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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재 [sjlee] 쪽지 캡슐

2000-07-29 ㅣ No.1013

오늘의 교회가 되기 위한 반성

                                                       徐  公  錫

 

들어가면서

 

구약성서가 희년을 말하는 것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체험한 이스라엘 원초의 신앙 생활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7년에 한 번, 또 49년 혹은 50년에 한 번씩 광야의 체험으로 스스로를 점검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하느님의 함께 계심'(출애 3,12 참조)을 체험했습니다. 그 함께 계심은 이웃을 위한 '돌보아 줌과 가엾이 여김'(출애 33,19 참조)을 실천하는 사람 안에 살아 있었습니다. 이 실천으로 사람들은 모두 평등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희년 혹은 대희년을 설정한 것은 모두가 평등했던 하느님 백성의 초기 체험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2000년을 대희년으로 설정했다면 우리도 원초의 그리스도 신앙 체험으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복음이 전하는 예수의 삶이 보여준 구원적 실천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수는 유대교 기득권 층이 죄인으로 낙인찍은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루가 7,48; 요한 8,11 참조). 예수는 유대 종교 기득권자들이 죄의 대가로 벌받은 이들이라고 주장하던 병든 이와 장애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는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 선포하십니다(요한 5,17: 9,3 참조). 예수는 유대 종교 기득권자들이 단죄하고 기피하던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렸고(마태 11,19), '세리와 창녀들이 유대교 지도자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마태 21,31)고 선언을 하기까지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함께 계심'을 실천하기 위한 율법이었고 제사 의례였지만, 율사와 제관들은 그것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단죄하고 소외시키는 수단으로 삼고 말았습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면서 이스라엘 원초의 신앙 체험을 되살리는 노력을 했습니다.

 

역사 안에 살아가는 신앙 공동체는 원초의 신앙 체험을 상기하고 자기 스스로를 쇄신하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신약성서가 '기억'(루가 22,19-20; 마르 14,9; 요한 14,26)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입니다. 원초의 신앙 체험을 기억하고 그것에 비추어 스스로의 정체성을 점검하고 수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하지 못하면 원초의 것을 망각하고 신앙 체험은 왜곡되고 맙니다.

 

교회가 쇄신되려면 그 구성원들이 현대 신앙인으로서 복음에 입각한 반성을 진지하게 해야 합니다. 2000년의 역사를 살아오면서 제국주의, 봉건주의, 군주주의, 식민주의 등 각 시대의 가치관과 염원에 물든 교회의 언어와 제도입니다. 이것을 점검하고 비판하여 오늘을 위한 신앙 체험을 찾아야 합니다. 교회는 한 시대, 즉 제국 시대 혹은 봉건시대의 유적지로 인류역사 안에 남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발생한 복음의 활력을 어느 시대에나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는 그 활력을 '기쁜 소식'이라 불렀습니다. 오늘 우리가 전하는 예수에 대한 이야기도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과거의 문화권에서 발생한 언어만 반복하면서 세속주의, 물신주의, 쾌락주의에 빠진 세상이라고 개탄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대희년이면 교회 안에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기쁜 소식이 있어야 합니다. 고해성사를 보기 싫어서, 교무금을 제대로 내지 못해서, 혼배조당에 걸려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소외된 신앙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져야 할 것입니다. 각종 차별의 원인도 제거해야 합니다. 남녀 성차별, 재산 유무의 차별, 교계제도로 말미암은 신분의 차별 등...

 

교계제도가 중심이 된 현재 교회 제도는 너무 경직되어 있습니다. 21세기는 여성의 세기, 시민단체 혹은 비정부기구NGO의 세기라고 말합니다. 모든 분야에서 남녀 평등은 실현되어가고 있습니다. 유대교의 경직성 앞에 초기 교회는 대단한 자발성과 유연성을 지닌 그야말로 시민단체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를 얻고, 게르만족의 이동과 정착 과정에서 하나의 조직체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교회는 유럽 중세 봉건사회를 거치면서 지극히 경직된 기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1. '통치(統治)'가 아니라 '공치(公治)'의 현대사회

 

과거 사회는 고딕 건축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기둥에서부터 쌓아 올린 돌들이 지붕으로 연결되어 그 지붕 정상에 꽂은 머릿돌로 말미암아 아치 모양의 구조가 유지됩니다. 건축물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돌들이 자기의 위치를 누릴 수 있는 것은 머릿돌이 그 자리를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구성원들 모두가 머릿돌을 향하여 '성은이 망극하다'고 말합니다. 밑에 있는 돌은 위의 돌에 잘 붙어 있어야 하고 위에 있는 돌은 아래의 것을 잘 밟고 있어야 합니다. 위의 것이나 아래의 것은 한 목소리로 머릿돌을 향해 '통촉하심'을 빕니다. 이 건축물을 유지해 주는 것은 수직적 통치 관계입니다.  

 

오늘의 사회는 이런 구조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머릿돌의 '성은'과 '통촉하심'을 중심으로 수직적 통치를 위해 조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망(網)과 같이 모든 구성원들이 수평적으로 연결된, 공치 질서 사회입니다. 이런 조직 사회에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감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지시하고 명령하겠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에게로는 정보가 흘러들지 않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 사람의 실효성이 저하되어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만일 그 조직체가 한 사람의 그런 우월감을 어떤 이유에서든지 정당화하고, 그 지시와 명령에 순종하면 그 조직은 우월감을 가진 그 인물의 수준으로 퇴보합니다. 조직 구성원들의 창의력도 퇴화하고, 그 조직은 바보들의 행렬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 사실은 교구와 본당 등 교회 조직에도 해당됩니다. 교회가 교계제도의 경직성을 고집하면, 교구는 주교 한 사람의 수준으로, 본당은 본당 신부 환 사람의 수준으로 전락합니다. 복음적 실천을 위한 공동체의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해석과 기여는 차단되고, 현대인은 그런 공동체 안에서 소외감을 느낄 것입니다.

 

과거 사회가 수직적 관계를 중시한 것은 구성원이 지닌 실효성의 차이가 컸기 때문입니다. 극소수의 지식인과 대다수의 무식인, 극소수의 문자 해독 자와 대다수의 문맹으로 구성된 단순 사회였습니다. 그 사회를 위한 의사 결정권은 극소수의 지배층이 가졌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하위 신분의 사람이 상위 신분의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은 하위의 사람이 스스로의 실효성을 높이는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사회 전체의 실효성과 수준을 높이는 일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과 같은 다원(多元)사회 안에서는 정보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단순 체계가 아닙니다. 조직 구성원의 다양함이 존중되고 그들이 지닌 다양한 정보가 수평적으로 원활하게 흐르는 공동체가 큰 실효성을 지닙니다. 단일 민족이 아닌 미합중국이 오늘날 모든 면에 있어서 큰 실효성을 자랑하고, 유럽연합이 탄생하였으며, 국가들 간 지역적 다양한 국제 협력 기구들이 만들어지는 사실들이 입증하는 일입니다. 현대 정보 사회에서는 정보의 발신자와 수신자가 구별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 보십시오. 모두가 정보의 수신자이면서 동시에 모두가 발신자입니다. 정보가 흐르는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띄워진 정보 자체의 실효성입니다. 정보를 띄운 사람의 신분을 묻고 정보의 실효성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신분이 실효성을 보장하는 사회가 아닙니다. 실효성이라는 진실을 소중히 여기는 오늘의 사회입니다. 그 실효성은 다원적 정보 관리에서 발생합니다. 오늘의 기업들은 넓은 중역실을 갖지 않는 대신 다양한 규모의 회의실을 많이 가집니다. 다원적 정보 관리를 위해 다양한 회의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필요하면 평사원도 회의 참석 임원과 직원을 지정하여 회의를 소집합니다.

 

2. 중세 유럽 봉건사회의 유적지인 교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본 사람들이 그것을 기억하고 실천하기 위해 모인 단체입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이고 교회는 우리들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일을 기억하고 실천하겠다는 우리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언어와 제도는 그 사회를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외면하면 할 수록 하느님의 일에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세상을 대립시켜서 생각하던 플라톤의 이원론적 사고방식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말씀이 강생하여 사람이 되셨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인간 삶의 현장이 중요합니다. 그 현장이 과거와 같이 수직적으로 조직되었든, 오늘과 같이 수평적으로 조직되었든, 그 시대 사회 안에서 복음을 기억하고 실천해야 하는 교회입니다. 현대 세계에는 아직도 과거의 군주주의 혹은 제국주의 통치 개념을 가진, 시대적 지진아(遲進兒)들이 극소수 있습니다. 그런 환상에 사로잡힌 사람이 지도자로 군림하면, 그 집단은 참으로 불행합니다.

 

교회의 제도는 시대적 산물입니다. 로마제국 안에서는 제국의 국가 조직이 가장 이상적인 것이었습니다. 유럽 중세 봉건 사회 안에서 사람들은 봉건적 조직 외의 것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인류 역사 안에 살아가는 교회입니다. 4세기에 신앙의 자유를 얻고,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제국의 문물을 수용하였습니다. 8세기 유럽 봉건사회의 정착과 더불어 봉건제도적으로 확립된 교회의 조직입니다. 16세기 개신교의 분열을 겪으면서 놀란 교회는 봉건주의적 교계제도를 더 강화하여 그런 비극이 다시는 역사 안에 되풀이되지 않도록 장치하였습니다. 트렌토 공의회(1545-1563)가 만든 장치들입니다. 교구의 모든 일은 주교가 결정하고 본당의 모든 일은 본당 신부가 결정하도록 했습니다. 400년 전의 결정들이 아직도 통용된다고 유구(悠久)한 전통을 자랑하렵니까?

 

18세기 계몽사상과 더불어 합리주의가 등장하였고, 그 합리주의는 드디어 19세기 유럽 무신론의 출현으로 이어졌습니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1869-1870)는 합리주의를 배격하면서 교황의 무류권을 정의하여 교계제도에다 막대한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이 무류권 선포의 의도는 로마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실제적으로는 교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교계제도의 강화라는 효과를 내었습니다. 주교들과 신부들의 시선은 로마로 향하고, 신앙인들이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을 외면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인간 삶의 체온을 잃고 화석화되어갑니다. 현대 사회와 함께 호흡을 하지 못하는 집단이 되어간다는 말입니다.

 

주교들의 선임은 밀폐된 주교회의가 상신하고 로마가 임명합니다. 한국어 전례서들은 로마의 인준을 받아야 사용 가능합니다. 로마가 한국의 실정을 한국 사람들보다 더 잘 알고 있어야 하고, 한국어도 한국 사람들보다 더 통달하고 있어야 그 실효성이 보장될 것입니다. 과거 중세의 관행을 고수하는 교회입니다. 따라서 여성들은 교회의 의사 결정에서 온전히 제외되어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한번 폐지했던 금육일과 단식일 제도를 부활시키고, 정월 초하루를 의무 축일로 다시 정한 것도, 우리 삶의 장을 외면하고 로마로만 향한 시선들이 만들어 놓은 불합리한 일입니다. 주교들의 서품식과 착좌식이 중세 유럽의 황제 및 영주들의 대관식과 착좌식을 본 딴 것이고, 사제 서품식이 유럽 중세의 기사(騎士) 수임(授任)식과 비슷하다는 사실도 생각해야 합니다.

 

3. 섬김을 위한 유연한 기구로서의 교회  

 

신약성서가 말하는 복음 선포는 '섬김'입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의 말씀은 간곡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백성들을 다스린다는 사람들은 엄하게 지배하고 그 높은 사람들은 그 백성들을 억압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이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여러분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사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러"(마르 10,42-45) 왔습니다.

 

바울로 사도가 채집하여 수록한 초대 교회의 노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노획물인 양 중히 여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으니 사람들과 비슷하게 되시어 여느 사람 모양으로 나타나셨도다.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 곧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필립 2,6-8). 흔히 '겸손'이라 표현되면서 그 뜻이 희석되는 '낮춤'이나 '섬김'은 윤리적 교훈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그리스도 신앙인의 존재론적 연결을 의미하는 실천입니다.

 

신약성서가 말하는 신앙은 죽기까지 스스로를 낮추고 비우고 섬기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교계제도에 몸담은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신앙인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실천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스스로를 낮추고 섬기는 것은 타인을 긍정하는 자세입니다. 타인을 긍정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말을 듣습니다. 교구의 장(長)이고 본당의 장이라고 일방적으로 명령하려 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정보의 흐름에서 소외되어 현대인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일방통행의 언어를 쓰지도 않을 것입니다. 혼자 다 알고 있는 듯한 태도, 고자세의 강론,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복장의 강조는 일방통행의 언어를 사용하는 구체적 증거들입니다. 초자연은 자연이 아니고, 실체는 우연(偶然)이 아니며, 하느님은 세상이 아니고, 성직자는 신자가 아니라는 형이상학적 배제(排除)의 논리를 노출하는 언어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말하는 섬김은 다양함을 긍정하는 자세입니다. 하느님은 창조에서 다양함을 세상 안에 뿌리셨습니다. 예수도 성령도 다양한 하느님의 자녀를 만드시는 '협조자'(요한 14,16)이십니다.

 

예수는 강자 앞에 약하고 약자 앞에 강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권위와 순종을 강조하는 것은 강자 앞에 약하고 약자 앞에 강하게 처신하라는 메시지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강자 앞에 약하고 약자 앞에 강한 것은 동물 세계의 질서입니다. 권위와 순종은 '군주의 미움은 죽음이다'는 과거 중세 유럽의 속담이 통용되던 시기에 사람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명철보신(明哲保身)하는 질서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일과는 무관한 처신입니다.

 

"신앙은 세상의 말을 듣는 것이다"라는 이름의 책이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되려면 사람들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현재 한국 교회의 현주소를 알고 싶으면, 본당 신자들의 말 뿐 아니라, 교회가 운영하는 각 기관들 안에서 종사하는 신앙인과 비신앙인들의 솔직한 말을 들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솔직하게 그들 마음속에 있는 것을 말해 주는 여건에서 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진심으로 듣지 않는 우월감의 소지자에게는 진심을 말해 주지 않습니다. 교회를 등지고 떠나는 신자들, 소위 냉담하는 신자들의 말도 귀기울여 들어보아야 합니다. 신앙이 없어서 그들이 떠난 것이라고 '망령된 증참(證參)'을 하지 맙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는 식으로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왜 교회가 싫어졌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싫어진 이유들 안에 우리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있을 것입니다.

 

나오면서

 

한국 교회가 새로워 질 수 있는 길은 젊은 사목자들이 먼저 새로워지는 데에 있습니다. 전통을 존중하는 것은 과거의 것을 그대로 반복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전통은 과거 신앙인들의 삶입니다. 전통이 전달하는 신앙 체험을 읽어내어 그것을 수용하고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실천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통에 충실한 자세입니다. 그것을 위해 사목자와 신자 각자의 자유와 창의력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세상에 권위주의는 아직도 통치 망상에 빠져있는 지진아의 순진한 생각이거나, 함량미달의 사람이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위장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권위주의적 자세는 정당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자유롭게 대화하고 협조하고 기여하는 것이 현대 사회 안에서 자신의 실효성을 높이는 길입니다.

 

현대 세계는 다원화되었고 모든 분야가 전문화되었습니다. 전문성이 없으면 그 사람의 기능이 저하됩니다. 사목자는 정치 혹은 사회 개혁 전문가도 아니고 본당이나 교구 공동체를 다스리는 기관장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 언어에 대한 역사 비평적 안목도 가져야 하고, 해석학적 교양도 있어야 합니다. 성서 구절들을 전부 역사적 사실 보도로 생각하고 믿으라고 강요해서도 안되고, 과거 교의적 표현들을 문자 그대로 계시 진리라고 착각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순명이라는 미명하에 주교의 마음에 드는 일만 찾아서 하는 당당하지 못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스스로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인격도 존중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창의력과 자율성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의 창의력과 자율성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 안에는 신자들의 인권 유린 사례들이 많습니다. 과거 군사 정권 시대에 그렇게도 인권을 부르짖은 교회라면 그 내부에도 인권은 존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교와 신부들의 말이라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 순진한 신자들만 상대할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신자들과 함께 생각하고 함께 의논하고 결정하는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외래 문물을 받아들여 그것이 지닌 논리를 극단으로 몰고 가는 성격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유학(儒學)과 주자학(朱子學)을 수용한 조선은 그 논리를 극단으로 발전시켜 본고장인 중국에서보다 더 유교적이고 더 주자학적인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공산주의를 받아들인 북한이 공산주의 논리를 극단으로 발전시켜서 세계에서 유일하게 아직도 존속하는 공산주의 이념 국가로서 온 인민을 굶기고 있습니다.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 와서 16세기 유럽의 개신교 못지 않은 개신교적 성격을 보이고 있으며, 19세기 유럽의 가톨릭 신앙을 전수 받은 한국 가톨릭 교회는 로마보다 더 로마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나 대충 대충하는 우뇌(右腦)적 사고 성향의 한국인이기에 복음에 대한 깊은 반성도 없이, 대충 대충 봉건적 논리만 극단으로 발전시켜서 유럽 중세의 유적지인 교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본당은 미사 전례의 장소만 되지 말아야 합니다. 본당 신자들의 카리스마를 계발하여 그 지역에 있는 '가난한 이', '굶주리는 이', '우는 이'가 모두 행복할 수 있는 실천을 하는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노숙자, 독거노인, 환자, 여러 가지 고통에 시달리는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내어주고 쏟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내어주고 쏟는' 실천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이런 정체성에 진실하고 충실한 것만이 우리 교회의 내일이 가능하도록 하는 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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