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곡성당 자유게시판

달봉 신부의 짧은 오늘의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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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달현 [dalbong6] 쪽지 캡슐

2003-03-14 ㅣ No.1975

어제 저녁에 갑자기 동기 신부들이 제게 찾아왔습니다. 아무 예고도 없이 휴가의 마지막 날을 함께 보내고 싶어와 왔다는 동기 신부들을 맞아들였습니다. 동기 좋다는 말이 실감나는 밤이었습니다. 멀리서 친구가 찾아오니 이 아니 기쁠손가?(맞나)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 5,20-2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 내용은 용서에 관한 말씀입니다.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누가 너를 고소하여 그와 함께 법정으로 갈 때에는 도중에서 얼른 화해하여라."

 

용서와 화해처럼 꼭 해야할 것 같은 데 하기 힘든 일도 없는 것 같습니다. 누구나 한 명 쯤은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누구나 한 명 쯤은 미워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다 보니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 하는 감정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해서 고해성사를 보거나 누군가를 미워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늘 시달립니다.

 

’상처와 용서’라는 소책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용서라는 말 앞에서 종교적 콤플렉스를 느낀다. 용서라는 말만 들으면 웬지 움츠러들고 자신이 없어진다, 마치 자신이 위선자 같고, 하느님 앞에서 죄송스러움을 느낀다. 사순절이나 대림시기에 판공성사를 받은 많은 신자들은 다음과 같은 생각에 시달린다. <나는 정말로 용서하였는가? 그런데 왜 내 마음은 여전히 아프고 섭섭한 것일까?>  

 

여기에 용서에 대한 종교적인 오해가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대부분의 우리는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하였다면 더 이상 그 사건, 그 사람으로 인해서 아파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용서에 대해 오해하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행위로서 용서한다는 것>과 <느낌의 차원에서 용서를 한다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종교적인 선택이고 결심이지만 곧 종교적인 행위이지만 내가 느낌으로 상대를 용서한다는 것은 그와는 별개로 시간이 걸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을 먹고 결심을 하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삶 속에서 느끼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 안에서 아무리 용서한다고 해도 잘못한 사람을 만나면 여전히 얼굴은 굳어지고 아픈 상처에서는 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치유가 되기 전 그 시간동안 일어나는 미움과 증오의 감정으로 괴로울 때, 우리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마음의 소리를 듣는 일이라고 합니다. 곧 <이 상처를 치유 받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상처에 덧이 나고 아프더라도 용서와 화해를 청하는 행위는 꼭 필요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용서와 화해의 행위 다음에는 시간을 두고 느낌으로까지도 용서하게 될 때까지를 기다려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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