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주님 수난 성지주일(가해) 마태 27,11-54; ’23/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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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3-03-25 ㅣ No.5343

주님 수난 성지주일(가해) 마태 27,11-54; ’23/04/02

 

 

 

 

 

살다 보면 주위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난 한평생 살면서 남에게 모질게 대한 적도 없고, 그렇게 뭐 크게 잘못한 일도 없는데, 왜 내가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자기가 기대했던 만큼 살지 못하는 자신과 남과 비교해보아 만족스럽지 못한 처지에 놓여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푸념하듯 던지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세상이 공평하다고 보십니까? 정직하고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의 삶이 어떻습니까? 왜 착한 사람이 고통을 받습니까? 나쁜 일을 일삼는 사람의 말로가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억울하다고 느낀 적이 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처음에 하느님의 계명에 충실하기만 하면 모두 복을 받고 구원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계명을 잘 지키고 선하게 사는 사람이 오히려 고생하며 살게 되고, 악한 사람이 오히려 선한 사람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떵떵거리고 살아가는 현실이 종종 벌어졌습니다. 어찌 된 일인가? 이런 부정한 현실이 생기는 원인은 무엇인가? 현실에서는 마치 상선벌악이라는 원칙이 거부되는 듯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은 인간의 고통이 잘못 살았거나, 죄를 지은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시대까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을 만나자 제자들은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요한 9,2) 우리도 가끔 끔찍한 일을 당한 사람을 보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라는 식으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현실에서 상선벌악의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것같이, 인과응보의 법칙도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3)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보듯이, 선하게 살면 상을 받고 악하게 살면 벌을 받는다는 상선벌악, 전통적인 원인과 결과의 원칙, 즉 인과응보의 법칙은 무너져 버렸습니다.

 

성경은 하나의 커다란 고통에 관한 책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자기와 자기 자식들, 특히 맏아들과 외아들의 죽음, 후손의 결핍, 고국에 대한 향수, 주위 환경의 박해와 적대,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조롱과 경멸, 고독과 소외감, 양심의 가책, 왜 악인이 번성하고 의인이 고통을 당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 친지들과 이웃들의 불성실과 무례함 그리고 자기 동족의 비운 등이 인간 고통의 형태로 나옵니다.

 

이렇게 인간은 어떤 종류이든 악을 경험할 때마다 고통을 겪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고통과 악이 서로 일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고통받고 있는 모든 것을 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한편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존재적으로 선하다고 규정합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회칙 구원에 이르는 고통에서, 고통을 겪는 인간은 ?”라는 물음을 던진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세상에서부터 인간에게로 고통이 오고 있는데도, 인간은 이 물음을 세상을 향해 묻지 않고, 세상의 창조자이며 주인이신 하느님께 묻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인간의 고통을 그 인간이 지은 죄의 벌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죄를 지은 인간에게 그 죗값으로 고통을 요구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선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고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고통을 겪는 것을 허락하실 뿐이라는 사실을 욥기를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편 고통받는 욥의 모습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예고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불의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 구원이 이루어집니까?

구원은 악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세상의 악을 제거하러 오신 그리스도는 인간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신 구원자이십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고통받는 종이란 예언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이사 53, 4ㄷㄹ. 6ㄷㄹ)

 

고통을 겪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 마음을 연다고 할 수 있으며,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심으로써 고통스러운 수난을 겪으셨지만,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이들은 자신들이 겪는 고통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겪으시고,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골로 1,24) 라고 하신 사도 바오로의 고통관처럼, 주님의 희생제사와 그 구원효과를 믿고 자기에게 닥친 고통을 끌어안음으로써 자신과 세상의 구원사업에 참여하기로 합시다.

 

인간 고통의 세계는 인간다운 사랑의 세계를 끊임없이 부르고 있습니다. 고통받는 인간을 발견할 때마다 모든 개인 각자는 고통 속에서 사랑을 증거하도록 직접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느끼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그 고통 앞에 멈춰 서서그 부르심에 응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통을 자신의 몸으로 채우는 삶입니다.

 

천주교의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에게 내려주시는 하느님의 은총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하느님의 복을 빌어주고 더 나아가 이웃의 잘못과 죄로 인한 폐해를 대신 겪고 그 아픔과 고통을 끌어안고 함께하는 것입니다.

 

오늘 까닭 없이 당하는 고통과 내 죄와 직접적인 관련 없이 겪어야 하는 사회의 죄악 속에서 우리의 고통을 주님의 수고 수난에 합치고, 이웃의 고통에 관심을 두고 함께 걱정하고 함께 아파하며 함께 배려하며 서로 도우면서, 우리의 몸으로 주님과 함께 희생제사를 지낼 때 우리는 구원의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며,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 고통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고 계신지 곰곰이 찾아내고, 그 뜻을 우리 삶 속에서 하나씩 실현해 나갑시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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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수난 성지주일 꽃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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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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