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대림 제4주일(가해) 마태 1,18-24; ’22/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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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2-12-04 ㅣ No.5238

대림 제4주일(가해) 마태 1,18-24; ’22/12/18

 

 

언젠가 한 번 어떤 분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복음 나누기 7단계는 이미 오래전에 실패한 것으로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틀린 말도 아니고 맞는 말도 아닙니다. 그런데 무엇이 실패이고 무엇이 성공이냐를 판가를 하는 기준도 기준이겠거니와 과연 그리스도교 전체 역사 안에서 성공한 선교정책, 성공한 사목정책, 성공한 영성운동이 있었는가?’ 자문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어느 것도 성공한 것이, 아니면 실패한 것이라고 할 것이 있었습니까? 우리는 한계지어진 세상에서 한계를 가지고 사는 인간에게는 성공과 실패라는 판단을 내리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 더군다나 복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 자체가 성공이라 말할만한 것이 없고 실패의 쓰라린 체험의 연속만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려운 길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뼈저리게 느낍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갈 뿐입니다. 주님의 은총에 의지하고 기대하면서! 우리를 구하시러 세상에 오셔서 몸소 생명을 바쳐 우리를 구하시고, 부활하셔서 새 생명을 얻으시고, 우리를 구하러 다시 오시리라고 믿고 기다리고 있는, 우리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일 이외에 다른 더 좋은 길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이 구세주가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왜 기다렸습니까? 현실 세계에서는 우리가 꿈꾸는 이상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상은 고사하고서라도,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는 이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기가 힘들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돈이 많이 생기면,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어느 정도의 외적인 편안함과 풍요로움은 가져올 수는 있지만, 인간의 근원적인 만족과 기쁨과 평화를 누리기에는 여전히 허전하고 미약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더 배우면, 무엇인가를 더 채우면 조금 더 행복하고 조금 더 평안하게 살 것이라고 여기고 추구하지만, 결국 거기서도 만족스러운 해답을 얻지를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요셉 성인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남에게 알리기가 뭐해서 그런지, 아마도 커다란 실망감과 상실감으로 마리아와 남모르게 파혼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날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요셉에게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0-21) 요셉은 천사가 꿈에 나타나 알려줄 때까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비록 예언서에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이사 7,14; 마태 1,23) 라고 기록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자신과 결혼할 여인 마리아에게서 그러한 예언이 이루어지리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애초에 처녀가 아이를 가진다는 것이, 그냥 성경에 쓰여있는 전설 같은 이야기에 불과하고, 현실에서는 전혀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어려운 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불가능하게까지 보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소수의 성인만이 할 수 있는 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에 비추어 형제들과 나누며 함께 따르는 길이 실패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마치 좁은 문처럼 복음의 길을 가는 이가 적을 뿐이 아니겠습니까? 애초에 예수님의 생애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의 생애를 가리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들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1코린 1,21.23-24)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빵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은 이들이 계속 쫓아다니자, 그들에게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요한 6,27)라고 이르십니다. 그러자 군중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28)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29) 라고 답하십니다. 군중들이 예수님께서 영원히 죽지 않을 생명의 빵”(48)이 바로 나라고 하시며,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54) 라고 이르시자,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떠나 버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67)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68) 라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에 이어, 우리의 신앙생활의 본질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복음 말씀을 새기고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섬기고자 하는 우리 믿는 이들 가운데 오시기 때문에, 우리는 홀로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닫기도 어렵고, 홀로 그 말씀을 온전히 이루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역반과 단체와 모임 등의 소공동체로 함께 모여, 복음의 말씀을 통해,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분의 뜻을 깨달아, 형제들과 자신의 깨달음이 참인지 아닌지 나누면서 식별하고, 함께 실현함으로써 주님의 나라를 이루고자 합니다. 그렇게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우리의 수준에서 이룰 수 있는 말씀을 하나씩 이루어나가면서, 이루어나가는 만큼 말씀의 뜻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고, 현실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말씀을 통해 참 기쁨을 얻고 행복하게 됩니다.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해 보이고, 힘겨워만 보이는 복음의 길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차근차근 밟아 나가면서, 머리로 이해할 수 없고 실제로 이루어지리라고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말씀이 사람이 되어오시듯 이루어질 때, 우리는 임마누엘”(마태 1,23)이신 우리와 함께 계시”(23)는 주님과 함께하는 삶의 진정한 기쁨을 얻어 누립니다. 우리는 우리 생애의 근원적인 갈증을 채워주고, 변하거나 빼앗기지 않으며 사그라지지도 않는 영원한 기쁨과 평화를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 이외의 다른 곳에서 얻을 수 없음을 우리의 머리가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압니다. 지금까지의 신앙생활을 통해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고 이끌어 주신 신앙의 신비를 잘 알기에 우리의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주 예수님 안에서 그 온전한 평화와 기쁨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닫고 믿었기 때문에, 여기 오늘 이렇게 주 대전에 모여왔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기 위하여!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태 1,23)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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