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1주간 토요일 ’21/01/15 미사의 영성 2 성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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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2-01-08 ㅣ No.4901

연중 제1주간 토요일 ’21/01/15

미사와 성시간 - 미사의 영성 2 성호경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7-16)

4 7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1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3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나눔

우리는 미사를 시작하면서 성호를 긋습니다. 사제의 입당과 아울러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성호를 긋습니다. 이렇게 성호를 긋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사랑이신 하느님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공간과 시간 안으로 들어간다고나 할까요?

 

성호를 그으면 마치 미사가 시작되었다는 신호를 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신자들이 숙연해지고 집중하게 되는데, 한편 이 때 하늘이 열리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신자들이 미사 전에 웅성거리는 것이 마치 하늘에서 하느님 삼위께서 우리 중에 누가 내려가서 저들과 함께할까 의논하시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하늘의 문을 여시고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주님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면서 우리를 하늘나라로 불러들이시는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성호를 그을 때 마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사랑을 약속하시고, 우리가 사랑의 사도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신비에 관한 말씀을 요한의 편지 47절에서 16절까지 나오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기사에서 발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1요한 4,7)

 

성호경에 나오는 것과 같이 하느님은 사랑으로 결합된 삼위 일체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9) 아버지 하느님은 지상으로 당신의 아들을 내려 보내십니다. 그리고 그 외아들에게 당신의 모든 권한을 다 주십니다. 아들은 그 권한을 다 받고도 자랑하거나 뻐기거나 남용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남김없이 주시는 데 다 써버리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결실로 얻은 영광은 아버지께로 또 다 돌리십니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항상 바라보고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 줌으로써 일치하게 되고 또 일치의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피어납니다. 이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아버지와 아들을 계속 한 마음 한 몸으로 만드십니다. 이렇게 성령의 인도로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하지 않고 아버지가 원하시는 바로 그대로 다 이루십니다.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제물이 됨으로써, 사람들의 죗값을 갚으시는 것까지인데도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마다하지 않고 따르시고 다 이루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9.10)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성호경을 바칠 때마다, 성호를 그으며 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우리가 받은 그 사랑으로, 아니 그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며 하느님 그 사랑에 참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1-12)

 

이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나신 성령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13) 성령은 우리에게 주님을 알려주시고 주님을 보내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깨닫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느끼는 것 같은 기분과 깨달음, 그리고 주님을 보지 못했으면서도 생각하고 말하고 믿는 것은 바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상을 불러일으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14-15)

 

우리가 더 이상 만이 아니고 너를 위한 나일 때 기쁘고 우리 존재와 삶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사랑으로 자신을 몽땅 다 내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았고, 또 그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6)

 

또 한편으로 우리는 사도 바울로와 초대교회의 교부들이 모든 서간에서 그랬던 것처럼, 언제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우리의 사랑을 전달받아야 할 분들께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평화와 친교의 일치가 이루어지기를 청합니다.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로서 하느님께 사랑받는 로마의 모든 신자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로마 1,7)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우리는 우리 눈에 띄는, 아니 우리로 하여금 발견하고 책임지도록 맡겨주신 주님의 형제자매들을 기억합니다. 마치 화살기도를 바치듯이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이들을 주님 안에서 기억하고 또 주님의 뜻대로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하여 주님께 나와 그 형제자매를 봉헌하고 주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가, 사랑하는 아들 티모테오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자비와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2티모 1,1-2)

 

그래서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청하고 주님과 함께 활동하며 살아갑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4)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

 

 

성찰

지금 이 자리에서 성호를 그으며 주님을 느껴 봅시다.

요즈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람은 누구입니까?

미사를 드리며 주님께 봉헌하고 또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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