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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Re:혼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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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영혼 [61.106.105.*]

2005-05-25 ㅣ No.3444

 

 

   † 찬미 예수

 

   자매님 역시 전례를 우선적으로 지향할 것인가? 말씀을 우선적으로 지향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신것 같군요. 대개 자매님같은 경우는 양심의 분별력이란 것에 대한 장인 정신이 있기에 그러한 혼돈 역시 은총이겠지요. 일단 바둑에서도 장인들이 상대가 그 수를 어떻게 두던지, 아생 연후에 살타를 위하여 내가 다만 평화를 구하듯 임해야 하겠지요. 문제는 레지오라는 것이 군대이기에 친구의 그것을 보고 가만히 있는 것도 죄인가?에 골몰함일 것입니다.

 

하지만 질서란 것도 있겠지요. 예를 들어 본당 화장실 불을 신자들 99%가 집의 그것처럼 관리하지 못한다면 관리인 입장에서 과연 저사람들에게 내가 행하고 있는 침묵이 비겁한 침묵인가? 아니면 거룩한 침묵인가?를 성찰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튼 관리인 측면으로 가장 어려운 과제중 하나가 화장실 불끔인데 그것도 신비인듯 합니다.

 

사람들은 뭔가 어제까지 소홀하였을 것입니다.

 

교회의 레지오에도 세가지가 경우가 있는것 같습니다. 성모님의 군대(단체), 그리스도의 병사(꾸르실료), 또 그러한 길을 걷는 중간급의 교우들이겠지요. 전자의 레지오 마리애와 후자의 레지오 크리스티는 단체 선행 우선 지향과 개인 영성 쇄신 우선 지향이 특징이기도 합니다만, 그 과정이 꼭 그렇치만은 않다는 것을 자매님도 공감하실 것입니다.

 

레지오 마리애는 교회에서 비교적 모범적으로 전투에 임하고 실적을 올리고 있습니다만, 꾸르실료는 다소 조용한가운데 마찬가지겠습니다만, 문제는 어제도 오늘도 여전히 끊이지 않는 정체감이란 단어가 속출하고 있슴이지요.

 

그만큼 우리가 미사전 입당시에 제대 봉헌이 소홀하였기에 말로는 남을 배려하고 이타적으로 살겠다 하지만 정작 성체를 거양하고 영할 때 무딘 자신으로 인라여 동참하기가 힘듦을 발견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 자매님도 귀가 닳도록 들어보셨겠지만 그것을 미사 직전 입당시에 새로운 맘으로 그리스도의 제대위에 봉헌해 보세요.

 

그리고 성체 거양시 주님이 성화시켜주시는 것을 목격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체험까지 이를 확률이 높겠지요.

 

그리하여 작은 꽃, 강아지에게도 주던 사랑을 시어머니께도 다시 줄 수 있는 힘으로 돌아가는 자신을 재발견 하는것입니다. 여기에도 지금의 자매님과 같은 장인 정신이 함께 하겠지요. 아무튼 레지오 마리애는 틀림없이 매우 자랑스럽고도 좋은 환경임이 분명할 것입니다.

 

다만 강물같은 그윽한 침묵이 아쉬울 수 있고

 

바다같은 싱그러운 침묵이 아쉬울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주님의 성스러운 침묵에의 까지 그런점들이 아쉬울 수 있겠지요.

 

좋은 음악도 보면 감성적인 발라드등도 좋치만 또한 햇볕같은 가톨릭 공동체 성가등도 좋치만 저는 개인적으로 작금에 이르러 그레고리오 성가에 가장 마음이 끌리더군요.

 

그레고리오 성가는 자매님이 바라는 그것처럼 무자아로 부르는 것이 선명하기 때문입니다.

 

헌데 서울 교구 본당 게시판에 모조리 그레고리오 성가 새 가족을 초대한다고 하여도 도무지 감감 무소식이요, 우리는 다만 주님께 그것을 봉헌하였다고 자위함에 그침은 또 왜일까요?

 

사형수가 삶에 애착을 보이며 시시각각 밀려드는 죽음의 공포속에서 ''내가 저 나무위에 온종일 올라있어 삶을 영위할 수만 있어도 좋을텐데...''라는 생각을 하였듯, 또한 물에 빠진 내가 그때에 지푸라기 하나라도 있슴 잡을 테고 손 내미는 저사람이 좀 더 적극적으로 잡아주면 좋을텐데...라면서 짧은 순간 번개처럼 스치던 생각들을 갖게 되지요.

 

자매님도 그렇게 기도해 보세요. 일반적인 가톨릭의 그것처럼 전례를 우선적으로 지향할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한핏줄인 개신교 형제들의 장점을 모은 그것처럼 말씀을 우선적으로 지향할 것인가?의 하느님으로부터의 점괘가 나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점괘라 해서 죄송합니다만, 점이면 점이겠지요.

 

성심껏 봉헌한 뒤에 그 성체를 다시 영할 수 있으면 물론 금상첨화겠지요.

 

아무튼 세상은 더도 덜도 없이 내가 변한만큼 변해 보이나봅니다.

 

누구를 깊이 사랑해 보셨나요?

 

그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을 다만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보신적이 있나요?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우리가 성체를 영하였으니 또한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요.

 

그저 바라만 보자는 주장은 아닙니다.

 

A는 B로 대체 받을 수 있으니 내가 때때로 시끄러운 쓰레기 더미를 보지 않고 벌써 몇주째 절두산 성지의 박물관에서의 ''자원 봉사자''를 기더리고 있습니다라는 초대 문구를 바라보고 묵상함도 한 방법이겠지요.

 

내가 이 부족한 위인이 과연 순교자들의 숨결을 벗삼는 그 박물관에서 썩을 수는 있을까?

 

우리 동네는 말이지요.

 

10년 가까이 100가구중 5명 정도의 세대주만 모이고 있답니다.

 

저는 성격과 기질이 아직도 급한 기운이 남아있는 남자라 그런지 때때로 복창 터지지요.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며 맨날 자기 반성 타령하면 무엇 합니까? 그런데 이게 제 이야기이기도 할 것입니다.

 

지난번엔 화를 내는 것도 봉헌이다 여기며 용기를 더하며 그것을 거론하게 되었습니다.

 

헌데 요셉 구역장이 다소 세심하지 못한 넓은 가슴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그 구체적이자 하는 목표 관념을 케치프레이드화로 오인하는것 같더군요.

 

그러자 이날은 술자시고 온 노인이 역시 10여년째 성서를 들먹이며 자기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는것으로 다가오더군요.

 

결국 이날은 서로의 시행착오로 인하여 노인이 크게 흥분함으로써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종료되었습니다.

 

물론 저마다 성찰의 은총이 따를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나는 과연 이 대목에 관하여 다음번에 전례를 우선 지향할 것이냐, 말씀을 우선 지향할 것이냐? 하며 잠시 번민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따르면 겁도 안날텐데 말이지요. 혹여 그사람들이 나름데로 성령발을 받고 그랬는지, 아니면 내 자아로 그것을 더 바라보았는 그것도 점검해보세요.

 

군인 정신으로 말이에요.

 

저는 이때에 오히려 내가 다신 그따위 세대주 모임 안간다! 하며 씩씩거리게 되기도 하였군요. 아무튼 시행착오이기도 하겠지요.

 

그러다 다시 미사때에 회심을 하게 된 것이지요.

 

빌라도 역시 유다처럼 후회하고 자살하였고...

 

바라바는 하느님 대신 삶을 영위하였기에 훗날 성인이 되었고...

 

지금의 내안의 깊은 나는 과연 빌라도인지 바라바인지 아니면 예수님인지 모르겠습니다.

 

새 미사때 주님이 혹 알려주실지도 모르겠네요.

 

자매님도 잘 될겁니다. 그 근심과 함께 나아가는 길 건승하시길.

 

다투면서 크는 나무들, 무색 무취의 물같은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 부부들처럼 말씀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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