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성당 게시판

3280 혼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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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규 [stephenking] 쪽지 캡슐

2000-06-07 ㅣ No.3307

  고대 로마의 대정치가이자 장군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러나 그가 그와 같은 위대한 업적을 이루기까지는 그의 엄청난 역량도 있었겠지만 그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의 도움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정말로 카이사르에게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던 두 사람이 어떻게 카이사르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는지 그 에피소드를 살펴보고 싶습니다.

 

1. 카이사르는 로마의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관례에 따라 대제사장의 아내의 집에서는 일년에 한 번 보나 여신에게 드리는 제사가 열렸는데, 그 제사는 남자는 들어갈 수 없는 예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부녀인 카이사르의 부인을 사모하는 한 청년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클라우디우스. 너무나 짝사랑한 나머지, 보나 여신제가 아니면 그녀를 볼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는 마침내 여장을 하고 카이사르의 관저로 잠입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수상쩍은 행동을 눈치챈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에 의해 발각되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신들에 대한 모독이라고 온통 로마는 벌집을 쑤셔놓은 듯 했습니다. 공화파들은 카이사르의 대제사장 사임을 주장했고, 반카이사르파의 대표격이었던 키케로는 클라우디우스를 법정에 고발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때 카이사르는 '카이사르의 아내는 의심조차 받아서는 안 된다'라는 말 한 마디로 배심원을 사로잡아 대제사장 사직은 겨우 면했으나, 마침내 아내와 이혼까지 하는 아픔마저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단순한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을 고발한 키케로를 너무나 미워한 나머지 카이사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마음먹고, 명문 귀족인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평민인 '클로디우스'로 이름과 신분을 고쳤습니다. 물론 그 배후엔 신분 변동을 승인할 권리를 가졌던 대제사장 카이사르가 있었지만요. 결국 클로디우스로 다시 태어난 클라우디우스는 카이사르가 갈리아 정복을 위해 로마를 비웠을 때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면서 카이사르의 정치적 생명을 위해 신명을 다했습니다.

 

2. 카이사르 당대의 로마는 전통적인 원로원 중심의 정치를 주장한 공화파와 민중의 권리를 주장한 민중파의 심각한 대립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가문의 전통에 따라 카이사르는 민중파에 속했지만, 그는 단순히 민중파에 머무르려 하지 않고, 민중파의 세력을 이용해 낡은 원로원 중심의 정치를 종식시키고 자신과 같은 능력있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제정을 창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카이사르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했던 사람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게다가 갈리아 정복을 위해 수도 로마를 8년 동안 비워놓다보니 반카이사르파의 세력은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카이사르는 위기를 느꼈죠. 특히 쿠리오라는 젊은 공화파의 활약은 대단했습니다. 요새로 치면 386세대 초선의원이라고나 할까요? 그런 쿠리오에게 카이사르는 편지를 씁니다. 피와 살이 튀고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갈리아 전쟁터에서 정적에게 쓰는 편지. 그러나 카이사르 특유의 간결, 세련, 명석한 문장은 반카이사르파의 희망이라고 할 정도였던 쿠리오를 한 순간 감동시키고, 결국 쿠리오는 원로원에서 자신이 카이사르의 열렬한 지지자임을 극적으로 나타냅니다. 그리고 카이사르가 갈리아 정복을 완성하고 루비콘 강을 넘어 로마로 쿠데타를 일으키기까지 서슬퍼런 반카이사르파에 맞서 카이사르의 정치적 이익을 지키는 데 앞장서게 됩니다.

 

  정은아, 내가 왜 굳이 길게 이 이야기들을 썼는지 이해가 가니? 처음부터 자기 사람은 극히 적다. 중요한 건 자기 사람을 만들어 가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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