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곡성당 자유게시판

사순시기에 남양성모성지까지 걸어 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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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성 [kds7478] 쪽지 캡슐

2007-04-01 ㅣ No.7426

 

김동성 하상바오로

사순시기에 남양성모성지까지 걸어 가면서


1. 저의 소회와   2.걸어갔던 과정을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찬미 예수님

(소 회)

영세를 받은지 벌써 12년이 되었음에도 늘 그렇듯이그렇게지냅니다. 대림,성탄,사순,부활,연중 그안에도 또 여러성월에 따라 늘 묵상하며 생활하여야함에도 늘 대강 지냅니다. 그리고

특히 성지순례나 무슨 특별한 때나 느끼고하는점은 (그나마 곧 잊어버리지만)우리 선조들 께서 신앙을 증거하며 죽음을 맞아들이시며 겪으셨던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고통 그 고초(문장력의 표현이 이것밖에안됨을 통탄하며)를 어떻게 견디셨는지......

살이 찢겨지고 뼈가 으깨지는 온갖 악한 형벌을 받으시면서도 단 한마디(난, 아니요. 난, 천주교쟁이가 아니요.)를안하고 마침내 치명당하시는 모습을 생각하면 너무도 숙연해집니다.


과연 나는 어떠하였을까

과연 신앙을 증거하며 그리 하였을까

남양성모성지는 잘 아시겠지만 1866년 병인박해때순교하신 분들의 성지입니다.

당시에 지방관아와 형조와 의금부에서의 문초가 얼마나 악랄하며 비 인간적인것인지는 현재의 저희로서는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 예는 이루 다 헤아릴수 없아오나 한가지만 이야기

하겠습니다.

본당의 신 중신 다니엘선생님께서 엮으신 “순교자 103위 성인, 주여 어디에 계셨나이까”

에서 발췌 요약하였습니다.


손자선(토마)는덕산군 홍주면의 3 대째이어 내려오는교인 집안 태생이었습니다.성격이 온후한 농사꾼인 그가 박해자에게 맞서 그토록 담대하게 죽어갈줄은 아무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병인년 그의 나이 스물여덟, 다블류주교님이 이미 체포된후포졸들의 약탈이자행되었습니다.

토마는 이를 항의하려 관아에 갔다가붙잡혀 문초를 당합니다. 덕산에서의엄청난 문초후

해미로 이송되어배교를 강요 당하며지칠줄 모르고 헤대는 끝없는 고문에 토마 역시 끝까지

참고 이겨냈습니다. 어느날 고문하다 지친 관장이 그에게 너무나도 악랄한 주문을 합니다.

너무나도 악랄한.......

“좋다,네가 끝내 배교의 말을 아니 하는구나,하면 말로써만 천주를 찾고 말로써만 배교를

않겠다하니 이번엔 행동으로 보여라.네 이빨로 네 살점을 물어 뜯어라,그렇지 않으면 배교로 간주하여 풀어주겠다.“

이에 손 자선토마는 “우리의 몸은천주께서 내려 주신것으로써 스스로 헤쳐서는 아니되나,

배교의 증거로 삼자하니 아니 따를수 없구나.“하고자신의 양팔에서 살을 한점씩 물어 뜯었습니다. 이를 본 관장은 그에대한 회유를 단념하고 공주 감영으로 보냈습니다.

이후의 고초는 더욱 말로 표현할수가없을정도입니다. 한 나절의 곤장에도 숨이 끊어지지 

않자 목에 줄을 감아 절명케하여 천주의 품에 안기게 하였으니.....


주여, 어디에 계셨나이까


물론 많은 사람들이 배교를하고 일러바치고하여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의 나머지 생이 과연 행복하였을까요. 아마도 그렇지는 못하였을것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목숨은

부지하였겠(지만 회한과 부끄러움에 오랜세월 고통스러웠겠지요. 세월이 지나면 조금씩

벗어날수는 있었겠지만서도요.

그중에 우리 선조분들중 당대의 석학이셨던 한분이 1801년 신유박해때 목숨을 부지하여

귀양살이 중에 누구나 아는 특히 정치가들의 필독서인 위대한 책을 저술하신 분이 계시지요.

그 분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요.


이야기가 옆으로 새지만 구우일모 라는 고사성어 하나 알고갑시다.

사람의 죽음은태산 같이 무거운 죽음이있고(사여중태산). 기러기 털같이 가벼운 죽음이있다.(사여경홍모)  이말은 예수님 탄생 100 여년전 한 무제때 사마천이 한 이야기입니다.

사마천은 흉노족과의 전쟁에서 큰공을 세운 ‘이릉’이라는 장수가 후에 포로로 잡혔을때

이를 변호하다 궁형이란 형벌을 받게됨니다.  궁형은 남자에게만 내려지는 형벌로써 사형

다음의 중한 벌입니다.(짐작이 가시죠, 싹뚝)  당시에는 궁형을 받으면 자결로서 생을 마감

하여그나마 쥐꼬리만한 추앙을 받습니다.

그러나 사마천은 자결하지 않는  자기의 심정을 친한 친구에게 낱낱이 이야기합니다.

‘나처럼 이름없는 말단 관리가 사형이든 자결이든 죽는 것은 아홉 마리 소 중에 털 한개

(구우일모)떨어지는것에불과하네 . 하지만 나는 해야할일이 있네. 나는 어떠한 비난과 고난을 무릅쓰고라도 선대로부터  이어져내려온 ‘사기’를 완성하는 일이네‘

하여 그는 역사서 사기를 완성하였습니다.


무었이, 어떤 것이 옳은지 그른지 제가 감히 평가하겠습니까.

이런저런 생각하다보면 저 같은 보통사람 장삼이사는 그저 다음의 싯귀하나가 위안이 됨니다.  240 여년전의 위대한 사상가이며 대 문호이신 독일의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시 일부를 옮겨보겠습니다.

나그네의 편안한 심사  중에서

-전  략-

누천년 역사에 관하여

제대로 평가할수 있는 안목이 없는 자는

차라리 어둠속에서 세상사 모른체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게 좋을것입니다.

-후   략-

약 10시간에 걸쳐 걸어가는 동안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조금이나마 예수님과 우리선조님들의고통과 고난을 느끼지는 못할지언정 생각하기로한 성지순례가 한편 먹을 것 다 먹고 마실 것 다 마시고 호사스럽지나 않았나 생각됨니다.

티벳의 라마교인들은오체투지로 수백 수천 킬로미터를 순례하며  무슬림과 힌두교도들  또한 상상할수 없는 고행과 기도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 인들은 상대적으로 경제적인 풍요가 뒷받침되어서 그런지  많이 나약해지고, 희석되어지지 않나 생각해 봄니다.  감히....


이왕 괴테 선생님의 시가 나왔으니 이 세상 살다가 돌아가신분 특히 의를 행하다 돌아가신분 그중 에서도 우리나라 개화기때 가톨릭 신앙을 증거하시다 치명 당하신 분들을 위하여

다음의 시 로써 끝맺으려합니다.


승천의 그리움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현자들 말고는

우매한 무리는 네 말을 곧 비웃고 말리라

생명 있는 것을 내 찬양하려 함이로다

불꽃에 뛰어드는 죽음  그리워 하는 생명을


네가 잉태되었고 네가 잉태시키고하던

사랑의 밤들의 서늘한 순간

촛불 조용히비추고 있을때

낯선 느낌이 너를 덮친다


너는 더 이상 어둠의 그늘속에

갇혀있지 않다,  불현듯

새로운 욕구가 너를 낚아챈다

보다 높은 교합에로


아무리 멀다해도 네겐 어려움이 아니구나.

그 먼길 날아와 빛에 홀린 나비여

급기야는 빛을 욕망하여

타죽고 마는 그대 나비여


죽으라 그로써 얻으리라

이런 신념 네가 갖고있지 않는한

너는 이 어려운 지상에서 헤매는

한낱 울적한 나그네에 불과하리라


갈대 하나가 생겨 나는것도

세상을 달게하기 위함이라

내 붓대에서도

사랑이 흘러 나올진져! 끝.


(걸어갔던 과정)


올해초 남양성모성지까지 한번 걸어서 가 보리라 마음먹었습니다.


나름대로 매일 새벽 호압사까지 왕복하며 준비를 하였습니다.

드디어 올해 2007년 3월 18일 주일 새벽04:00 기상하여 준비하고 4:50분에 대문을나섰습니다. 7동 국회단지쪽으로하여 목골산을 넘어(목골산은 임광아파트 뒤쪽 줄기산입니다.)

5:20분에시흥 희명병원 4거리에 도착하였습니다. 시흥 4거리는 깜깜한 새벽인데도 여기서 깩,저기서 깩 난리 부르스입니다.(술 취한 사람들이) 30분후 5시 50분 해태상을지나 서울을

벗어났습니다. 이때까지 계속 묵주기도를 바치며 왔는데 장갑없이 1 시간정도 계속 손을

노출시켰더니 손이곱아 손가락을 움직일수가 없었습니다. 손을 주머니에 넣고 계속 걸었습니다. 순간 가로등이 일시에 촥 꺼졌습니다. 6시18분. 조도에 의하여 자동으로 꺼지는걸로 알고있는데 그랬겠지요. 6시 35분 안양대교.45분 안양역. 7시20분 군포진입.45분 산본역도착. 근처 조용한곳에서 햄 샌드위치로 아침식사를 간단히하였습니다. 집을 나설때 몸에 촉촉이 맺혔던 이슬은 다 어디로 같는지 꼭 필요할 때....할수없이 이슬을 사기로 하였습니다.

그것도 가짜아닌 진짜이슬로 360 ml 에 1,000원 에 사서 아침 해장하였습니다.

군포 소방서지나 터널을 지났습니다. 이제부터 47번 일반국도와 이어서 39번 일반국도후 313 번 지방도로만 만나면 되는코스입니다.  그러나 이정표의 국도표시가 잘못되었는지

제가 착각하였는지 47번 국도에서 47번 국도를 찿아 1시간이나 헤멧습니다. 차는 막 달리지요,사람은 없지요,  하여튼 어찌어찌하여 제대로 찿아 걷기시작하였습니다.

11시 15분 47번국도 끝나고 42번국도가 크로스로 관통하는 지점이 39번 국도의 시작입니다. 15분후 11시 30분 에 드디어 남양성모성지 안내 입간판을 보았습니다. 우선 무척 반가왔습니다. 앞으로 14 킬로미터. 5분쯤가니 오른쪽으로 저수지보이고 앞길은 엄청난 오르막길입니다. 방법이 있습니까? 사뭇 걸었습니다.  13:00. 드디어 39번 국도 끝나고 313번 지방도로와 만났습니다. 비봉 톨게이트가 있었습니다. 시원한 캔맥주 하나하고 또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14:10분 남양동 이정표발견하였고 드디어 15:00(오후 3 시) 남양성모성지에 도착 하였습니다. 감개무량. 나름대로 준비하였으나 다리가 아팠습니다. 십자가의길과 묵주기도 5단 바친후 오후4시 30분 귀경 버스에 올랐습니다.

사족: 다음날 하루종일 걸을때 절룩 거렸습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 합니다. 찬미 예수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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