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사순 제2주간 목요일 ’22/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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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2-03-09 ㅣ No.4962

사순 제2주간 목요일 ’22/03/17

 

코로나 19 감염상황이 만만치 않습니다. ‘오늘 우리 아이들이 학교 가고 출근하는데, 우리 애는 무사할까?’ 하는 걱정을 하곤 합니다. 그때 과연 우리 아이가 누구까지 인가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사용하는 우리라는 단어의 정도가 누구까지를 포함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내 직계 후손을 말하는 것인지, 내 동네 아이들까지를 말하는 것인지, 내가 다니는 성당 아이들까지를 말하는 것인지? 이 시대의 모든 어린이, 청소년, 청년들을 말하는 것인지? 나에게 있어서 우리는 과연 누구까지인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그저 자기 삶을 살았을 뿐이라고 답할지 모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 자기와 자기 식구들이 먹고 살았을 뿐이라고. 부자가 살면서 자기 집 문 앞에 와서 구걸하는 라자로까지 돌봐야 하느냐고 물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부자는 죽은 뒤에 마치 자신이 라자로를 돌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승에 떨어져 고통을 받고, 라자로는 아브라함 곁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루카 16,24-25) 이 말을 듣고 부자는 억울하다고 느낄 줄 모릅니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26)는 말을 들은 다음에는 아예 절망감에 빠졌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다른 복음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저 나 하나 계명을 잘 지키고 나에게 주어진 조건과 상황이 나를 위해 주어진 것처럼 여기고, 나 나름대로 살아간 것만으로는 구원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여러 번 여러 경로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살면서 보고 듣고 느끼며 마주치는 사람들과 함께 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위의 형제자매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염려해 주며, 가능하면 어려울 때 나누면서 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의 소명이라고 명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주님께서 나에게 돌보라고 맡기고 싶은 사람을 내 눈에 띄게 하고, 내 귀에 들리게 하고, 내가 느끼도록 하심으로써,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교회를 이루어 한 형제자매가 되도록 초대하십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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