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사순 제2주간 화요일 ’21/03/02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아버지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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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1-02-19 ㅣ No.4551

사순 제2주간 화요일 ’21/03/02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아버지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어제 하느님의 종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탄신 200주년 기념일을 맞아 최양업 신부님의 업적을 간략하게 살펴보았고, 오늘은 최양업 신부님의 아버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아버지인 성 최경환(崔京煥프란치스코는 충청남도 흥주군 다랫골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의 집안은 한국천주교회 창설기부터 천주교 집안입니다. 최경환은 원래 성질이 괄괄했지만, 천주교 신앙을 갖고 난 다음에는 온화해졌다고 합니다.

 

최 프란치스코는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서울, 강원도, 부평 등을 전전하며 살다가 경기도 과천 수리산 뒷듬이 마을에 정착하였습니다. 뒷듬이 마을 사람들은 드문드문 집을 지어 담배 일을 일구고 옹기 장사를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최경환은 산을 개간해 밭을 일구고 살면서 새로 찾아오는 교우한테는 집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밤에는 교우들을 모아 교리를 가르치고 함께 묵상하며 기도를 드리는 등 마을을 교우촌으로 만들어나갔습니다.

 

훗날 최양업 신부는 아버지를 이렇게 회고하였습니다. "부친은 자주 묵상을 하고 신심서적을 대하였으며, 언제나 종교와 신심 이외의 것은 말하지 아니하셨다. 또한 아버지의 말씀은 힘이 있고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에게 천주의 사랑을 심어 주셨다.“

 

1836년 모방(Maubnt) 신부님이 입국하여. 조선에서는 서양 신부가 들어와 전교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비밀리에 신학생을 선발하고 있었습니다. 한 교우가 맏아들을 천거하여, 모방 신부님은 그들 부부를 찾아가자, 최경환은 "신부님, 고맙습니다. 이것은 저희의 뜻이 아니라 천주의 부르심이요 소명입니다. 저희 집안에 이러한 기쁨이 찾아올 줄은 참으로 몰랐습니다" 하며 흔쾌히 승낙하였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회장이 된 그는, 의연금을 모아 옥에 갇힌 교우들과 가난한 이들을 찾아다니며 나누어주었고, 순교자들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안사람들한테는 순교할 준비를 하라고 이르고 성패와 성물을 감추었습니다. 같은 해 713일 밤,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이 마을을 포위하고 욕설을 퍼부으며 그의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친구를 대하듯 포졸들을 반가이 맞으며 요기를 하고 쉴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의 이러한 태도에 안심한 포졸들은 그날 밤 평안히 잠을 잤습니다. 다음날 아침잠을 깬 포졸들은 아침을 푸짐하게 대접받은 뒤 최경환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체포해 서울 포청으로 이송하였습니다.

 

포장은 프란치스코에게 주리를 틀게 하고 뾰족한 몽둥이로 살을 찌르면서 고문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최양업이 신부가 되기 위해 나라 밖으로 나간 사실이 알려지자, 포장은 더욱 화가 나 무지하게 매질하여 그의 팔과 다리의 뼈가 어그려졌습니다. 교우들은 형벌을 못 이겨 대부분 배교하여 석방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태형 삼백사십 도와 곤장 일백여 도를 맞으면서도 아내 이성례 마리아와 친척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였습니다.

 

911일 프란치스코는 포장 앞에 끌려가 치도곤 쉰 대를 더 맞으니 그것이 최후의 출두요 형벌이었습니다. 옥으로 돌아온 그는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졌다"라고 말한 뒤 포도청 옥사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때는 1839912, 그의 나이 서른다섯이었습니다.

 

- ‘경향잡지’, 19968월호, 편집부 참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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