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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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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석 [drhur] 쪽지 캡슐

2002-10-08 ㅣ No.577

1) 가정생활과 환경

 

안중근은 한말의 풍운이 짙은 고종16년,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읍 광석동에서 진사 안태훈(安泰勳)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순흥안씨로서 고려말 거유(巨儒) 문성공(文星公) 안향(安珦)선생은 안중근의 26대조이며 조부친(祖父親) 안인수(安仁壽)는 진해 현감을 지냈고, 자선가로서 유덕한 인물이었다. 안중근의 아명(兒名)은 응칠(應七)이며, 그의 소년시절은 그가 별유천지(別有天地)라 부른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에서 보냈다. 유복한 가정생활로 7세부터 한학을 공부하였고 사냥과 승마에 뛰어난 재질을 보여 주위 사람들에게 대장이라는 별명을 들었다.

 

1884년 그이 나이 16세에 김홍섭의 딸 아려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어 한 때 단란한 가정을 갖기도 하였으나 그후 조국을 위한 그의 망명생활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그 책임을 다할 수가 없었다. 결혼후 그의 집안 전체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는데, 특히 안중근에게 신앙은 그의 삶에 정신적 기반을 이루었다. 그는 영세신부인 홍석구 신부를 아버지처럼 따랐으며 홍신부와 함께 여러 지방의 전교여행은 초기 황해도 천주교회의 발전에 초석이 되었다.

 

2) 신앙생활

 

1897년 1월 안중근은 홍신부에게 안악군 용문면 구화동 본당에서 가족들과 함께 영세를 받고 다묵(多默)이라는 세례명을 갖게 되었다. 그후 안중근은 그의 신앙심이 깊어지면서 홍신부를 수행하고 복사하며 황해도 일대를 전교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을 때, 그 당시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경문(經文)을 강습도 받고 도리를 토론하기 여러달을 지나, 신덕이 차츰 굳어지고 충실히 믿어 의심치 않고 천주 예수그리스도를 숭배하며, 날이 가고 달이 가서 몇 해를 지났다. 그 때 교회의 사무를 확장하고자 나는 홍교사와 함께 여러 고을을 다니며 사람들을 권면하고 전도하면서 군중들에게 연설했었다."

 

또한 교리의 이론보다 행동에 앞선 그의 진실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준 일화는 1908년 7월 함경북도 신아산 부근에서 안중근 의병부대의 제2차 전투시 일본군 포로 10명을 생포하여 총살하자는 동지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포로를 처형하지 못하게 규정한 만국공법에 따라 포로들을 석방하고 포로들의 애원대로 총을 돌려주는 아량을 베푼일이다. 이것은 당시 정규군인 일본군이 의병에게 식사를 제공한 조선 민간인들까지 즉결 총살하던 작태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신사적인 처사요, 인도주의자로서의 안중근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한측면이라 하겠다. 더나아가 안중근 부대의 제3차 의병전투는 석방된 일본군 포로들이 안중근 부대의 위치를 정확하게 보고하여 일본군의 매복과 기습공격에 걸려서 참패한 전투였다. 그래서 안중근은 패잔병이 된 동지들을 이끌고 완강히 저항했으나 형세가 불리하여 퇴군하게 되었는데 두만강을 건너는 도중에도 많은 동지들이 죽어가고 흩어지니 겨우 목숨을 부지한 안중근 외 3명의 동지는 이 어려움속에서 삶의 의미를 잃게 되었다. 이때 안중근은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교리를 가르치고 대세를 주었다. 안중근의 옥중자서전에 기록된 일화들 이외에도 신앙인으로서의 안중근의 모습을 외국인들은 다음과 같이 증언을 한다.

 

안중근을 재판하였던 일본인 平石 고등법원장은 "기독교를 싫어함에도 안의사의 깊은 신앙심에는 고개를 숙였다."라고 말하였으며, 안중근의 담당변호사 역시 안중근의 인격과 죽음을 맞이하는 초인 같은 자세에 탄복한 나머지 ’구도(求道)할 뜻을 느끼고 즐기던 술도 끊고 신자가 되려고 교회에 다니고 있다." 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해 당대 일본의 지도적 성공회 목사였던 植村正久는 ’안의사의 신앙이 얼마나 독실(篤實)했기에 담당변호사에게 큰 감명을 주었나 나는 다시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라고 말한다.

 

안중근은 伊藤博文을 살해하고 성호를 그은 태도와 법정심문 과정에서도 "나는 매일 아침마다 하느님께 기도한다." 라고 밝혔으며 여순(旅順)감옥안에서는 자신의 내적인 신앙성숙의 꽃을 피웠다. 처형되기 전날에도 죽음을 대하기를 마치 자기집이라도 돌아가듯이 마음을 평안하게 가졌다. 또한 안중근은 여순감옥에서 사형집행을 앞두고 그의 어머니 조안나와 두 동생들 정근(定根), 공근(恭根)과 홍신부에게도 신앙체적인 편지를 띄워 이 세상의 고별인사를 잊지 않았다. 특별히 자기를 단죄한 민(閔)주교에게 죄인인 자신을 불쌍히 여기고 주대전에 기도하여 속히 승천의 은혜를 얻게 해달라는 간절한 내용과 천주 예수님의 특은을 입어 고백 영성체의 비적(秘蹟)등 모든 성사를 받은 결과 심신이 다 평안하다는 소식과 주교와 모든 신부들이 힘을 합쳐 우리나라를 그리스도화 해주실 것을 진심으로 부탁하는 내용으로 유서와 다름 없는 편지를 보냈다. 이러한 안중근의 그 깊은 신앙심에 대한 놀라움은 과거에도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과 존경심을 자아내게 한다.

 

 

3) 교육생활

 

나라의 장래를 위해 교육열에 불타오르게 된 계기는 두 번 있었는데 그 첫 번째는 그의 불어선생이기도 하였던 홍신부와 함께 상경하여 민주교(閔主敎)한테 한국교회와 나라의 장래를 위해 대학을 설립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가 일언지하에 거절 당함은 안중근으로 하여금 민족적 자존심을 상하게 하여 고향에 돌아와 불어수업을 중단하고 "천주교는 믿을지언정 외국인의 심정은 믿을 것이 못된다. 외국어를 배우면 외국인의 종놈이 된다." 라고 말함은 그 당시 그의 심정을 잘 표현한 것이다.

 

두 번째 계기는 성공적이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느낀 안중근 부자(父子)는 중국으로 이민하기 위해 그가 먼저 중국에 가서 왕복하다가 상해 성당내에서 기도하던중 구면인 곽신부를 만난 일이다. 곽신부는 안중근과 대화속에서 고국을 버리고 이민함은 틀린 생각이라고 지적을 해주고 고국에 가서 네가지 할 일을 정해 주었는데 그 첫째가 교육의 발달이요, 둘째는 사회의 확장이요, 셋째는 민심의 단합이요, 넷째는 실력의 양성이라 하여 이 네가지가 곧 강대국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이에 안중근은 곽신부의 말에 공감을 하고 힘을 얻어 진남포에 돌아와 1906년 삼흥(三興)학교 및 곽의(郭義)학교를 설립하고 그 교무(敎務)를 맡아 후진양성에 전념하여 앞으로의 구국의 길을 열어보려 하였다. 특히 곽의학교는 평안도에서 손꼽히는 명문학교로 부상하였고 안중근은 그 학교의 2대 교장을 역임하여 한 때 교육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던 시기를 갖기도 하였다.

 

 

4) 의병(義兵)생활

 

안중근은 법정 재판 심문과정에서 자신의 직업을 의병이라고도 밝히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로하여금 독립운동에 가담할 것을 처음으로 권유 한 자는 부친의 친구인 김진사이고 정신적인 영향을 준 자는 안창호 선생이었다. 그래서 그는 1907년 3월 독립운동의 자금조달을 위해 가산을 정리하여 탄광사업을 시작하였으나 일본인의 방해로 큰 손해를 보고 실패하고 말았다.

 

그해 그의 나이 29세 되던 해 伊藤博文에 의하여 정미7조약이라는 한일 신조약이 체결되고 광무황제가 강제로 양위되면서 조선군대가 해산을 당했다는 비보는 그로 하여금 가정과 고국을 떠나 망명의 도정에 오르는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는 러시아 영토 海蔘威에서 청년회에 가담하여 임시사찰로 선임되어 활동하던 엄인섭(嚴仁燮), 김기룡(金起龍)과 의형제를 맺고 각처를 돌아다니며 교포들에게 애국사상을 고취시키는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그때 그의 연설은 많은 교포 젊은이들을 감동케하여 삼백여명들이 각지에서 종군을 지원하였다.

 

1908년 30세가 된 그는 성숙한 사상적 체계를 세우고 그 체계를 밑바탕으로 하여 행동하는 인간으로서 전진하는 정력과 투지를 지니게 되었다. 그런후 이범윤(李範允)과 김두성(金斗星)을 필두로 한 의병에 정식으로 가입하여 대한의군 참모중장겸 특파독립대장 및 아령(俄領)지구 군사령의 중요한 군사적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해 6월 안중근을 선두지휘로 독립군 300명을 인솔하여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로 진입하여 회령, 길천 등지로 전진하며 경흥의 일본경찰대를 격파하였으며, 많은 적군을 사살하고 큰 전과를 거두었다. 세차례에 걸친 이 격전을 치루면서 다시 회령까지 진입하였는데 5000명이라는 일본군 수비대를 상대로 시산혈하(屍山血河)를 이루는 사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군사학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게릴라전이었다.

 

1909년 봄에 연추(烟秋)에서 결사동지 10여명과 함께 모여 각각 왼편손 약지를 끊어 태극기에 대한독립 넉자를 혈서하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약하였다. 그 후에 안중근은 海蔘威에서 발행하는 교포신문 ’대동공보’의 기자로 일하면서 여러곳에 흩어져있는 지사들을 만나 구국대책을 의논하고 한편으로는 교육관계에 힘쓰면서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던중에 그해 9월 伊藤博文이 러시아 정부 재무대신 Kokotseff 와 만나 동양정책을 협의하고자 북만주를 시찰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때 안중근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동양의 평화를 위해 伊藤博文을 살해할 결심을 하고 뜻을 같이할 동지 우덕순과 함께 계획을 세우고 공격지점을 둘로 나누었다. 제2공격지점을 맡은 안중근은 10월 26일 유동하를 데리고 하을빈역에서 신문기자를 가장하여 역두에 나갔다. 각국 대표의 환영과 군대의 호위속에 그리고 삼엄한 경비속에 하차한 伊藤博文을 안중근은 단신으로 달려들어서 사살하고 총을 던진후 대한만세를 세 번 부른다음 러시아 헌병들에게 포박되었다가 곧 다시 일본 관헌으로 넘어가면서 그의 행동적 의병활동은 일단 마무리진다.

 

 

5) 수감(收監)생활

 

안중근은 伊藤博文 살해 8일후 일본 旅順감옥으로 이송되었을 때 처음에는 일본 관리들이 위세를 보이면서 그를 중죄인으로 다루었지만 그는 조금도 기세를 굽히지 않고 일본측의 부당성을 통론(通論)하여 시정하게 하였으며 공판정에서도 본인은 의병참모중장으로서 독립전쟁을 했고, 의병참모중장으로서 伊藤博文을 죽였으니 이는 법정에서 형사 피고인의 하나로 다루는 것은 만부당한 처사이므로 마땅히 만국공법에 의해서 처리하도록 요구하였다. 그후 안중근은 旅順감옥에서 일본관리들에게 후한대접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안중근은 1910년 1월 3일에 사형언도를 받게 되었다. 이것은 안중근이 말한 그대로 하등(下等)판결에서 사형언도를 받은것이므로 많은 갈등을 느끼면서 자신의 심정을 밝히며 박장대소하기를 ’나는 어질고 약한 한국인민이 된 죄’라고 말하였다. 그는 감옥에서 기도생활로 일관했으며 천주교 신부를 청해다가 성사 받을 일들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순국직전에는 그의 영세신부인 홍신부를 청하여 고백(告白)종부(終傅)성사(聖事)를 받는등 끝까지 신앙인으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여기서 안중근이 홍신부에게 고백성사를 볼 때 伊藤博文살해한 일을 스스로 살인죄로 고백하였는지 알수가 없어서 아쉬운 일이지만 모든 성사를 받은후 그 기쁨을 그 자서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천주교 홍신부가 나의 영생(永生)영락(永樂)하는 성사를 해주기위해서 한국으로부터 이곳에 와서 나와 서로 면회하니 꿈과같고 취한것같아 기쁨을 이룰길 없다.(중략) 그때 홍신부가 나에게 성교(聖敎)의 도리를 가지고 훈계한 뒤에 이튿날 아침 감옥에 와서 미사 성제(聖祭)대례(大?)를 거행하고 성체성사로 천주의 특은을 받으니 감사하길 이를길 없은데 이때 감옥서에 있는 일반 관리들이 모두 와서 참례했었다.’라고 이렇게 모든 성사를 홍신부로부터 받고 가족들에게 천국에서 다시 만날것과 장남 ’분도’를 성직자로 키워줄 것을 당부하는 서신을 남긴 뒤 1910년 3월 26일 旅順에서 성화를 몸에 지닌채 32세의 나이로 총살되어 사망하였다. 안중근의 유필(遺筆)로는 옥중에서 쓴 자서전과 사형직전에 쓴 유시(遺詩) 그리고 그당시 역사적 현실을 정확히 분석하여 동양평화의 비결은 침략정치를 하지 않는데 있음을 간파하는 동양평화론이 대표적이다. 기록에 의하면 옥중에서 큰 붓으로쓴 글만해도 약 200폭이나 되었다 하는데 그것은 주로 법원직원, 취조관, 감옥형리들의 청에 의하여 쓴 것들이다. 안중근이 비록 저들의 원로정치가를 죽인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의 두터운 신앙심, 탁월한 정치사상, 고매한 인격이 그들로 하여금 존경심을 자아내게 하였기에 그들에 의해 오늘날 우리에게 여러 옥중(獄中)유필(遺筆)들이 전해지게 되었음을 평가한다. _ 위의 글은 정재돈 신부님의 논문의 일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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