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곡성당 자유게시판

하느님 우리 오빠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인쇄

신선희 [sin6476] 쪽지 캡슐

2010-08-19 ㅣ No.10634

언니네와 가평계곡을 놀러가서 막 짐을 풀려고 하는 순간

오빠의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부랴부랴 짐을 다시 챙기고 돌아오려 하니

처음으로 우리 아들네와 언니네 아들네 식구들이  놀러갔는데

특히 9살짜리 조카까지 ..... 맑고 시원한 계곡을 뒤로 하고

떠나오는데 하느님께 오빠를 데려가 주시라고 그렇게 열심히 기도 했더니

하필이면 이럴때 데려가실께 뭐람 하느님도 참 야속하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택안중 백병원장례식장을 가니 저녁늦은 시간이 되었다.

전후 사정을 모를 성당식구들과 동네 친척들한테 고개를 들수가 없었다.

12월달이면 들어오기로 되어 있는 오빠가 가장 사랑하는 맏아들 베드루신부를

기다리지 못하시고 ... 7월달에 오빠한테 12월이면 베드로가 올꺼야

했더니 "아직도 멀었잖아" 하시더니 .....

 

요양원으로 모셔야 된다고 오빠와 조카들한테 수없이 말한 어느날

 성당자매님이 하는 지방에 있는 어느 요양시설에서  모셔주시기로

해서 그 곳에 모셔다 드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걷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잘 알아 듣지도 못하시는 오빠를

기어 다니는 올케언니가 몇년을 수발을 했다.

출가외인인 두딸은 시부모를 모시고 살고 아직도 결혼못한

둘째 아들은 직장을 다녀야 하고 ......효자효녀들이지만 어쩔수가 없다.

 

지방에 계시다 병이 나서 서울에 올라온 오빠 그 곳에 가시기를

마다해서 다시 알아 본 요양시설이 "안산 마루"라는 체인으로

되어 있는 둘째아들 있는 곳하고 가까운 곳이었다.

 

요양원직원들이 오빠는 행복한 분이라고 늘 말하곤 했다.

많은 분들을 모셔 봤지만 가족들이 환자를 그렇게 극진히 찾아

다니는 가족은 그리 많지 않다고 했다.

 

어찌 됐든 집에서 모실 수없었든 오빠...

어려서 알 수없는 질병으로 길에서 간질과 같은 증세를 보였을때도

어느 날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면서 병을 치유시켜주셨고

고목의 대추나무 꼭대기에서 떨어질때도 부러진곳 하나없이 ...

 

어렵고 힘든 순간마다 보살펴 주시더니 맏아들을 당신께서

도구로 쓰시겠다고 해서  저와 언니는 안된다고 얼마나 추천하시는

수녀님을 힘들게 했는지 ... 나중에는 지금의 베드로 신부에게

그러면 교구의 사제가 되는 신학교를 가라고 설득 뜻을 굳힌

베드로신부의 마음을 바꿔놓지를  못했다.

 

첫서원식 날 신심이 약한 나는 베드로를 붙들고 우는 바람에

베드로엄마까지 몇사람을 울리는 불상사를 내고 말았다.

 

휴가때면 시골집의 보수며 병든 아빠엄마를 모시고 제주도며 설악산

 독도까지 몇년전인가는 두고모인 언니와 나와 함께 휴가를 보낸다고

여행경비를 걱정하지 말라고 해서 돈이 어데서 났을까 했더니

베드로의 동생들한테 도움을 요청 동생들이 내 통장으로 직접돈을

보내줘서 휴가를 보낸일도 있었다.

 

오빠와 함께 계시는 한 할아버지는 신자도 아닌데 내가 가면

신부님 안녕하시냐고 안부를 묻곤하신다.

 

어찌됐든 베드로가 수도회 사제가 되는 것을 그리 반대했던 나는

오빠의 장례를 치루면서 너무도 기뻣다.

 

 수도회 우이동,돈암동, 청주, 광주, 양양 중국에서까지 모든 식구들과 동반자님들까지

본당사제의 부모님들이 돌아 가셨을때 주교님과 본당신자들이 해주는 것을 몹시

부러워 했던 나는 어제 오빠의 장례미사때 16명의 신부님들이 드려주시는

장례미사를 하면서 수없이 하느님  감사합니다를 했다.

 

 하느님 우리 오빠 히야친도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아멘

총회를 앞둔  때에 오빠가 돌아가셔서 더많은 수도회식구들이 함께 할 수있었답니다

 



107 4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