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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2주간 금요일 ’21/03/05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사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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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1-02-19 ㅣ No.4554

사순 제2주간 금요일 ’21/03/05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사목지

 

최양업 신부님은 사제서품을 받은 후 바로 첫 사목지로 중국 차구 성당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차구 성당은 조선교구 선교사들의 주요 거점이었습니다. 18495월 백령도 귀국 여행에 실패하고 상해로 돌아온 최양업 신부님은 다시 함선을 타고 중국 요동 차구()로 갔다. 최양업 신부는 이곳 눈의 성모 성당에서 7개월간 머물면서 만주교구장 직무대행인, 훗날 제4대 조선교구장 주교님이 되는 베르뇌 신부님의 지시에 따라 병자들을 방문하고, 주일과 축일 미사 때 강론을 했습니다. 또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대축일에는 고해성사를 집전하고 성체를 분배했습니다. 조선인 사제가 중국 땅에서 중국 신자들을 사목한 첫 번째 사례입니다.

 

1850년경 최양업 신부님이 천신만고 끝에 귀국하여 서울에서 당시 중병을 앓고 있던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님을 만난 다음 곧바로 전라도를 시작으로 공소 순방에 들어갑니다. 6개월간 5개도를 두루 돌고 나서, 그해 가을에 자기 은사인 르그레즈와(P.L.Legrégeois) 신부님에게 그간의 활동 보고를 올리는 편지를 썼습니다. 최 신부님의 귀국 후 첫 번째 서한인 이 편지는 1850101일자로 작성되었으며, 그 발신지를 홍산(鴻山) ‘도앙골이라 명기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에서 자신이 순방 활동 중 발각될지도 모를 위험한 상황을 늘 직면하고 있다고 보고합니다. 어떤 마을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이장에게 달려가서 수상한 (서양) 사람이 잠입했다고 알리는 바람에 이장이 마을 사람들을 소집하여 잡아 죽이자고 의논을 하는 중에 밤을 지새워 기도했다는 이야기도 쓰여 있습니다.

 

1850년에 성 다블뤼 안 안토니오 신부님이 조선대목구 신학교를 배티에 설립한 후 배티 교우촌에 두 칸짜리 초가집을 매입하여 마흔 살가량의 황석두 루카와 이 바울리노 등을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학교 건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초가집은 성당 겸 사제관이자 신학생들의 기숙사 역할도 했습니다. 1853년 여름에는 최양업 신부님이 이 초가집에 살면서 전국 다섯 개 도에 흩어져 있는 교우촌을 순방하는 한편 틈틈이 신학생들을 지도했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이 배티 교우촌을 사목 중심지로 삼으신 기간은 1856년까지 대략 3년 동안입니다.

 

1860년경 경신박해 때 최양업 신부님은 울산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의 긴월산 정상에 있는 죽림골’(대재 공소)에서 약 4개월간 은신하며 교우들과 함께 생쌀을 먹으며 박해를 피했고, 미사를 집전하며 스승에게 보낸 신부님의 93일자 마지막 서한을 썼습니다. 이 석굴 공소는 대나무로 덮여 있어서 죽림굴이라고 불렀습니다. 박해를 피해 죽림골로 숨어든 성녀 김 아가타가 3개월간 이곳에 머물며 전교에 여념이 없던 최양업 신부님을 도왔고, 양식이 떨어지면 최 토마스 신부님이 손수 삼은 짚신을 언양 등지에 나가 팔아 식량을 마련하며 외부와 연락을 주고받는 일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1861615일 배론으로 돌아오는 길에, ‘땀의 순교자최양업 신부님은 과로와 장티푸스로 12년의 사목 생활을 마치고 40세의 일기로 소명을 다하셨고, 배론성지에 안장되셨습니다.

 

- 성지순례후원회 http://cafe.daum.net/holyplacek/s8v0/1 참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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