 때문에 삽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 줄 뻔히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마르 3,3,) 라고 부르시고는,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4) 라고 화두를 던지십니다. 그들은 아무 말도 못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한족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5) 하고 말씀하시자,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해집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지 모의를 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복음의 말미에 나오는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의 움직임이 계속 머리에 남습니다.

왜 그들은 병고를 앓고 있는 사람들이 치유되는 것이 그렇게도 거슬릴까?

당시 신앙감각상 병자는 곧 죄인이라고 여겼던 상황에서 병이 나아버리니까, 더 이상 죄인이 아닌 것이 되어서, 논리적이고 교리적인 가르침이 현실과 괴리됨으로써 발생하는 종교적인 모순과 이질감에 대한 수습이 곤란해져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자신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하시기 때문인가?

 

그 어느 쪽이든,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당시의 종교인들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주 하느님의 종교보다는 주 하느님과 종교에 대한 자신들의 신앙감각과 그에 따른 생활양식을 지키는 데 더 혈안이 되어 있다는 사실만은 드러내는 셈이 되어버렸습니다.

 

누구를 위한 종교인가? 사람의 구원을 위한 종교인가? 아니면, 종교를 위한 사람의 믿음인가?

무엇을 위한 종교인가? 인간의 현세적인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향한 구원을 위한 종교인가? 아니면, 종교의 부흥과 외적인 팽창으로 인한 종교의 현세적이고도 물질적인 풍요와 대 사회 영향력 획득으로 인한 권력장악과 견고해진 종교 생활 보장과 유지를 위한 것인가?

 

그리스도교 일치주간에,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쳐 희생하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님을 믿고, 서로 사랑으로 하나되어 인류 구원을 위한 희생봉사의 길을 통해 주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로 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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