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당5동성당 게시판
곤경에 처한 나를 위하여. |
---|
십자가 사건은 하느님의 인간곤경에 대한 동참의 카테고리를 나타내 준다. 인간의 그 어떤 곤경에도 하느님은 함께 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침묵으로이다.
사실 사랑하는 자의 곤경에 동참할 때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나도 고통 당하고 있구나!"식으로 그렇게 요란스레 떠들지 않는다. 거기에 말은 필요 없다. 오직 그의 곁에 함께 있어 꼬옥 껴안아 주며 감정이입으로 모든 걸 같이 느끼고, 차라린 당사자보다 더 아파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그럴 때 그 침묵이란 곤경에 대한 너무 깊은 동정에서 비롯된 것이건만 인간은 그것을 잘 모른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조차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십자가상에서의 죽으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지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침묵에 피땀을 흘리실 만큼의 고통을 겪으셨다.
그토록 하느님께서 거기에 온전히 함께 하시는 까닭은 그 곤경을 그분의 능력 안에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하여, 그분의 능력으로 그 곤경을 근본적으로 변형시켜 구원의 차원으로까지 올려놓으려는데 있다. 언제나 그러하다. 애굽에서의 히브리 노예들에 대한 해방이 궁극엔 구원의 차원에까지 가고, 자캐오 사건이 그러하고, 또한 인류가 자신의 잘못으로 종말론적 고통의 상황에 빠졌을 때 하느님은 오히려 그걸 기회로 삼아 ’새 하늘 새 땅의 그날’을 낳으려 하신다.
그런 까닭에 하느님의 구원은 은총인 것이다.
그것이 부활 사건이다. 십자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온전히 고통받으며 죽으신 하느님은, 그분이 지니신 불멸의 생명력으로 이미 곤경 속에서 하나가 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부활시키신다. 진정 부활은 하느님의 곤경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삶에 대한 완전한 점거 성취였다. 즉 하느님의 자기 부활이요 자기 현시인 것이다.
참으로 십자가의 죽음 그 시점부터 그분의 능력은 숨겨짐을 던져 버리고 완전히 드러나며 그분께 죽어 맡겨져버린 그 곤경의 삶에 주관자로 나서시어 뜻의 온전한 이룸을 향해 매진하신다.
그처럼 우리도 곤경을 통해서, 그 상황 속에서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나는 그분의 ’것’이 되고 우리의 곤경에서도 부활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야말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이 드러난다"(요한 9,3)는 것이고, "그분의 뜻이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나의 곤경은 심오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되고, 그러한 부활사건을 통하여 단순히 이 곤경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랐던 나의 바람 그 이상으로 놀라운 것이 내게 이뤄진다.
그렇게 곤경에 처한 나를 통하여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이 선포되고, 그 곤경을 통하여 내 스스로에게서 하느님의 형상(Imago Dei)이 드러날 때 이른바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도 자연 성취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