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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경에 처한 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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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원 [hying728] 쪽지 캡슐

2001-01-11 ㅣ No.1405

 

십자가 사건은

하느님의 인간곤경에 대한

동참의 카테고리를 나타내 준다.

인간의 그 어떤 곤경에도

하느님은 함께 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침묵으로이다.

 

사실 사랑하는 자의 곤경에 동참할 때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나도 고통 당하고 있구나!"식으로

그렇게 요란스레 떠들지 않는다.

거기에 말은 필요 없다.

오직

그의 곁에 함께 있어

꼬옥 껴안아 주며

감정이입으로 모든 걸 같이 느끼고,

차라린 당사자보다 더 아파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그럴 때 그 침묵이란

곤경에 대한 너무 깊은 동정에서 비롯된 것이건만

인간은 그것을 잘 모른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조차

겟세마네 동산에서부터

십자가상에서의 죽으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지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침묵에

피땀을 흘리실 만큼의 고통을 겪으셨다.

 

그토록 하느님께서 거기에 온전히 함께 하시는 까닭은

그 곤경을 그분의 능력 안에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하여,

그분의 능력으로 그 곤경을 근본적으로 변형시켜

구원의 차원으로까지 올려놓으려는데 있다.

언제나 그러하다.

애굽에서의 히브리 노예들에 대한 해방이

궁극엔 구원의 차원에까지 가고,

자캐오 사건이 그러하고,

또한 인류가 자신의 잘못으로

종말론적 고통의 상황에 빠졌을 때

하느님은 오히려 그걸 기회로 삼아

’새 하늘 새 땅의 그날’을 낳으려 하신다.

 

그런 까닭에 하느님의 구원은 은총인 것이다.

 

그것이 부활 사건이다.

십자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온전히 고통받으며 죽으신 하느님은,

그분이 지니신 불멸의 생명력으로

이미 곤경 속에서 하나가 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부활시키신다.

진정 부활은

하느님의

곤경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삶에 대한 완전한 점거 성취였다.

즉 하느님의 자기 부활이요 자기 현시인 것이다.

 

참으로 십자가의 죽음 그 시점부터

그분의 능력은

숨겨짐을 던져 버리고 완전히 드러나며

그분께 죽어 맡겨져버린

그 곤경의 삶에 주관자로 나서시어

뜻의 온전한 이룸을 향해 매진하신다.

 

그처럼 우리도 곤경을 통해서,

그 상황 속에서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나는 그분의 ’것’이 되고

우리의 곤경에서도 부활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야말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이 드러난다"(요한 9,3)는 것이고,

"그분의 뜻이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나의 곤경은

심오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되고,

그러한 부활사건을 통하여

단순히 이 곤경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랐던

나의 바람 그 이상으로

놀라운 것이 내게 이뤄진다.  

 

그렇게 곤경에 처한 나를 통하여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이 선포되고,

그 곤경을 통하여 내 스스로에게서

하느님의 형상(Imago Dei)이 드러날 때

이른바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도 자연 성취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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