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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신앙] 상처 받은 신자, 상처 입은 사목자-----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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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24.10.164.*]

2014-01-14 ㅣ No.10470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세상 속 신앙 읽기] 상처 받은 신자, 상처 입은 사목자

글 송용민 · 그림 최수화


교회생활에서 가장 힘든 부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신자들은 바쁜 세상에서 신앙생활에 대한 피로감과 의무감 때문에 힘들다고 말하곤 한다.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다보니 신앙적 가치들보다는 세속적 가치들이 당장 더 중요하게 여겨지니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은 주일 의무를 지키는 정도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의 이야기고, 조금 열심인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은 대개 교회 안에서 주고받는 상처 때문에 교회생활에 염증을 느낀다고 한다. 속된 말로 ‘누구 보기 싫어서’ 성당 안 나가는 셈이다.


교회의 구성원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교회는 말 그대로 ‘믿는 이들의 공동체’ 또는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믿음을 살아가는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들 모두가 같은 뜻과 같은 지향을 갖고 사는 것은 아니란 뜻도 숨어있다.

믿음은 하나이지만, 그 믿음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방식과 가치관이 다른 이들끼리는 얼마든지 서로 오해와 편견, 갈등과 분열이 생길 수 있다. 인간의 본성상 불완전성과 죄성은 교회가 지닌 인간적 요소로 피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교회가 거룩한 것은 하느님의 성령께서 현존하시는 신앙 공동체가 거룩하다는 것이지 교회의 구성원이 모두 거룩하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면은 굳이 교회의 오랜 역사를 되돌아보지 않고 오늘의 교회 모습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교회 구성원인 신자들이나 성직자들이 모두 거룩하고 완전하기 때문에 교회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하나의 신앙으로 묶어주시는 성령의 거룩함이 믿음을 고백하는 공동체 안에 머물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다.

그럼에도 신자들이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세상살이가 그렇듯이 교회 안에는 천사들만 사는 줄로 잘못 아는 것이다. 아무리 선한 의지와 하느님을 향한 열정을 가졌다 해도 신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윤리적으로나 인격적으로 결함이 없는 그런 신앙 공동체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거룩함은 티 없는 완벽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악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인간의 회심과 숭고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십자가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이 거룩한 것과 같다.


새내기 신학생과 새내기 신자

신학교에 처음 발을 딛는 새내기 신학생들이 가장 먼저 충격을 받는 일이 있다. 그들 생각에 신학교에 들어오는 사람은 그야말로 신부가 되고 싶어 하는 착하고 흠 없고 기도도 열심히 잘하는 이들뿐이라고 착각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서로 조심하고 배려하며 살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공동생활에서 오는 다양한 형태의 갈등과 다툼, 이제까지 살면서 익숙해진 생활방식과 가치관의 차이로 적지 않은 상처를 주고받는다.

새내기 신학생들이 이런 갈등의 시간을 잘 이겨내면 공동체 안에 있는 모순적 상황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생기지만, 그런 일로 상처를 받고 견디지 못하면 신학교에서 살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내가 신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너무 기도만 열심히 하고,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며 신심 좋은 신학생을 ‘상투스(Sanctus)’라고 별명지어 부르던 기억이 난다. 그런 동료들은 오래가지 못해 신학교를 떠나곤 했다.

일반 성당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한 새내기 신자들은 교회에 대한 좋은 이미지와 환상을 가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느끼며 상처 받고 환멸을 느껴 떠난다.

신앙생활을 오래한 신자라도 조금 교회에서 봉사를 하다 보면 서로 다른 생각과 관점 때문에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 받으며 힘들어한다. 나름대로의 신심이 깊지 못하거나, 신앙의 뿌리가 없는 신자들은 동료 신자들의 인간적인 결함과 잘못을 덮어주거나 용서해주지 못한다. 심한 경우에는 그런 동료들의 모습이 보기 싫어 교회를 떠나거나 냉담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처를 이겨내는 힘은 기도

상처 입은 신자들이 가톨릭교회에 늘고 있다는 사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통계적으로도 신자들의 3분의 2가 명시적인 가톨릭 신자로서 살지 않는다. 물론 그들이 하느님을 거부하고 사는 것은 아닐지라도 교회와 관련을 맺지 않고 자기만의 세상에서 신앙을 지키고 사는 경우가 많다.

신자들 상호 간에 입은 상처 때문에 이사를 하거나, 소속 본당이 아닌 다른 본당으로 미사를 참례하며 신앙을 이어가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사목적 배려가 지금으로선 없는 듯싶다. 개인의 신앙 체험이나 신앙 쇄신을 통한 회심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상처 입은 신자들만큼이나 상처 입는 사목자들도 늘고 있다. 성직자들이 과거에 누렸던 지위나 축성된 그리스도의 사제들이란 신앙적 존경심이 사라진 지 오래다.

아직 구교우들이 오랜 가톨릭 전통에 따라 사제들을 존경하고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교회정신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사제들이 급속도로 세속화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신자들은 사제들이 받은 사제직에 대해 깊은 존경심도 없고, 사제 개인의 인격적 결함과 때로 잘못된 판단으로 생긴 실수들을 덮어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사제들만이라도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거룩하고 도덕적으로 흠 없는 삶을 살아달라는 요청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처 입은 신자나 상처 입은 사목자 모두가 믿음 안에서 서로 위로하며 격려하고 기도해 주며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 되었다. 우리 시대는 내가 상처 입은 것만 기억하고, 상처 준 일들은 빨리 잊거나 용서받으려는 세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기적인 판단과 욕심 때문에 교회가 가진 소중한 신앙의 유산들을 너무 쉽게 잃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의힘과 시련을 견뎌내는 인내심은 그저 인간적인 노력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가장 기초인, 기도할 줄 아는 능력이 상처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란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련 중에 기도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공생활 가운데 언제나 기도하는 일을 잊지 않으셨다. 그분은 기적을 일으키신 후, 말씀을 선포하시기 전에, 그리고 당신의 전 생애를 하느님께 봉헌하시며 하느님께 기도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셨다.

오늘날 서로가 주고받은 상처 때문에 교회생활을 포기하는 이들이나 상처받아 쓰러져가는 사목자들, 그래서 신자들에게 그 상처를 되돌려주거나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이들은 스스로 물어야 한다.

과연 나는 그런 시련 중에 기도하고 있는가? 하느님께서 내게 그런 고통의 시간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치유를 청하며 신앙을 청하고 있는가?

제자들이 예수님께 부탁했듯이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주십시오.”(루카 17,5)라는 간절한 기도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이다.

송용민 사도 요한 - 인천교구 신부. 삼산동본당 주임으로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이며, 주교회의 교회일치와 종교간대화위원회 총무이다. 1997년 사제품을 받고, 2003년 독일 본대학교에서 기초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상 속 신앙 읽기」, 「신학, 이해를 찾는 신앙」 등을 썼고, 다음카페 ‘신학하는 즐거움’을 운영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3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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