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곡성당 자유게시판

한국의 103위 순교 성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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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락준 [tutti] 쪽지 캡슐

2007-09-07 ㅣ No.8121

 

한국의 순교 성인 그 두번째 입니다...

 



강원도 강촌(江村) 출신의 박 안나는 서울의 한강변에 살면서 어머니와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머리가 둔해 교리를 명확하게 알지는 못했으나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매일 기도했다.

18세 때 비교적 부유한 교우 태문행(太文行)과 결혼하여 2남 3녀를 두었고 또 정성껏 그들을 교육시켰다.기해 박해 초인 1839년 4월 박 안나는 남편,큰아들 응천(應天)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포청에서의 고문으로 남편과 큰아들은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나 박 안나만은 배교를 거부하고 혹형과 고문을 이겨냈다.

연일 계속되는 혹형으로 살이 터지고 뼈가 튀어 나왔으나 언제나 평온하였고 때때로 위문오는 가족들에게도 권면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형조로 이송되어서도 형관이 배교하고 석방되어 가족들에게 돌아가라고 유혹하며 혹은 위협하고 고문하였으나 박 아기는 끝까지 신앙을 지켜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57세였다.





이 아가타는 경기도 이천(利川) 출신으로 17세 때 결혼했으나 남편을 여의고 친정으로 돌아와 어머니, 동생 이 호영과 함께 입교하였다. 아버지가 대세(代洗)를 받고 사망하자 동생을 따라 서울로 이사하였다.

1835년 2월 (음력 정월) 한강변 무쇠막에서 동생 이 호영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 여인으로는 차마 견디기 어려운 형벌과 고문을 참아냈고 형조로 이송되어 동생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사형 집행이 연기되어 옥살이를 더 해야 했다.

고통스러운 옥중 생활 속에서도 동생과 함께 한날 한시에 순교하자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인내와 극기로써 생활하였다. 동생을 먼저 순교의 영광을 입게 하고 자신은 동생이 옥사한지 7개월 후인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56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3은 동생)





김업이 막달레나는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며 본래 수정(守貞)을 원했었는데, 혼기에 이르러 어머니의 권유로 교우 청년과 결혼했다.중년이 되어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고는 친정으로 돌아와 노모와 함께 애고개(지금의 아현동)에서 망건을 만들어 팔며 살았다.

항상 노모에게 순종하는 좋은 표양과 밝은 교리지식으로 외교인들에게 전교하며 순교할 결심으로 수계하던 김 업이 막달레나는 1836년 10월 김 아기 아가타,한 아기 바르바라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김업이 막달레나는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매우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았으나 모두 참아내고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형집행이 유예되어 3년을 옥살이한 끝에 1839년 5월 24일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자신의 소원대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때 나이는 66세였다. (5, 10과 함께 체포됨)





일명 '치문'으로도 불리는 이 광헌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여러 순교자를 낸 광주 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청년시절에는 매우 방탕한 생활을 했으나 30세 경 입교한 후로는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여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거듭되는 박해로 이 광헌은 가산을 전부 잃고 순교할 때까지 10여 년을 궁핍하게 살면서 회장직에 충실하고 또 냉담자를 권면하고 병약자를 위로하며 외교인에게 전교했다. 그리고 범(앵베르)주교와 신부들을 자신의 집에 맞아들여 교우들을 미사에 참여케 하고 강론을 듣게 했다.

1839년 기해박해 초 어떤 예비 교우가 체포된 자기의 아내를 석방시키는 조건으로 이 광헌을 포함한 53명의 교우 명단을 포졸에게 건네주었다. 이로인해 이 광헌은 4월 7일 전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으로 끌려갔다. 포청에서 형문을 마친 후 4월 18일 형조로 이송되었다.

형조로 이송된 이 광헌은 배교하면 가족들과 함께 석방시켜 주겠다는 형관의 유혹을 뿌리치고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아 다리가 부러지고 살이 터져 온 몸이 피범벅이 되었으나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냈다.

형조에서의 혹독한 3차례의 혹형과 고문을 이겨낸 후 5월 24일 남명혁(다미아노)등 8명의 교우와 함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53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26은 처, 58은 딸, 21은 동생, 20, 21, 26. 58과함께 체포됨)





한 바르바라는 어려서 교우인 어머니에게 교리를 배웠으나 성장하면서 세속의 일에 마음이 빠져 어머니의 모범과 권면을 무시하고 외교인과 결혼했다.그러나 우연히 친정에서 만난 김업이(막달레나)로부터 교리를 다시 배우게 되었고, 30세에 남편과 세 자녀를 모두 여의고는 친정으로 돌아와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1836년 10월 김아기(아가타), 김업이(막달레나) 등과 함께 천주교 서적을 숨긴 죄로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혹형과 고문을 당하면서도 형관게 천주십계를 강론하고 의연히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형집행의 유예로 3년을 옥살이한 후 1839년 5월 24일 7명의 교우와 할께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그때 나이 48세였다.(5. 8과 할께 체포됨)

 

 

Theodore Dubois (1837-1924)
The Seven Last Words of Christ

드보아 / 십자가상의 칠언

여섯 번째 말씀 : Pater, in Manus tuas commendo spiritum meum
아버지여 제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Ten.solo & Chor.)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깁니다."
"그대는 나의 아버지시며 나의 하느님이요, 괴로움의 날에 내 구원의 주가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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