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사순 제4주일 (가해) 요한 9,1-41; ’23/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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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3-03-14 ㅣ No.5329

사순 제4주일 (가해) 요한 9,1-41; ’23/03/19

 

우리는 살면서 뜻밖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상하고 신비한 경험을 한 뒤 우리는 변하게 됩니다. 죽을뻔한 상황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든지, 기도하면서 주님을 만났다든지, 일상에서 주님의 은총을 경험했다든지,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주님의 응답을 받았다든지 할 때 우리는 힘이 샘솟고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한 번 은총을 입었다고 해서 다시는 어려움이 없는 것도 아니고, 다시 그런 은총을 또 입는 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체험들은 일생 동안 우리 삶의 기준이 되고, 좋은 추억으로 간직되어 힘겨울 때마다 우리 삶의 영양분이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과 함께하게 되면, 과거에 읽었던 성경구절도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롭게 다가오고, 새로운 의미로 우리를 일깨워주고, 우리 마음을 새롭게 불러일으켜 줍니다. 그 때마다 주님은 우리를 환하게 비춰줍니다. 마치 천둥번개를 치듯, 끊어졌던 숨이 되살아나듯, 우리에게 새로운 쾌감과 힘을 던져두고, 절망에서 희망의 빛을 비춰주시고, 현세의 난관을 극복하고 펼쳐나갈 새로운 길을 비춰주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무엘은 주님의 명을 따라 사울의 뒤를 이을 왕을 선택하러 갑니다. 사무엘은 이사이의 아들 중에 엘리압을 보고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바로 주님 앞에 서 있구나.”(1사무 16,6) 하면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려고 하자, 주님께서는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1사무 16,7) 라고 하시며 사무엘을 말리십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뽑을 때 사울은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다.”(1사무 10,23) 고 합니다. 이렇게 출중했던 사울은 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여러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긴 하였지만, 주 하느님은 나는 사울을 임금으로 삼은 것을 후회한다. 그는 나를 따르지 않고 돌아섰으며 내 말을 이행하지 않았다.”(1사무 15,2) 라고 하시며 사울을 왕좌에서 내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7) 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아버지 이사이조차 아들로 취급하지 않는 막내 다윗을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선택하십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찾고 이행하려고 하는 다윗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주님 백성의 지도자로 선택하십니다. 힘과 모략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며 주님께 의지하려는 자녀 된 마음으로 주님과 백성들에게 나아가도록 이끄십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시편 2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의 입장에서는 일을 하지 말고 쉬어야 하는 안식일에 예수님이 '고치는 일을 함'으로써, 그리고 눈먼 사람에게 '~까지 가서 씻는 일'을 하게 함으로써, 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남을 죄짓게까지 하였다는 것입니다.

 

바리사이파들에게는 "눈먼 사람이 눈을 떴느냐 안 떴느냐?"하는 사실이나, 눈먼 사람의 답답하고 힘에 겨운 삶은 안중에도 없고 안식일 계명이 지켜지고 유지되느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요한 9,16) 하는 정당한 문제제기도 무시돼 버립니다.

 

바리사이파들에게는 이번 기적이 안식일 계명을 지키지 않은 상태에서 생겨난 것이기에 '무효다!'라고까지 주장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 의미나 군중에게 끼칠 영향이나 효과를 충분히 감소시킬 수 있기 때문에, 거듭 그 부모와 눈을 뜬 사람에게 예수님이 안식일에 '(고치는) '을 했다고 자백하도록 유도합니다.

 

눈 뜬 사람의 부모는 그가 태어날 때부터 눈먼 이었다는 사실, 즉 기적이란 사실은 증명해 주면서도, 그 기적의 의미에 대한 논쟁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침묵해 버립니다. 이러한 부모의 움츠리는 태도에서 힘(?)을 얻은 바리사이파들은 그 눈멀었던 사람을 불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시오. 우리는 그자가 죄인임을 알고 있소."(24) 하고 윽박지르며, 그도 죄인이라고 동의해주기를 요구합니다. 드디어 주님을 섬기기 위한 안식일 계명으로 말미암아, 진정 주님을 섬기지 않고 있는 유다인들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눈 뜬 사람은 유다인들이 이렇게 자꾸 질문을 해가면서까지 얻고자 하는 숨은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오히려 되묻습니다. "어째서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해 눈이 밝아져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가 어려우니까 이제는 그와 나를 죄인으로 만들기 위해?) 여러분도 (더 자세히 알아서)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말씀입니까?"(27)

 

눈 뜬 사람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진실여부에 대해 답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유다인들에게 오히려 그 기적의 정당성을 드러내는 말로써 복음을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31.33)

 

자신들의 속이 드러나 버린 유다인들은 격분하여 그를 회당에서 쫓아냅니다.

 

눈 뜬 사람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밝힙니다. "내가 (거지였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9.33) 그리고 예수님께 "주님, 저는 믿습니다."(38) 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에게서 주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일이 드러"납니다(3).

 

사도 바오로는 오늘 제2독서에서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빛의 열매는 모든 선과 의로움과 진실입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둠의 일에 가담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십시오.”(에페 5,8-11) 라고 일깨워줍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세 가지를 되새겨 봅니다.

첫째, 오늘 복음에서 눈을 뜬 사람처럼 사람들이 우리에게 신앙에 대해 물을 때,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면서 무엇을 어떻게 해주셨는지 말할 수 있을지 자문해 봅시다.

 

두 번째, 바리사이들처럼 사람이 자기 이해관계 안에 갇혀서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할 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변질되고, 실제로 그 사람에게 하느님은 머무실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자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요.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아오. 그러나 그자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오.”(요한 9,28-29)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런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39. 41)

 

세 번째, 예수님께서 앞을 보게 된 이를 찾아가셨듯이, 우리가 복음의 빛으로 새롭게 눈 뜨게 되면,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복음의 하느님 나라로 이끄십니다.

 

이해관계로 둘러싸인 세상의 어두운 관점에서 벗어나, ‘주님이 어떤 의미에서 내게 빛이신지?’ ‘어떻게 하면 빛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깨달음을 간직합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생명에 이르게 하는 빛의 관점으로,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일상에서 접하는 사건과 상황들을 새롭게 해석하고 맞이하여, 주님께서 빛처럼 깨우쳐 주시고 비춰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어나가도록 합시다.

 

주님, 저는 믿습니다.”(요한 9,38)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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