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21/11/13

인쇄

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1-11-05 ㅣ No.4837

연중 제32주간 토요일 ’21/11/13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성령의 열매라는 주제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선포자,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선포자로 소개합니다(1코린 2,2 참조). 자신들의 신앙심을 율법과 전통의 준수에 두고자 하는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구원 그리고 믿음의 중심인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떠올립니다.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현실을 그들 앞에 내세움으로써 이를 상기시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으로 여러분 눈앞에 생생히 새겨져 있는데, 누가 여러분을 호렸단 말입니까?”(갈라 3,1)

 

오늘날에도 사랑이신 하느님을 온몸으로 포옹하기보다 예식과 율법을 중시하면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느님보다 종교를 통한 자신의 안위를 보장받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근본주의자들의 유혹입니다. 가야 할 길이 두려운 나머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뒷걸음치는 이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보장해 주시는 하느님을 찾는 게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무엇을 보장받으려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께로 돌아오라고 바오로 사도가 요청하는 이유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20). 서간의 말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 6,14)

 

만일 우리가 영성생활의 맥을 잃고 수많은 문제점과 수많은 생각이 우리를 괴롭힌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앞에 서고, 그분으로부터 새롭게 시작합시다. 십자가를 우리 손으로 받아 가슴에 꼭 품어 안읍시다. 혹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쪼개지신 빵, 곧 성체 앞에서 그분을 경배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시는 하느님의 권능이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분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 중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만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십자가 아래에서 일어난 일과 동일한 일이 일어납니다. ,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십니다(요한 19,30 참조). 다시 말해, 당신의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파스카에서 솟아나오는 성령께서 영성생활의 근원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바꾸십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분은 성령이시며,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역사하심이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십니다! 교회를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우리는 불고 싶은 데로 부시는 성령의 행하심에 순종하라고 부름받았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께서 모든 사람에게 임하시고, 사도들 중에서도 가장 마음 내키지 않아 하던 사도들조차도 예수님의 복음이 소수의 특권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은총이 어떠한 예외도 없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안위, 작은 단체, 그리고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확실한 것들을 찾아 나서는 이들은 성령으로부터 멀어지고, 성령의 자유가 자신들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이처럼 공동체 생활도 성령 안에서 거듭납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인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영양을 공급받고, 우리의 영적 싸움을 계속 이어갑니다.

 

바오로 사도는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측면을 제시합니다. 한쪽에는 육의 행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성령의 열매가 있습니다. 육의 행실이 무엇입니까? 육의 행실은 하느님의 영을 거스르는 행위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것들을 육의 행실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우리 인간의 육체에 어떤 잘못이나 악한 것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짊어지고 가신 인간 육신의 현실을 어떻게 주장했는지 보았기 때문입니다. 육은 폐쇄적이고 세속적 본능을 따르며,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어 하느님과 다른 이들에게로 우리 자신을 열어 주시는 성령께 마음의 문을 닫아거는 수평적 존재를 가리키는, 오직 지상적 차원의 인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육은 또한 이 모든 것이 늙고, 모든 것이 지나가며 썩어 없어지지만, 성령께서는 생명을 준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sessualità)의 이기적인 사용, 우상숭배와 같은 주술적 행위, “분쟁, 시기, 분열, 분파, 파벌, 질투, ()”(갈라 5,19-21 참조)와 같이 대인관계를 저해하는 모든 행위를 육의 행실로 나열합니다.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은 육의 열매이며 단지 인간의 태도, “병든인간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고유한 가치가 있지만, 이 모든 것은 병든인간의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갈라 5,22) 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그리스도를 입은”(갈라 5,22)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살라고 부름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바오로 사도가 나열한 이 목록을 읽고 우리 자신의 행실이 이에 일치하는지, 우리가 진정으로 성령을 따라 살고 있는지, 또한 이러한 열매를 맺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좋은 연례피정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삶은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의 열매를 맺는가?’ 예를 들어 처음에 나열된 세 가지는 사랑, 기쁨, 평화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께서 임하신 사람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평화롭고 즐겁고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이 세 가지 흔적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을 알아봅니다.

 

가끔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수많은 계명과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아름다움은 너무 많은 계명에 근거해서는 파악할 수 없고, 평화와 기쁨을 증거하게 하는 기도로 길러진 사랑의 본래의 결실을 망각하게 만드는 도덕적 전망에 근거해서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사들 안에서 표현되는 성령의 생명은 마음을 회심시켜 주시는 주인공이신 성령의 은총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서는 관료주의로 질식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제이거나 주교인 우리는 종종 성사를 집전하거나 사람들을 맞아들일 때 관료적으로 행동하곤 합니다. 그리고 아니요, 저는 이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고 말하며 자리를 뜹니다. 종종 우리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힘을 보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사랑의 영의 숨결로 살아나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변화시키는 힘을 갖고 계신 분은 바로 이 사랑이신,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전문: https://www.vaticannews.va/ko/pope/news/2021-10/papa-francesco-udienza-generale-lettera-galati.html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86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