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사순 제2주일(다해) 루카 9,28ㄴ-36; ‘22/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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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2-03-07 ㅣ No.4958

 사순 제2주일(다해) 루카 9,28-36; ‘22/03/13

 

 

 

우리 나라 말로 '7가지 유혹'이라는 이름으로 제작된 '현혹됨'(Bedazzled)이라는 영화를 본적이 있습니다. 그 영화는 악마가 인간에게 7가지의 소원을 들어줄 테니 대신 자기에게 영혼을 팔라는 계약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악마와 계약한 인간은 햄버거와 빅맥에서부터 시작하여 돈과 권력, 명예, 아름다운 여인, 감상적인 인간 등 여섯 번째까지 소원을 빕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바라는 소원이 즉시 이루어지고 또 그 상태를 누려보긴 하지만 거기에 만족할 수도 없었고 또 그 상황을 오래 유지하지도 못합니다. 결국 그는 자기가 원하는 소원이 다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남은 한가지 소원을 마저 대고 영혼을 내 놓으라는 악마의 재촉에, 자기가 그렇게도 가지고 싶었던 여인의 행복을 빌어줍니다. 그러자 악마와의 계약은 깨지고 그는 자유로운 사람이 됩니다. 남을 위해 소원을 비는 순간부터 악마와의 계약은 끝난다는 것이 계약파기의 비밀조항이었습니다.

 

그 영화를 통해 작가는 인간이, 자기가 원하는 것과 원하는 상황은 누릴 수 있지만, 그 상태와 상황이 행복이라든지 등의 인간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갈증과 원의를 채워줄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는 것도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유일한 소원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향해 빌 때 진정으로 가치 있는 소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늘 부족함을 느끼고 삽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과 자기 식구 그리고 우리 사회와 민족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꿈과 욕망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더 얻고 싶어하고, 하나를 이루면 하나를 더 이루고 싶어할 뿐 만족하지도 감사하지도 못하고 늘 불평불만과 아쉬움 속에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자신감을 상실하고 자포 자기 할 때도 있고, 자기 자신과 사회를 원망하기까지 합니다. 현재 상황이 다 좋다고 만족하면서 살 수는 없다하더라도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우리의 삶은 그저 고통뿐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네 인생은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리 얻고 성취하고 채워도 부족하고 모자라고 결핍을 느끼지만, 이웃을 위해 일한다거나 조금 나누기라도 한다면 나눈다는 그 자체로 자기가 얻은 것보다도 더 많은 기쁨을 가져다주니 말입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기도처럼 사랑은 요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줌으로써 받는 것이기 때문인가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영광에 쌓여 계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보면서 엉겁결에 모시고자 한다. 베드로가 성인들을 뵈면서 잘 모셔야겠다는 지극한 마음이 들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자신들을 위한 존재로 모셔두기를 바랬는지는 정확히 몰라도 예수님께서는 거절하십니다. 마치 '나는 죽으러 왔지 접대받으러 온 것이 아니다.'라고 하시는 듯 합니다. 이 모습은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태 20, 28)하신 말씀을 연상하게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하신 이유와 상황은 바로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나누신 대화 즉 "예수께서 머지않아 예루살렘에서 이루시려고 하시는 일 곧 그의 죽음에 관하여 예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루가 9, 31)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끔 기도 중에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빌지만, 주님께서는 아버지께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마태 6, 10)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 39) 그리고 다시 "아버지, 이것이 제가 마시지 않고는 치워질 수 없는 잔이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 42)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와 예수님의 생애는 우리 인간이 그리는 영화처럼 너도 이기도 나도 이기며, 너도 잘되고 나도 잘되는 해피엔딩으로 마쳐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너를 살리기 위해서는 내가 죽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실제로 고통스럽게 생애를 마감합니다. 그것도 기적을 베풀고 병자를 치유하고 사람들을 먹이고 살리신 분에 걸맞지 않게 수치스럽고 처참하게 돌아가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생애가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그냥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즉 주님은 죽으셨지만, 아니 인간으로서의 한계인 죽음을 겪으시고 받아들이셨지만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또 믿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죽음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백성들을 위한 삶이었고 죽음이었기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부활시켜주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또 믿을 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렇게 살아 주님과 함께 부활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며 우리의 믿음입니다.

 

현실에서는 손해보고 억울하게 죽지만,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된다는 믿음입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을 기다리며 사순시기를 지내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아들, 내가 택한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어라."(루가 9, 35) 이 사순시기에 우리에게 들려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서 실현하여, 우리가 주님 앞에 서게될 마지막 그날에 주님과 함께 부활하기로 합시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오실 구세주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립 3, 20-21)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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