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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조금 긴 달봉신부의 복음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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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달현 [dalbong6] 쪽지 캡슐

2004-02-29 ㅣ No.2521

금요일날 강론입니다. 그 날 바로 올렸어야 했는 데, 여러가지 바쁜 일이 있어서 이제사 올립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주세용~~~~~

 

그 날 복음은 마태오 9장14절에서 1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단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우리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주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하고 묻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잔치에 온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슬퍼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곧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실할 것이다."

 

요즘 저의 모든 관심은 어떻게 하면 좋은 강론으로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는 신자분들을 만날까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말씀을 자주 묵상할 뿐만 아니라 인터넷이나 자료를 뒤적이며 좋은 글들을 찾곤 합니다. 어제도 강론 준비를 위해 여기저기 뒤지다가 좋은 글을 만나 먼저 나누고자 합니다.

 

제목은 절호의 기회라는 글입니다. 사순절은 해마다 새로운 기분으로 시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살아가면서 무엇인가 잘못 했을 때 수판을 툭툭 털고 다시 놓듯이, 잘못된 것을 훌훌 털고 새롭게 시작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구원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잘못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곧바로 일어나 다시금 하느님을 향해 걷는 것이다. 돌아간다는 것은 특별히 마음을 들어 돌아간다는 것은 목숨을 들어 존재의 근거자이신 하느님께 귀의하는 것이요,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께로 귀명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의 죄악과 거부에도 불구하고 인간 구원을 최종적으로 이루신다.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 죄를 일일이 살피시고, 그 죄들을 차곡차곡 기억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법과 정의의 하느님이시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용서와 자비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우리가 죄의 자리에서 어서 일어나 생명을 얻기를 바라시지 파멸되기를 바라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우리의 착한 마음이 성장하기를 바라시지, 어둠 속에서 헤매기를 바라시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우리 안의 죄악과 어둠을 즉시 제거하려 하기보다는 당신 친히 심어놓으신 선과 생명이 자라도록 기다리신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의 무게 때문에 절망하여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헤멜 이유가 없다. 우리는 그 죄를 그대로 가지고 하느님 앞에, 그분의 거룩한 자비 앞에 갖다 바치기만 하면 된다. 하느님은 인간의 죄를 살피시지 않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죄를 잊으신다. “내가 그들의 잘못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리니......”(예레 31,34)

 

우리의 죄를 살피지 않으시고 기억조차 하지 않으시는 하느님께서는 급기야 우리 죄를 아예 당신 몸에 뒤집어쓰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 뜻에 따라서 우리 죄를 당신 몸에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주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죽으로 오셨다고 하시는 분명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또 우리 입으로 그분을 구세주라 부름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에서 헤어나지 못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느님은 폭군이 아니라 자비로우신 아버지이다. 지치고 피곤한 우리를 안아주고 힘을 주려는 바램만은 갖고 계신 분이시다. 그 분은 “이 못된 놈, 네 죄를 네가 알렸다”하시며 벌을 주려 벼르고 계신 분이 아니시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으로만 화해성사를 보는 것은 올바른 신앙 태도는 아니다. 고해성사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완벽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보는 것이 아니다. 고해성사를 보는 까닭은 우리가 또다시 넘어진다 해도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그 사랑으로 되돌아가겠다는 것이어야 한다. “하느님은 당신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 지 깨닫게 해주기 전까지는 우리가 얼마나 죄스런 존재인지 인식하도록 이끌지 않으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인식이 우리 죄에 대한 인식보다 우선되어야 함을 가르쳐주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정의보다는 사랑을 먼저 알려주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니 회심하는 인간은 자기 죄와 허물에 지나치게 주목하기 보다는 하느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용서에 더 주목하며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똑같이 통회했지만 유다는 자살을 하고, 베드로는 으뜸 제자가 된 까닭은 유다는 자기 죄만을 바라보고 절망하여 스스로를 단죄하였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자비하심에 자신을 의탁하고 희망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며 참으로 음미해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교우 여러분, 사순시기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이 얼마나 커다란 지를 몸소 느끼고 체험하는 시기입니다.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그 분의 사랑에 감동받는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하느님의 사라에 감동 많이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단식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우리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주 단식을 하는 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단식은 예수님 시대에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해야하는 의무사항이었습니다. 단식과 자선이야 말로 야훼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해야하는 당연한 의무사항이었으며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는 표지였습니다. 이것을 하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고 경건한 유대교도임을 자부하는 요한의 제자들이 그런 질문을 한 것은 당연한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왜, 당신의 제자들이 단식을 하지 않는 지 그 이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잔치에 온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슬퍼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곧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 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어제의 복음에서 제자들이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안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하신 주님의 수난 예고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 하듯이 오늘의 말씀도 제자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합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사순시기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주님의 수난이 피부에 와닿지 않고 있는 저희들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아무튼 오늘 복음의 핵심은 제자들이 못 알아 듣는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단식에 대한 가르침에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 중에 많은 이들은 단식을 남에게 보이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습니다. 온갖 거짓과 위선과 악행을 저지르면서 단식한다는 표를 내어 경건한 신앙인 척 하였습니다. 그런 단식을 예수님께서는 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단식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을 사랑하기에, 주님께서 사랑하셨던 이웃들을 특히 어렵고 고통에 잠겨있는 이웃들을 사랑하기에, 애덕을 실천하기 위해 금식하고 금육합니다. 간혹 우리 이웃들 속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이 외적인 형식에 만 매여사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은 그저 밥 한끼 먹지 않는 것으로 금식을 잘 했다고 자랑합니다. 고기를 먹지 않은 것으로 모든 교회 법적 행위를 이행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행위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진정한 의미, 즉 사랑과 애덕실천과 속죄행위로서 의미는 잊고서 외적인 행위만은 추종하는 결과를 빗고 맙니다. 우리가 금육에 대한 우스개 소리로 자주하듯 고기를 먹지 않기 위해 횟집에 가서 회를 먹고 있다면, 분명 금육의 법률은 지켰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고 죄에 대한 보속으로서 의미는 모두 퇴색해버리고 맙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실천도 사라지고 맙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금육하며 절제하는 이유는 이웃사랑을 위한 것입니다. 금육과 단식은 이웃을 향해 애덕과 애긍의 행위로 이어져야 합니다. 가난한 이웃을 향한 애긍의 행위로 이어지지 않는 단식은 참된 단식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살을 빼기 위해 하루 한끼 굶는 다이어트용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신랑을 빼앗긴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을 기억하며 단식을 하듯 우리 신앙인에게도 단식을 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절제를 해서 얻은 것을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그 정신으로, 우리는 우리의 배고픔을 통해서 얻은 것을 이웃과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가 절제한 결과를 이웃에게 거저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순절을 사는 이유일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단식을 합니까?”라고 물을 때,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사랑을 위해서, 사랑하기에”라고 답해야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해 있는 현실의 삶 속에서 하느님은 구체적으로 사랑하길 원하시고 그 실천이 금육과 단식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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