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곡성당 자유게시판

사순 제 4 주간 월요일 달봉신부의 조금 긴 복음 묵상

인쇄

류달현 [dalbong6] 쪽지 캡슐

2004-03-23 ㅣ No.2571

지난 월요일의 복음은 루가 복음 4장 43절에서 5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틀 뒤에 예수께서는 그 곳을 떠나 갈릴래아로 가셨다. 예수께서는 친히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 고 말씀하신 일이 있었다. 갈릴레아에 도착하시자 그 곳 사람들은 예수를 환영하였다. 그들은 명절에 예루살렘에 갔다가 거기에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모두 보았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레아의 가나에 다시 가셨다. 거기에 고관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가파르나움에서 앓아 누워 있었다.   

 

그는 예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레아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예수를 찾아 와 자기 아들이 거의 죽게 되었으니 가파르나움으로 내려 가셔서 아들을 고쳐 달라고 사정하였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너희는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는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그 고관은 "선생님, 제 자식이 죽기 전에 같이 좀 가 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예수께서 "집에 돌아 가라. 네 아들은 살 것이다" 하시니 그는 예수의 말씀을 믿고 떠나 갔다. 그가 집으로 돌아 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길에 마중나와 그의 아들이 살아났다고 전해 주었다. 그가 종들에게 자기 아이가 낫게 된 시간을 물어보니 오후 한 시에 열이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그 아버지는 그 때가 바로 예수께서 "네 아들은 살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와 그의 온 집안이 예수를 믿었다. 이것은 예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레아에 돌아 오신 뒤에 보여 주신 두 번째 기적이었다.

 

어제는 사순 제 4 주일이었습니다. 어제 저의 제의 색깔은 분홍색 혹은 장미색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순 제 4 주일을 장미주일이라고도 합니다. 제의 색깔이 보라색에서 분홍색으로 그리고 마침내 흰색으로 엷어져 갑니다. 사순 4 주일에 장밋빛 제의를 입음은 이제 곧 부활이 오니 조금 힘이들더라도  조금만 참고 견디라는 무언의 메시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제의색깔이 엷어지는 것과 반대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깊어집니다. 그 깊어짐과 함께 우리의 묵상도 더 깊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사순절이 시작되면서부터 어제까지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순절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주님의 수난과 죽음의 삶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극기와 희생을 필요로하며 그것의 실천으로 단식과 자선 그리고 기도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줄곧 올바른 의미의 단식과 올바른 의미의 자선 그리고 올바른 의미의 기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의 결정적인 모습으로의 회개를 들려줍니다. 어제 복음에서 우리는 잊을 수 없는 이야기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를 통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자비와 사랑과 용서의 하느님의 모습을 만났고 회개란 하느님께로 발길을 돌리는 결정적인 행위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제 복음으로부터 4주간 내내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하느님 나라는 어떤 모습의 나라인지, 예수님께서 전해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를 분명하게 듣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해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예수님이 전해주는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 하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도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하여 점점 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분명해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자의 모습이 어떠해야하는 지, 믿는 이의 전형을 고관의 모습을 통해 보여줍니다. 우리의 믿음을 보면 두 부류의 믿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너희는 표징과 이적(기적과 신기한 일)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어떤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고 믿는 믿음이고 다른 믿음은 "가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간 고관처럼 말씀을 믿는 믿음입니다.    

 

어쩌면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고 믿는 것이 훨씬 쉬운 믿음인지 모릅니다. 누구나 어떤 이상한 현상이나 기적을 보면 쉽게 믿을 수 있겠지만 죽어 가는 아이를 살려 달라고 청했는데 그 아이에게 어떤 특별한 일도 하지 않고 다만 "가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고 하신 말을 믿고 돌아가는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고 믿는 믿음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어떻게 보면 일회성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 기적이 계속해서 일어나지 않으면 믿음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은 깊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믿는 것이니까 눈에 보는 것 그 이상으로는 넘어가지 못합니다. 내적인 생활이 아니라 외적으로 드러나는 생활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외적으로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나기만을 기대할 것입니다. 전적으로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에 따라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믿음입니다. 깊이가 없고 확신이 없습니다. 어떤 기적이나 신기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곧 흔들릴 수 있는 믿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적을 보고 믿는 믿음이 아니라 말씀을 믿고 생활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 고관처럼 말씀만을 듣고 믿을 수 있는 믿음이 될 수 있을까요?

우선 고관처럼 예수님이 대한 전적인 신뢰심이 있어야 합니다. 고관이 죽어 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안 해 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용하다는 의사를 다 불렀을 것이고 좋다는 약은 다 구해서 먹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점점 더 악화되어 가고 이대로 그냥 놔두면 죽어갈 것 같은 불안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고관의 입장은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을 단지 구경하기 위해서 모인 사람의 자세나 지나가다가 우연히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나 또는 예수님이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자세입니다.

 

한 마디로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아쉬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니 굳이 예수님께 어떤 도움을 청해야할 긴급한 상황에 있거나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요, 구원의 말씀이기  때문에 반드시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고관는 입장이 다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다급한 상황에 있고 어떻게 보면 지푸라기라도 잡아야할 만큼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어 가는 자기 아들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 있었던 차에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다는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귀에 "예수"라는 분의 이름은 얼마나 반가운 이름이었겠습니까? 어쩌면 마지막 희망을 걸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분은 반드시 죽어 가는 자기 아들을 살려주실 수 있는 분이실 지도 모른다는 실낱 같은 희망과 기대를 가졌을 런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고관의 귀에 "예수님이 오셨다."라는 말은 복음이었습니다. 즉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달려간 것은 어떤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께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께 온 것과 고관이 예수님께 오게 된 동기가 처음부터 달랐습니다.

 

즉 다른 사람들은 어떤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았기 때문에 또는 그런 것을 보려고 왔다면 고관은 "예수님이 오셨다."라는 말을 듣고 죽어 가는 자기 아들을 고쳐달라는 간곡한 청을 예수님께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무나 듣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 대한 신뢰심과 말씀에 대한 목마름과 배고픔이 있는 사람만이 말씀을 듣고 먹으려고 노력합니다.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 이 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시편6,22-3)

"주여, 내 영혼이 당신의 말씀을 묵상하고 싶어서 밤새도록 떠 있나이다."라는 시편작가들처럼 말씀에 목마름이 없는 사람들은 말씀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고관이 죽어가는 아들을 살리게 된 커다란 은혜를 받게 된 과정을 보면 점차적으로 이루워지고 있었던 과정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죽어 가는 아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살려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즉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마음의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귀는 항상 누군가를 찾기 위해 눈은 떠 있었고 그의 귀는 열려 있었습니다.

 

둘째, 그는 예수님이 갈릴래아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가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만일 그가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가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그런 은혜를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셋째, 그의 믿음은 어떤 기적을 통해서 믿게 된 믿음이 아니라 그가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할 때 그 말씀대로 이루워진다는 것을 체험하게 한 믿음이었습니다. 결국 이런 것을 체험한 고관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어떤 믿음이었겠습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그대로 이루워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가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집으로 가는 도중에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대로 이루워졌음을 경험한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고관의 믿음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이루신다는 것을 체험한 믿음이요, 말씀으로 양육되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믿음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추상적이고 막연한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넷째, 어떤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먼저 보고 믿는 믿음이 아니라 먼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그대로 실천할 때 말씀대로 이루시는 기적을 보는 것이 순서입니다. 즉 어떤 표징이나 기적을 보고 믿는 믿음이 아니라 먼저 말씀을 듣고 믿고 그대로 실천할 때 그 말씀대로 이루워지는 기적을 보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고관과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된 믿음이란 예수님은 먼저 기적을 이루시고 믿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씀을 하시고 그  말씀대로 이루신다는 것을 경험한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항상 말씀이 바탕이 되고 그 말씀대로 실천할 때 예수님은 말씀대로 이루신다는 것을 믿고 경험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라면 항상 먼저 말씀을 읽고 듣고 실천하는 믿음이 될 것이며 그럴 때 "당신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 나의 길을 비추는 빛이오이다."라는 고백을 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사순시기는 말씀이신 예수님께 전적인 신뢰를 보내는 시기입니다. 기적을 베푸시는 분이시기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기적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 은총의 사순시기 나를 변화시켜다라고 기도해야하겠습니다. 당신을 닮은 사람으로 변화시켜달라고 말입니다.   

 



15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