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곡성당 자유게시판

아름다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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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문 [frjhan] 쪽지 캡슐

2004-10-20 ㅣ No.2932



가슴에 굵은 못을 박고 사는 사람들이 생애가 저물어가도록
그 못을 차마 뽑아버리지 못하는 것은
자기 생의 가장 뜨거운 부분을 거기 걸어놓았기 때문이다.

못/ 윤효



어떤 일이 있어도 첫사랑을 잃지 않으리라
지금보다 더 많은 별자리의 이름을 외우리라
성경책을 끝까지 읽어보리라
가보지 않은 길을 골라 그 길의 끝까지 가보리라
시골의 작은 성당으로 이어지는 길과
폐가와 잡초가 한데 엉겨 있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걸어가리라
깨끗한 여름 아침 햇빛 속에 벌거벗고 서 있어 보리라

-장석주의 시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중에서



나 아닌 것들을 위해
마음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은
아무리 험한 날이 닥쳐오더라도
스스로 험해지지 않는다
갈라지면서도
도끼 날을 향기롭게 하는
전단향나무처럼

-인도 잠언시 <수바시따> 중에서



당신을 위해 나는
죽는 연습을 합니다. 썩는 연습, 썩어서 버려지는 연습을
그래도 끝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당신을 위해 다시한 번
검은 눈, 검은 길, 하얀 처녀, 하얀 강
당신을 위한 그 모든 것들이 되어봅니다.
그래도, 그래도 끝이 나지 않습니다

-박상순 시집 `love Adagio`에서



가장 먼 거리에서 아름다운 이가 있다
텅 빈 공간에서도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우리가 사는 날까지 소리쳐도
대답 없지만
눈 감으면 다가서는 사람 있다

별/ 김완하



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원고지처럼 하늘이 한 칸씩
비어 가고 있습니다
그 빈 곳에 맑은 영혼의 잉크물로
편지를 써서
당신에게 보냅니다
아무런 말 못하고 돌려보낸 어제
다시 이르려 해도
그르칠까 차마 또 말 못한 오늘
가슴에 고인 말을
이 깊은 시간
한 칸씩 비어 가는 하늘 백지에 적어
당신에게 전해 달라
나무에게 줍니다

-가을 편지 / 이 성선 -



구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산길을 걸으며
내 앞에 가시는 당신을 보았습니다.

들의 꽃 피고 나비가 날아가는 사이에서
당신 옷깃의 향기를 맡았습니다.

당신 목소리는 거기 계셨습니다.

산안개가 나무를 밟고 계곡을 밟고 나를 밟아
가이없는 그 발길로 내 가슴을 스칠 때
당신의 시는 이끼처럼
내 눈동자를 닦았습니다.

오래된 기와지붕에 닿은 하늘빛처럼
우물 속에 깃들인 깊은 소리처럼
저녁 들을 밟고 내려오는 산그림자의 무량한 몸빛
당신 앞에 나의 시간은 신비였습니다.

돌담 샘물에 떨어진 배꽃의 얼굴을 보셨습니까?
새벽 산에서 옷을 벗는 새벽빛을 보셨습니까?
당신은 나의 길을 이렇게 오십니다.

-당신이 나를 스칠 때/ 이성선 -



들국화 / 곽재구


사랑의 날들이
올 듯 말 듯
기다려온 꿈들이
필 듯 말 듯
그래도 가슴속에 남은
당신의 말 한마디
하루종일 울다가
무릎걸음으로 걸어간
절벽 끝에서
당신은 하얗게 웃고
오래 된 인간의 추억 하나가
한 팔로 그 절벽에
끝끝내 매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간을 느리게 끌고 가는 힘이
달팽이에게는 있다

달팽이는 짧은 사랑도
길게 늘려 놓는다

신광철의 <달팽이의 사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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