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19주일(나해) 요한 6,41-51; ’21/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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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1-07-28 ㅣ No.4740

연중 제19주일(나해) 요한 6,41-51; ’21/08/08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는 것이 병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무엇을 아는 것일까? 우리가 아는 것이 우리가 살아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아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데 해악과 한계를 끼치는 것일까?

 

오늘 복음을 보면,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요한 6,41) 라고 합니다. 그들이 수군거린 이유는 내가 아는 저이는 이런 사람인데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란입니다. 우리가 흔히 살면서 들게 되고, 우리 자신도 갖게 되는 반응들입니다. ‘쟤는 아이인데, 어디 어른들 사이에 끼어 건방지게 저런 말을 하지?’ ‘저이의 학력은 미천한 데 뭘 안다고 저렇게 떠들지?’ ‘저이는 겨우 말단 사원인데 어디 임원들의 결정에 대해 왈가불가할 수 있지?’ 등등에 대한 반응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에 대해 당연히 알고 있다는 사실, 또 내가 알기로는 그가 그 정도의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라는 의아한 느낌과 의구심 같은, 우리의 사전지식과 선입관이 진실을 향한 우리의 눈을 가리고 받아들이지 못하게 합니다. 그를 둘러싼 외연에 대한 정보가 그가 말하고 사는 내용을 가리고 무시되는 경우입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향해 말합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42)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아버지 하느님께서 일러주시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특별히 점지해 주신 이들만 아들 예수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고, 따르게 된다고 덧붙이십니다. “너희끼리 수군거리지 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43-44) 예수님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고 예수님의 인격과 말씀을 존중하지 않는 유다인들의 입장에서는 기가 차고 어이가 없는 말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존중감이 적은 만큼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거나 신뢰할 수 없습니다.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목수의 아들 예수일 뿐 그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 아버지 하느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시어 눈을 뜨게 해주시지 않는 한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45-46) 유다인들에게는 이런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점점 더 분노와 멸시의 대상으로 비치기 시작합니다. 이런 유다인들의 반응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한술 더 떠 그들이 못 알아들을 말로 자극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47)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구원은 아들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고 모시는 이들에게 주어진다고 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48)

 

유다인들의 조상들은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하다가 탈출을 시도한 바 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노예들이 도망을 치자 쫓아오기 시작하였고, 도망을 치던 유다인들은 홍해 바다를 만나게 됩니다. 자유를 찾아 노예살이를 탈출한 유다인들에게 홍해 바다는 자유라는 희망을 깡그리 파멸시켜 버리는 장벽처럼 막고 서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홍해 바다를 바라보면서 자유를 찾기 위해 저 바닷속으로 떨어져 죽을 것인지, 아니면 다시 이집트인들에게 잡혀가 노예로 살 것인가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주 하느님께서는 홍해 바다를 갈라 바닷물을 벽처럼 세우고 유다인들에게 바다 한가운데를 건너갈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홍해 바다를 건너 이집트를 탈출한 이후에도 광야에서 먹을 것이 떨어졌을 때,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만나라는 빵을 내려 주셔서, 유다인들이 그 만나를 주워 먹고 계속 탈출의 행로를 계속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만나는 이스라엘을 노예살이에서의 탈출 이후의 굶주림에서 건져 준 아버지 하느님의 양식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만나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양식인 만나는 인간 육체에 주어지는 육의 양식이어서 일정 시간이 지나서 때가 되면 허기가 들고, 매일 매일 주워 먹어야 했습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49)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먹고 나면 다시 배고프고, 또다시 주워 먹지 않으면 죽게 되는 육체의 양식인 만나에 이어, 영원히 살게 해주는 양식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50)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살게 해주는 양식인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 예수님 자신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51)

 

지금 당장 먹을 것을 먹어야 살 수 있을 정도의 굶주림과 삶을 영위하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물질적인 결핍에 시달리는 이들과 배불리 먹으면서 살맛을 느끼고 또 그렇게 힘을 내서 살아가며 행복감에 젖게 되는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터무니없는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로 들릴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배불리 먹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살면서 자신의 삶 속에서 어딘가 채워지지 않는 영의 갈증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의미를 가져다줄 수 있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43-44) 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욕구가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먹고 마시는 생존욕 이외에도 높은 자리에 올라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는 권력욕,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고 싶은 명예욕 등이 기본적으로 있습니다. 그리고 또 탐구하고 창조하고 다른 이들을 위해 희생 봉사하며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고 자신의 인격을 완성해 나가려는 욕구도 있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를 채워주는 여러 가지 중에 우리를 진정으로 채워주고 참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 주는 삶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며, 우리를 그 길을 통해 구원하시고자 초대하십니다. 주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서 우리 구원의 길을 찾고 그 길을 과감하고 진지하게 걸어나가 주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로 합시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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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9주일 꽃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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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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