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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Re:나는 하느님께 무엇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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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몬 [211.217.58.*]

2004-07-07 ㅣ No.2811

질문을 올려주신 주제에 대하여 우리 성당에서 레지오가 관장하는 빠뜨리치안회의 토론회에서 저가 주제 발표했던 내용이 있어서 질문에 대하여 참고가 될까하여 그대로 올려드리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주제 발표:  "하느님은 나에게 무엇인가?"

사람들은 누구나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라는 등의 철학적 명제에 대하여 한번쯤은 생각해 볼 것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라고 하면서 인간은 끊임없이 사색하는 철학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 했으며, 부처는 "인생은 고해다." 라고 하면서 모든 욕심을 버리면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어쩌튼 우리네 인생은 참으로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복잡한 그 무엇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의 말씀대로 착하게 살면 예수님처럼 부활하여 천국에 이를 수 있다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고 결국은 하느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냈으며 세상의 삶을 다 하게 되면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이 교회가 가르치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태초에 하느님은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섬기며 행복하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죄를 범함으로써 불행을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불행한 처지에 놓인 인간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뻗으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하와로부터 죄가 왔으나 성모님을 통하여 구세가 오셨으므로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으로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원죄와 더불어 세상에서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고, 영적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우리들에게 하느님이 베푸시는 사랑은 참으로 지극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창조자로서의 성부 하느님이시고, 구원자로서의 성자 하느님이며, 협조자, 성화자로서의 성령의 하느님, 즉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시라고 배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는 모세의 물음에「나는 곧 나다」라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일러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신 하느님이 이 땅에 알려지기까지는 1784년에 이승훈 베드로가 북경에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기까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후로 따진다면 1800년 가까이 걸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나에게 생명을 주신 그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인생을 꾸려 나갈 때 그 참다운 의미가 살아나고, 따라서 인생의 문제를 놓고 정확한 가치를 말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하느님을 찾도록 되어 있는 것이며, 본래 하느님께서 나를 만드셨으니, 미사 때마다 영성체를 하는 우리들 안에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함께 하고 계십니다.

어떤 외과 의사는 환자를 수술하면서 인체의 신비에 대하여 감탄하면서 하느님을 알게 되었고, 또 어떤 천문학자는 하늘의 별을 관측하다가 우주의 신비를 통하여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발견하고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렇듯이 하느님께서 창조해 내신 이 우주와 인간은 물론이요, 이 세상 만물들이 참으로 신비스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본적이 있습니다. 달 나라까지 갔다 온 인간이지만, 과학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 비밀과 질서를 알아 가는 과정이 아닐까 하고....글쎄요, 과학은 하느님의 비밀을 얼마나 알아 냈을까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삶에 대한 미련과 애착을 끊을 수 없는 것이라면, 반드시 그 삶의 그림자와 함께 따르게 되는 고통에는 필경 무슨 뜻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제도 오늘도 자신의 마음을 번민하게 하는 수수께끼들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노력합니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죄란 무엇인가? 고통의 원인과 목적은 무엇인가? 진실한 행복으로 가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죽음은 무엇이며, 죽음 후의 심판은 어떤 것인가?

이렇게 끊임없는 질문 속에 살아가는 인간은 알고 싶고 해결해야 할 의문들이 많습니다. 결국 인간은 이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줄 절대자를 찾게 되었으며 내가 오늘 여기에 있게 된 원인과  의미를 가르쳐 주고, 불안과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영원한 행복으로 이끌어 줄 절대적 존재를 찾다 보니, 그것이 결국에는 ''하느님''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절대자인 하느님을 통해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려고 노력하며, 그것이 우리가 믿는 하느님입니다. 내가 원해서 얻어진 인생도 아니요, 나의 어떤 노력의 대가로 이루어지지도 않았으며, 나의 자유의 동의로 이루어진 인생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온전히 하느님으로부터 탄생한 인생이라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참다운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거울 앞에 서면 내 겉모습이 보이고, 의사 앞에 서면 그 의사를 통해서 내 육신의 건강 상태를 파악 할 수 있듯이, 우리는 예수님 앞에 서면 내 영혼이 얼마나 건강한지를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하느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현재의 육신은 땅에 묻혀서 흙이 되겠지만, 영혼은 새로운 육신과 결합하여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을 사도신경을 통하여 고백합니다.

이러한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의 교회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는 ''믿음의 공동체''이며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의 공동체''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모시고 화합과 일치를 이루는 ''친교의 공동체'', 모든 것들을 서로 돕고 나누는 ''나눔의 공동체''이며, 하느님 사랑을 본받아 섬기는 ''섬김의 공동체''라고 하기도 합니다. 또한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일치된 ''하나의 공동체''이고, 성사로써 구원과 생명의 은총을 새롭게 받는 ''성화의 공동체'', 지역과 민족, 남녀노소, 빈부격차 모두를 다 받아들이는 보편된 공동체가 가톨릭 교회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들보다 한참 앞서서 하느님을 믿으며 하느님을 연구했던 몇몇 성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르게 생각할 때 우리는 하느님께 거한다.'' ''바르게 살 때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 ''하느님은 부르는 소리보다 흐느낌을 먼저 들으신다.'' ''사람은 하느님 곁에서 멀리 떠났을 때 불안해진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자기 앞에 주어진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가면서도 쉽게 풀리지 않는 근본적인 의문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왜 사는가? 잘살아 보겠다고 몸부림치는 데도 고통과 불안과 불만은 끊이지 않고, 한 가지 어려움을 간신히 이겨내면, 어찌하여 또 다른 고통이 닥쳐오는 걸까? 행복한 시간은 길지도 않고, 어느새 고통과 불안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일상을 살면서 근심 걱정에 사로잡히기만 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으며, 하느님을 위해 봉사 할 수가 있겠습니까? 끝없이 도전하며 하루하루 그분을 믿으면서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해결 안 되는 문제는 주님께 맡겨드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능력만큼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운명 앞에서는 엄숙하게 순종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어여삐 여기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하느님 신앙 안에서, 하느님은 나에게 무엇이며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사이에서 자신의 삶의 현실은 어떠하며, 내가 경험했던 하느님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생각해 보면서, 나의 주인이신 하느님은 과연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해 보는 가운데, 오늘의 주제인 하느님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각자의 의견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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