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20주일(나해) 요한 6,51-58; 15/08/16

인쇄

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15-08-16 ㅣ No.2934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연중 제20주일(나해) 요한 6,51-58; 15/08/16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Laudato Si’) III


 


 


 


오늘은 회칙 ‘찬미를 받으소서’의 제1장 지구의 환경 오염과 제2장 피조물에 대한 창조의 가르침에 이어,제3장 인간이 초래한 생태 위기의 근원들(101-136항) ’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3장에서 교황님께서는 현재 상황을 분석하고 철학과 사회과학과 대화를 나누어 “그 증상과 심층적 원인들을 성찰”(15항)합니다. 이 장은기술: 창조성과 힘(102-105항), 기술적 패러다임의 세계화(106-114항), 현대 인간중심주의의 위기와 영향(115-121항), 실질적 상대주의(122-123항), 고용 보호의 필요(124-129항), 새로운 생명공학(130-136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I. 기술: 창조성과 힘 기술(102-105항)


기술이 지속 가능한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기술은 “온갖 기술 지식, 특히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경제적 재원을 확보한 이들이 인류 전체와 온 세상을 강력하게 지배할 수 있도록” 합니다(104항). 인류는 “올바른 한계를 정하고 바른 자제력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건전한 윤리와 문화와 영성”(105항)을 필요로 합니다.


 


II. 기술적 패러다임의 세계화(106-114항)


지배적인 기술관료적 사고방식은 현실을 제한 없이 조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는 삶의 모든 측면에 관련되는 환원주의입니다. 과학기술의 산물들은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결국 생활 양식에 영향을 미치고 사회적 기회들의 형태를 잡아가는 틀을 만들어내기”(107항) 때문입니다. 또한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은 경제와 정치를 지배합니다. 특히 “경제는 이윤을 목적으로 기술의 모든 발전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시장 자체가 온전한 인간 발전과 사회 통합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109항).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기술만을 믿는 것은 “전 세계의 체제가 안고 있는 가장 뿌리 깊은 진짜 문제들을 숨기는 것”(111항)을 의미합니다. “과학과 기술 발전은 인류와 역사의 발전과 동일시 될 수 없기에”(113항) 그렇습니다. “문화적 혁명”(114항)이 가치들의 회복에 필요합니다.


 


III. 현대 인간중심주의의 위기와 영향(115-121항)


현실보다 기술의 추론을 중시하는 현대 인간중심주의는 더 이상 자연을 타당한 규범이며 살아있는 피난처로 인식하지 않습니다(과르디니 참조).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인간의 자리와 자연과 맺은 우리의 관계를 이해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지배’는 책임 있는 관리의 의미에서 더욱 올바르게 이해되어야만 합니다”(116항). 잘못 이해된 인간중심주의의 비판은 그와 마찬가지로 불균형적인 “생태중심주의”를 향한 변화가 아니라 “올바른 인간학”을 향한 변화입니다(118항). 이 “올바른 인간학”은 “인간관계의 중요성”(119항)과 모든 인간 생명의 보호를 최우선 과제로 삼습니다. “자연 보호에 대한 관심과 낙태의 합리화는 양립될 수 없습니다”(120항).


 


- 현실적 상대주의(122-123항)


 잘못 이해된 인간중심주의는 “어떠한 것이 자신에게 즉각적인 이득을 주지 않는다면 무의미하다고 여기어” 현실적 상대주의를 야기합니다. 이 모든 것에는 “다양한 태도들이 서로를 촉진하여, 환경 훼손과 사회 부패를 야기하는”(122항) 논리가 담겨있습니다. “문화 자체가 부패하고 객관적 진리와 보편타당한 원칙들이 더 이상 성립되지 않을 때, 법은 자의적으로 부과되는 것이나 피해야 할 장애물로만 여겨질 수 있습니다”(123항).


 


- 고용 보호의 필요(124-129항)


온전한 생태학은 “노동의 가치를 고려해야 할 필요”(124항)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일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노동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의미에 속하며, 성장과 인간 발전과 개인적 성취를 위한 길”(128항)이기 때문입니다. “단기간에 더 큰 금전적 이익을 얻고자 인적 투자를 중단하는 것은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는 사업 행위입니다”(128항). 모든 이가 경제적 자유의 참다운 혜택을 보려면 “경우에 따라서는 더 큰 자원과 경제력을 가진 이들에게 제한이 가해져야 합니다”(129항).


 


- 새로운 생명공학(130-136항)


주요 기준은 유전자 변형 식품이며, 이는 “복합적인 환경 문제”(135항)입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유전자 변형 식품이 경제적 발전을 가져와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었지만 많은 중요한 문제들이 남아 있습니다”(134항).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특히 군소 생산자들과 농촌의 일꾼들, 생물다양성, 생태계망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광범위하고 책임 있는 과학적 사회적 토론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모든 가능한 정보를 고려하고 솔직하게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독립적인 학제적 연구에서”(135항)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또 과학과 기술의 현대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56절) 라고 초대하십니다.


 


교황님은 기술의 발전을 격려하시면서도, 어떻게 그 기술을 활용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하십니다. 이윤추구를 위한 기술개발보다, 기술을 통한 공동체의 발전과 사회통합을 가져오는 새롭고 올바른 인간학을 역설하십니다.


 


눈앞의 이익만 추구하는 현실적 상대주의로 인하여 자연 환경의 훼손과 인간 사회의 문화적인 부패를 가져오도록 하지 말고, 인간 발전과 개인적인 성취에 대한 관심과 배려로 고용을 증대하며, 환경과 생태계에 대한 과학적 사회적 토론을 신설하여, 인류를 구하기 위한 희생제사를 통해 우리를 구하신 주님의 가르침과 사랑의 희생을 기초로 한 새로운 생명공학을 펼쳐 나갑시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7)


 




78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