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성당 게시판

어느 의사 아내의 애타는 편지

인쇄

김정이 [pear] 쪽지 캡슐

2000-06-23 ㅣ No.3427

 

  편집시각 2000년06월22일20시40분 KST 한겨레/사회  

 

[의약분업] 어느 의사 아내의 애타는 편지

 

 

 

 의사들의 집단적 진료거부가 우리사회를 큰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 와중에 의사의 아내이자 자신도 의사인 김아무개(37)씨가 의료개혁 시민운동단체인 `건강연대’에 한 통의 글을 보냈다. 남편을 향한 편지 형식으로 쓰여진 글에서 그는 “내일의 국민건강을 위해 투쟁한다”는 의사들에게, “눈 앞에서 스러져 가는 존엄한 생명을 먼저 돌아보라”고 호소한다. 편집자 주

 

 

 

사랑하는 당신에게

 

 

 

잠든 당신의 모습을 보려니 마음이 아픕니다. 어젯밤에도 우리는 심하게 다퉜지요. 우리의 싱그럽게 젊었던 날까지 들먹이면서. 저는 여전히 오늘도 응급실과 중환자실 환자를 돌보러 출근한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래도 당신과 아름다운 젊은 날 함께 공부하던 우리의 동료들에게 오늘 뭔가 말하지 않으면 안되겠습니다. 우리 처음 입학하던 때가 기억나시는지요? 당신은 아니었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나온 고등학교에서는 처음으로 의과대학에 진학했다고 선생님들이 저를 얼싸안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집안에서 딸이 처음으로 의과대학에 갔다고 온 친척들이 모여서 잔치를 했습니다. 물론 그 기쁨은 잠깐이었습니다.

 

 

 

’80년대 의대생’ 함께 번민했던 나날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우리는 80년대 그 암울한 분위기에 눌려 교정에서 큰 소리로 웃음소리 한번 내보지 못했습니다. 많은 학우들이 교정에서 개처럼 끌려가고 제대로 졸업도 못했습니다. 그 사이 우리는 그저 학교에 잘 다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죄책감을 느껴야 했던 기억을 당신도 간직하고 계시겠지요. 결국 한명 한명의 사람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사회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기여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설명했습니다. 아무도 큰 소리 내어 그것을 말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저는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당신이나 저나 그때 의과대학을 다니던 사람들, 아니 모든 의사들에게 공통적인 틀이 아니었던가 생각합니다.

 

 

 

당신이 주말마다 외국인 노동자 진료에 나서는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가 아닌가요. 당신은 지난주 일요일, 그 바쁜 고민 중에도 외국인 노동자 진료를 잊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이미 커서 일요일에 아빠가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을 더 이상 탓하지는 않는 답니다.

 

 

 

그러나 어제, 온통 의사 얘기로 도배가 된 뉴스를 보면서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일선 의료현장을 떠나 있는 처지인 제가 의료현장에서 당신이 당하는 고통을 전적으로는 이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현재 환자를 보지 않는 의사이기 때문에 이런 글을 공개적으로 쓸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통신공간에는 의사들 섬뜩한 얘기

 

 

 

우리 수련 과정에서 진료비가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게 되는 환자가 있으면 그 환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얼마나 발을 동동 굴렀습니까? 우리 둘이 함께 시립병원에서 수련받던 때 환자 한명을 중환자실에서 함께 지키던 기억을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저는 여전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의사입니다.

 

 

 

어쩌다가, 도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수술일정 잡아 놓은 간암 환자를 퇴원시키고, 유도분만 하다가 아이가 위험해지고. 도대체 이게 웬 일입니까?

 

 

 

지금 의사들의 통신공간에는 너무 섬뜩한 얘기가 씌어 있어 도저히 들어가 볼 수 없는 형국입니다. 외국 의사의 파업과정에서 환자가 몇 명이 죽었으니 우리도 환자가 몇 명이 죽어봐야 정부가 우리의 노력을 알아줄 것이라니요.

 

 

 

거기엔 응급실과 중환자실도 폐쇄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더군요. 물론 저는 이런 의견이 사랑하는 당신과 우리 친구들의 생각을 대변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의견이 버젓이 인터넷에 등장하는 한 누가 의사의 딱한 사정을 이해하겠습니까? 바로 며칠 전 병원 노동조합이 파업할 때에도 응급실과 중환자실, 그리고 응급 수술에 대비한 5분 대기조를 짜서 응급 상황에 대비하지 않았습니까?

 

 

 

환자들 지옥으로 모는 일 방치하렵니까

 

 

 

의약분업 정책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제가 의약분업의 구체적인 안을 놓고 이야기할 자격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처음 의약분업 이야기가 나왔을 때 당신과 나는 스테로이드와 항생제 사용량만 줄더라도 우리나라에서 그건 성공한 정책이라고 분명 말하지 않았던가요. 항생제에 내성이 생겨서 죽어가는 환자, 스테로이드를 너무 많이 써서 온 몸이 모두 망가진 환자들을 볼 때마다 얼마나 개탄했습니까? 그리고 그때 우리 나라에도 빨리 의약분업이 실시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런 의약분업의 세부 안이 몇가지 잘못됐다고 의사들이 생각한다고 해서, 환자들을 지옥으로 몰고 가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실 생각입니까? 우리 졸업할 때, 우리가 처음 병아리 의사가 되었을 때, 그리고 정식으로 전문의가 되었을 때 그런 생각 꿈에라도 꿨던가요? 당장 시아버님, 즉 당신의 아버님이 다시 입원을 해야한다면 그 땐 어떻게 하실 겁니까? 시아버님이 다시 병원에 가셔야 할 날짜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의약분업의 세부안을 고칠 수 있는 가능성은 많습니다. 일단 시작하고도 얼마든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칠 수 있는 시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를 넘기기 어려운 환자에게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쥐도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그게 지금 의사의 정서라고 당신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제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들이 바로 구석에 몰린 쥐입니다. 생명을 다투는 환자들이 의사의 생계문제로 인해 희생돼야 한다면, 바로 그분들이 궁지에 몰린 쥐처럼 공격자를 향해 달려들 것입니다. 제가 환자라면 그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사회 현실이 의사가 생존권을 말할 상황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구제금융시대를 겪으면서 자식의 손가락을 자르고 자신의 다리를 스스로 끊어가면서 보험금을 타야했던 아버지들, 폐업으로 부당해고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버지들과 그 가족 앞에서 아직 우리는 생존권을 얘기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그들이 환자가 되어서 갈 곳이 없을 때 과연 누구를 향해 덤비려 들겠습니까?

 

 

 

이건 아닙니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전공의이더라도 엄연히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마친 의사인데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외면하다니요? 의사가 환자를 거리로 내몰다니요? 시민들은 의약분업의 필요성이나 제도 하나 하나를 묻기 이전에, 오늘 당장 아프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묻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저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합니까? 의사도 파업권이 있으니 아프면 조금 참으라고 할까요? 혹시 암에 걸렸으면 현대의학으로 고치기 힘드니 그저 참으라고 할까요? 중풍이라도 걸리면 사실만큼 사셨으니 집에 그냥 계시라고 할까요?

 

 

 

물론 의사에게도 파업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아닙니다. 파업에도 최소한의 예의는 있습니다. 막말로 한번 아파 보셨나요? 아픈 것만도 서러운 환자들에게 의사의 사정이 이러하니 병원에 오지 말고 참으라고요? 아무리 감기는 그냥 두면 났는다고 하지만, 채 돌도 안된 우리 아이가 감기로 열이 펄펄 났던 밤 의사인 당신은 의연하셨나요? 하물며 중환자실과 응급실이라니요?

 

 

 

여보, 제발 의약분업을 이유로 하는 단체 행동에 금을 그어 주십시오. 당신이 밤새도록 고민하였듯이 이것이 올바른 방법의 투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 말없이 고민하는 다수 의사의 의견이 드러나도록 노력해 주십시오. 당신 환자 중에 반드시 약을 먹어야 하는 환자가 있는데 단체행동 때문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고민하셨지요? 아마 많은 의사들이 당신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압도적인 분위기 때문에 감히 말을 하지는 못하겠지요.

 

 

 

나는 오늘 당신이 전공의들의 파업으로 텅 빈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지키다가 지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만은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지켜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음씨 고와 남에게 싫은 소리 한번 못하는 당신이지만, 전공의들이 최소한 응급실과 중환자실로 빨리 돌아오도록 간곡히 부탁해 주기 바랍니다. 오늘 아침 아버님께서 제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제발 네가 설득해서 남편이 폐업에 동참하지 말아달라고. 이것이 바로 국민의 정서입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아내가 잠 못 이루고 글을 씁니다.

 

 

 

2000년 6월20일.

 

 

 

 

 



66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