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곡성당 자유게시판

“난곡서 날 버린 엄마, 만났습니다”

인쇄

이효숙 [lee9755011] 쪽지 캡슐

2008-08-02 ㅣ No.9345

“난곡서 날 버린 엄마, 만났습니다”

내 추억속의 난곡 2008/08/01 16:15 이랑

[취재
· 글 김지원, 김동환 / 기획 오연호]

달동네 난곡이 부활하고 있다. 2003년 철거 완료된 ‘달동네 난곡’이 인터넷 공간에서 서서히 다시 만들어지고 있다. 난곡에서 태어나고 자란 정근암(29)씨는 요즘 거의 매일 ‘온라인 우리동네 난곡’을 방문한다.

'아 난곡, 엄마는 나를 버리고 집을 나갔지만'을 올린 정근암씨.


정씨는 29일 <아 난곡, 엄마는 나를 버리고 집을 나갔지만>이라는 글을 ‘온라인 우리동네 난곡’에 올렸다. <44장으로 본 4년간의 난곡 성형수술>을 읽은 후였다. 그는 “우리 엄마도, 내 친구 현일이의 엄마도 집을 나갔다”고 난곡에서의 어린 시절의 아픔을 적었다. 그 글은 20여만명의 네티즌이 읽었고, 난곡에 대한 추억을 갖고 있는 이들을 이 사이버 동네로 불러모았다.



'난곡 어머니'와의 이별, 그리고 재회: 정근암씨, 김현일씨 인터뷰를 거칠게, 편집없이 60분 통째로 올립니다. 처음 3분은 인터뷰 직전 찍은 난곡 종점 버스정류장 풍경입니다. 인터뷰/오마이뉴스 김지원-김동환-오연호, 촬영/오연호.


그로부터 이틀 후인 31일 밤, <오마이뉴스>의 ‘우리동네 난곡’ 취재팀이 정씨를 만났다. 아파트촌으로 변한 난곡의 한 호프집에서였다. 그는 그의 글에 등장했던 김현일(29)씨와 함께 나왔다.

“인터넷에서 예기치 않게 난곡이라는 단어를 본 순간, 가슴이 뛰고 뭔가가 울컥 올라오는 느낌이었습니다. 댓글을 적기 시작하는데 홀린 듯 적어 나갔어요.”


정씨에게 난곡에서의 어린 시절은 ‘설움’의 시간이기도 했다. 정씨는 난향초등학교, 남강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도시락을 싸 간 기억이 거의 없다”고 했다. “엄마가 집을 나가 도시락을 챙겨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소풍가는 날이 가장 괴로운 날이었어요. 그 날을 내가 가장 싫어했어요. 친구들은 김밥을 가져 오는데 나는 김밥을 싸 주거나 맛있는 것을 싸 줄 엄마가 없었기 때문에 맨손이었죠.”


정씨의 친구 김현일씨에게 난곡은 ‘밥 짓는 냄새’와 ‘도마 소리’로 기억된다. 김씨는 “집이 길 하나 사이에 다닥다닥 붙어 있어 도마 소리까지 다 들렸다”며 “아침이면 옆집 도마 두드리는 소리에 잠이 깨곤 했다”고 난곡에 살 당시를 회상했다. 그런데 정작 자기 집에서는 도마소리가 안났다고.

“우리 집에서도 엄마가 있어 저런 도마 두드리는 소리가 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죠.”

"엄마를 만났습니다만..." 난곡 그 후를 이야기하는 김현일씨.


김씨는 자기가 4살 때. 엄마가 집을 나가던 날을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엄마는 아마 자고 있는 줄 알았을 거예요. 누워 있는데 누가 내 머리 위를 쑥 건너서 지나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요. 엄마가 집을 나가던 길이었죠.”

엄마없는 아이의 학교 생활은 어땠을까. 정씨와 김씨는 모두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며 웃는다. 김씨는 “옆에서 잘 한다고 챙겨줄 사람이 없어 특별히 공부를 할 필요를 못 느꼈다”고 했다. 정씨 역시 마찬가지. “흥미도 별로 없었지만 과외를 하거나 학원을 다닌 적도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그래서 공부를 못했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그건 핑계”라고 단호히 말한다. 대신 자신의 책임으로 돌렸다.

“그런데 우리 같은 환경에서도 공부 잘 하는 애들 있었어요. 엄마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그냥 그건 핑계죠.” 김씨의 말이다.


두 사람은 혹시 어른이 된 뒤, 엄마를 찾았을까. 정씨는 지금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2005년부터다. 초등학교 때 엄마를 처음 만난 후로 정씨는 “3,4년만에 잊을 만 할 때쯤 한 번씩” 엄마를 만났다. 하지만 “날 버리고 떠난 엄마를 이해하기는 힘들었다”고 한다. 청소년기에는 “엄마 얘기 꺼내지 말라”며 가족들에게 화낸 적도 있을 정도. 그러다 2005년 즈음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생기면서 엄마와 편지를 주고 받게 됐고, 같이 살게 됐다.

정씨는 “날 버리고 떠났던 엄마를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엄마의 인생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지금 상태를 설명했다.

김씨는 열 아홉 살 때 엄마를 찾았다. 4살 때 엄마와 헤어진 후 그는 언젠가는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엄마의 주민등록번호를 외우고 있었다. 수소문끝에 엄마가 살고 있는 집을 찾았고,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십니까’라는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나오는데 ‘엄마다’라는 생각이 단박에 들더라고요. 4살 이후에 처음 들어보는 건데, 마치 어린아이들이 본능적으로 젖꼭지를 물듯이 그 목소리를 분간해냈지요. 그래서 ‘아들입니다’ 했죠.”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김씨는 문틈으로 명함만 집어넣고 물러나야 했다. 다음날 그 명함에 적힌 자신의 핸드폰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니였다.

“그 후로 엄마가 연락한 적은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핸드폰 번호를 못 바꿔요. 허허. 하지만 내가 우리 엄마가 잘 살고 있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제 연락 안와도 괜찮아요. 못살고 있으면 내 마음이 아프겠지만....”


아직 채 서른이 되지 않은 ‘달동네 난곡’표 두 젊은이. 그들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설계하고 있을까?.

이미 두 아이의 아빠인 김씨는 직업을 밝히길 꺼려하면서도 “잘 살아야죠. 난곡에서 어려웠던 때를 생각하면 더 잘 할 수 있을 겁니다”라고 했다.

미혼인 정씨는 엄마의 식당일을 돕고 있는데 “앞으로 화목한 가정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아이가 소풍가면 도시락도 싸줄 줄 알고, 학교에 가서 선생님께 인사도 드릴 줄 아는 그런 엄마가 되줄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제가 살아온 과거 보다는 나은, 그런 가정을 꾸리고 싶네요.”

그들은 한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부모 세대처럼은 살지 않겠다”.

"아! 이 집이.. 아! 이 골목이.." 91년 난곡 사진을 보는 두 친구.


두 사람은 난곡 아이의 어제와 오늘을 그렇게 담담하게 2시간동안 들려줬다. 그러나 취재진이 건네준 사진 한 웅큼을 받아들고는 끝내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1991년의 난곡 모습을 담은 60여장의 사진. 소설가 김한수씨가 “언젠가는 소설을 쓰기 위해” 찍은 것들이다.

사진을 한 장 한 장 보던 김씨가 역류하는 세월에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비명을 지른다.
“윽.......”
“..... 이 집에 살 때 울 엄마가 집을 나갔는데....”
정씨도 그 사진들을 보면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정씨는 현재 안산에서, 김씨는 아파트 난곡의 근처에서 살고 있다. 철거와 재개발로 달동네 난곡을 떠나야했던 그들이 아파트촌 난곡의 한 호프집의 야외 식탁에서 그 시절을 담은 사진을 보면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20층짜리 아파트촌 난곡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곡 29년지기인 두 사람. 뒤로는 휴먼시아 아파트가 보인다.




 


194 1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